유네스코(한국유산)/조선왕릉 답사

조선 왕릉 답사 (71) : 제3구역 선정릉(2)

Que sais 2021. 6. 29. 10:23

https://youtu.be/Ia6io2Sz0tQ

<선릉의 수난>

선릉은 유난히 많은 변고를 겪는데 첫 수난선조25(1592) 임진왜란 때 일어났다. 왜군선정릉을 파헤치고 왕의 관재궁(梓宮)불태운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런 폭거왜군과 조선인결탁했다는 점이다. 선조실록에는 유성룡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는 글이 있다.

 

‘“백운기(白雲起)왜적과 서로 결탁하여 선릉(宣陵), 태릉(泰陵) 두 능을 공모하여 발굴한 죄상을 이미 모두 승복했습니다. 큰 죄를 범한 사람이라서 잠시도 용납해 둘 수 없으니 결안취초(決案取招)로 조율하여 시행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백운기왜군결탁하여 왕릉의 훼손에 일조를 하였다는 뜻이다. 임진왜란이라는 특이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왕릉을 훼손하였다는 것은 조선인으로서는 상상하지 못할 일을 자행한 것이다.

또한 인조 3(1625)에는 정자각이 나 수리했고 다음해에도 두 번이나 능 위에 화재가 발생하는 등 재난이 끊이지 않았으나 왕릉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므로 전주사고에 보관된 실록을 토대로 선릉의 지석문과 옥책문등사했다. 또한 시신이 없으므로 대신 의대(衣襨)매장했고 조선왕조에서 계속 관리와 보수에 임해 현재에 이른다.

성종의 능이 조성되었을 당시에는 주변의 건성사선릉의 원찰이었다.

1498년 연산군건성사중창하고 친제를 행하고자 했으나 신하들이 불교식 제례유교국가의 이념에 맞지 않는다며 반대한 것은 물론 철거주장했다. 결국 연산군건성사선릉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옮겼는데 이 사찰이 현재의 봉은사.

 

선정릉의 원찰보우가 주지로 있었던 봉은사. 조선의 왕실에서는 국가 통치철학으로 불교배척하고 유교했으나, 정작 능원을 조영할 때 선왕의 안식왕권의 영원성을 위해 원찰을 지었다. 원찰조선 초기에는 능원마다 한 곳 이상씩 두었는데 태조 건원릉의 개경사, 신덕왕후 정릉의 흥천사, 세종과 소헌왕후 영릉의 신륵사, 세조와 정희왕후 광릉의 봉선사가 대표적이다. 특히 중종문정왕후봉은사중건했다.

조선조 불교사의 한 획을 긋는 본산이었던 봉은사신라 원성왕 10(794) 연회국사창건하여 견성사라고 했는데 연산군 4(1498)중창하여 봉은사개칭한 것이다. 선종수사찰 봉은사 보우주지로 임명하고 승과에서 승려들을 선발하는 승과고시를 실시해 서산사명대사한국불교의 선맥을 이은 스승들을 배출했다. 조선후기에는 영기스님이 판전을 세우고 화엄경 81판각했으며 추사 김정희봉은사에 머물며 말년의 추사체를 완성시켰다.

사찰의 입구에 일반적으로 일주문이 있는데 봉은사에는 진여문(眞如門)이 있다.

진여는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뜻하며 평등하고 차별이 없는 절대의 진리를 이른다. 봉은사의 문화재로는 봉은사 향로(보물 321), 사천왕(서울시유형문화재 제160), 선불당(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64), 대웅전, 지장전, 봉은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판전과 판전 편액(서울시 유형문화재 제83), 미륵대불, 종루, 해수관음상 등이 있다. 판전편액추사 김정희마지막 글씨로 유명하며 경내에 김정희의 기적비(紀績碑)가 있다.

 

<도굴되지 않은 조선 왕릉>

선정릉임진왜란 때 파헤쳐진 것을 생각하면 다른 왕릉들은 도굴되지 않았느냐는 궁금증이 일어난다. 어느 나라든 왕릉은 완성 직후부터 도굴과의 전쟁을 치른다고 알려진다. 사실 세계적으로 지금까지 멸망하지 않은 나라 없으며 파헤쳐지지 않은 무덤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철저한 계획을 갖고 만든 중국의 황제릉이지만 거의 모두 도굴 당했으며 우리나라의 고려왕릉 역시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 도굴 당했다. 고려청자 등 시신과 함께 넣은 부장품을 노리는 도굴꾼 앞에 대부분의 왕릉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릉 40선릉과 정릉만 제외하고 한 번도 도굴되지 않은 처녀분이다. 이와 같이 조선왕릉도굴을 면할 수 있었던 이유이창환 교수조선왕릉의 건축기술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

조선왕릉에서 시신을 모신 석실지하 3미터 깊이에 위치한다. 당시 시신을 지하 1.5미터에 묻어야 했음에도 도굴 방지를 위해 다소 변형한 것인데 석실의 벽과 천장은 두께가 76센티미터나 되는 화강암을 통째로 사용했다. 조선시대 이전의 왕릉잡석을 쌓아올리거나 판 모양의 석재를 겹쳐 쌓은 것이 대부분이던 것과 비교하면 훨씬 단단한 구조.

석재의 끝은 비스듬히 파서 이음매 부위를 서로 끼워 맞췄다. 목조 건축에서 못을 쓰지 않고 목재를 서로 끼워 넣는 방식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거기다가 ()’자 형태철제 고리로 두 석재를 고정시켜 석실 전체를 하나로 엮었다. 입구에는 61센티미터 두께의 돌두 겹으로 세워 외부의 접근을 막았다.

석실 주변에는 시멘트와 비슷삼물 1.2미터 두께로 둘러쌌다. 삼물석회에 가는 모래와 황토를 섞은 뒤 느릅나무 삶은 물에 이겨 만든 것이다. 삼물은 시간이 지나면서 단단하게 굳을 뿐 아니라 느릅나무 껍질에 있던 코르크층물과 공기차단하는 역할도 한다. 세조의 광릉 때부터 일정 기간 삼물이용회곽으로 석실을 만들었는데 이 경우 상당한 잇점이 있다. 석실을 만들 때보다 필요한 인력은 절반에 불과했지만 단단하기석실 못지 않기 때문이다. 이뿐이 아니다. 삼물 바깥에는 숯가루 15센티미터 두께로 감싸 나무뿌리가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마지막으로 주변을 1.2미터 두께의 잡석으로 다지고 봉분을 쌓아올려 왕릉을 완성했다.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견고한 도굴방지책도 도입했다. 세종의 영릉의 경우 석실 부재들의 이음매대형 철제 고리고정했고 입구에 이중 돌 빗장을 채웠다. 또한 석실 사방석회 모래 자갈 반죽을 두껍게 채웠다.

 

그러나 조선왕릉도굴되지 않은 또 다른 비밀부장품에 있다. 중국이나 고려시대와 달리 왕릉 안에 들어가는 부장품모조품으로 넣었고 엽전도 종이를 이용한 모조지폐를 사용했다. 더구나 부장품의 종류와 내용 산릉도감의궤에 상세히 남겼으므로 모조품만 부장된 조선왕릉도굴꾼의 표적에서 제외될 수 있었다.

참고적으로 성종의 뒤로 세자 연산왕위에 올랐는데 이때 연산성종의 묘호중국 황제와 같이 ()자와 성()자로 논하고 그해 성종의 영정그리게 했다. 학자들은 이것이 조선시대 최초의 영정이자 오늘날 제사상에 쓰는 사진 영정의 시초로 추정한다.

 

대한민국의 중심지에 있는 선능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데 많은 사람들이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이창환 박사선능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게 된 뒷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세계유산 등재 신청을 준비하면서 국내 학자들 간에는 선릉 지역일부 훼손된 능역제외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2차에 걸쳐 국제학자들과 학술대회를 하고 이곳 선릉에 들렀을 때 강남 개발의 내용주변의 지가 등을 설명했더니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학자들은 한국처럼 개발 압력이 많고 지가가 높은 지역문화재를 보존하고자 하는 국민적 정신세계 유산감이라며 조선시대의 모든 능을 등재 신청해 연속유산으로 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이러한 격려에 힘을 얻어 국내 학자들과 주무부서인 문화재청은 약 1,885(570여만 평) 15개 지구조선 왕릉 모두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중 선능이 포함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선왕릉의 만만치 않은 규모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을까 궁금해 하는데 사실 왕릉 건설 숫자를 보면 장난이 아니다. 산릉도감의 기록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7,000동원되는데 선릉의 경우 다른 경우보다 3,000늘어났다고 적었다.

학자들은 선릉에 다른 릉과는 달리 1만 명이나 동원되어야 했던 이유선릉병풍석과 웅장한 석물조각들을 꼽았다. 조선왕릉을 만드는 것이 만만치 않아 들이 간소하게 자신의 묘역을 만들라고 유언하지만 막상 후손들이 자신의 선대의 릉을 만드는데 남다른 공을 들였다. 효도의 한 방편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