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성북구 정릉동에 있는 정릉(貞陵, 사적 208호)은 제1대 태조계비 신덕왕후 강씨(?〜1396, 1899년)의 능으로 능역은 90,621평이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시대 풍습에 따라 향처(鄕妻, 고향의 부인)⋅경처(景妻, 개경의 부인)를 두었는데 강씨는 경처로 황해도 곡산부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康允成)의 딸이다. 이성계가 원나라 동녕부를 원정하여 공을 세우고 남해 일대 왜구를 수차례 토벌하면서 고려 중앙인 개성에 진출했으나 지방 토호라는 출신 때문에 한계를 느끼자 개성의 권문세족 출신인 강씨와 정략적인 혼인을 한 것이었다.
태조(이성계)와 신덕왕후가 처음 만나 사랑을 싹틔우게 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 어느 날, 말을 달리며 사냥을 하다가 목이 매우 타므로 우물을 찾았다. 마침 우물가에 있던 그 고을의 처자에게 물을 청했는데, 그녀는 바가지에 물을 뜨더니 버들잎 한 움큼을 띄워 이성계에게 건네주었다. 이성계가 버들잎을 보고 화를 내자 뒷날의 신덕왕후가 된 그 처녀는 “갈증이 심해 급히 물을 마시다 체하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그리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대답을 들은 이성계는 그녀의 갸륵한 마음 씀씀이에 반해 부인으로 맞아들이고 극진히 사랑했는데 1392년 조선을 개국하자마자 현비(顯妃)로 책봉되었고 이성계와의 사이에 방번(芳蕃)·방석(芳碩)의 두 왕자와 경순공주를 낳았다. 원래 태조의 원비는 신의왕후였으나 태조 즉위 전인 고려 공양왕 3년(1391)에 사망했기 때문에 조선왕조의 최초 왕비는 신덕왕후다.
남다른 사랑을 보낸 신덕왕후가 갑자기 사망하자 태조는 도성 안에 왕릉 터를 정하는 것은 물론 강씨 봉분 우측에 자신의 봉분인 수릉까지 정하고 수릉의 능호를 정릉으로 정했다. 오늘날은 정릉이 있던 곳이라 정동(貞洞)으로 부른다.
그동안 신덕왕후의 정릉은 막연하게 서울 한복판인 지금의 영국대사관/성공회 자리이거나 경향신문 문화체육관 근처로 추정해왔다. 그런데 신덕왕후의 능 석물로 보이는 문인석이 서울 중구 정동 소재 주한 미국대사관저 영내 하비브 하우스(Habib House)에서 발견되면서 정릉의 최초 위치는 미 대사관저 뒤편(영국대사관 뒤쪽) 인근으로 보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취현방(聚賢坊)’이라 불렀다. 추후의 일이지만 태종은 정릉의 초장지(철거지)에 있던 정자각을 옮겨 태평관의 누각을 짓고 봉분의 흔적도 없앴다. 일반적으로 왕실 초장지는 천장(遷葬) 후에도 사가에서 사용하지 못하게 봉분을 남겨두지만 태종은 이를 무시했다. 다만 문·무석인은 그대로 묻어두라고 명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 최초의 문·무석인의 조각물은 이들 지역 주변에 묻혀 있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이 개국된 1392년 신덕왕후가 조선 최초의 왕비로 책봉됐고, 그의 무덤인 정릉은 조선 최초의 왕릉이므로 태조가 공을 들여 조성했지만 제3대 태종이 즉위하면서부터 정릉의 위상은 확 바뀌어 남다른 푸대접을 받는다. 태종은 정릉이 도성 안에 있고 능역이 광대하다는 점을 문제 삼아 능을 사을한록(沙乙閑麓) 즉 현재의 정릉 자리로 옮기고 능역 100보 근처까지 주택지로 허락하여 세도가들이 정릉 숲의 나무를 베어 집을 짓게 했다. 또한 왕비의 제례를 폐하고, 봄·가을 중월제(中月祭)로 격하시켰다.
태종의 신덕왕후에 대한 폄하는 이뿐이 아니다. 1410년 8월 홍수로 흙으로 만든 광통교(廣通橋)가 무너지자 정릉의 석물로 돌다리를 만들도록 허락했다. 청계천이 복원되어 광통교도 모습을 드러냈는데 조선 최초의 병풍석과 방울ㆍ방패 조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일부 병풍석이 광통교에서 거꾸로 박혀 있어 현대인조차 푸대접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아냥도 듣는다. 광통교는 광화문 청계천 입구에 있으며 600여년이 넘었음에도 보존상태가 매우 좋으므로 청계천을 지날 때 꼭 한 번 들려보기 바란다.
신덕왕후의 능을 이방원(태종)이 푸대접한 것은 그녀와 이방원과의 알력 때문이다. 고려말 권문세가였던 신덕왕후 강씨의 가문은 이성계에게 정치무대의 중앙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주었고 더불어 신덕왕후는 슬기롭고 사리에 밝은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이성계는 전적인 사랑과 신뢰를 보냈다. 태조에게 신덕왕후는 충실한 내조자를 넘어선 정치적 동지였다.
문제는 강씨가 조선 개국에도 지대한 역할을 하는 등 실질적인 개국공신인데다 아들까지 낳았으므로 여세를 몰아 자신의 아들인 방석(芳碩)을 왕세자로 책봉하여 태조의 뒤를 잇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당대의 정치 역학상 생존을 위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이런 조치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도전, 남은 등이 그녀의 편이었고 무엇보다도 태조 역시 자신의 뜻을 따랐다. 당대의 어려운 여건에서 자신의 차남 방석을 세자로 세웠다는 자체가 그녀의 뜻대로 움직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이 꼬인 것은 그녀의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는 점이다.
졸지에 계모의 아들인 방석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긴 이방원은 출사표를 던지고 ‘1차 왕자의 난’ 때 신덕왕후의 두 아들 방번과 세자 방석을 죽이고 이어서 동복형인 방간이 그를 치려고 하자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결국 왕위에 오른다. 신덕왕후 자신은 이들의 죽음을 목격하지 않았음이 다행일지도 모르지만 방원은 곧바로 신덕왕후를 깎아내리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렇다고 태종이 무턱대고 태조가 사랑한 신덕왕후를 깎아내린 것은 아니다. 『태종실록』 16년(1416)에는 태종의 남다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태종이 물었다.
“계모란 무슨 뜻인가?”
윤정현이 대답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들어와 어머니가 된 사람이 계모입니다.”
“그렇다면 강씨가 내게 계모인가?”
“그 당시 신의왕후(태종의 생모)께서 돌아가시지 않으셨으니 어찌 계모라 하겠습니까?”
태종의 입맛에 맞는 이야기를 들은 태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강씨는 내게 조금도 은의(恩義)가 없다. 나는 어머니(신의왕후) 집에서 자랐고 장가를 들어서는 따로 살았으니 어찌 은의가 있겠는가?”
나름대로 명분을 쌓은 태종은 신덕왕후에 대한 폄하를 더욱 강하게 하여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태조와 자신의 친어머니 신의왕후 한씨를 함께 모시고, 계비 신덕왕후 강씨를 후궁의 지위로 격하시켜 신위를 모시지 않았다. 또한 기제는 서모나 형수의 기신제(忌辰祭)의 예에 따라 3품관(三品官)으로 제사를 대행하게 하였다.
신덕왕후에 대한 이런 대우는 태종 이후에도 지속되었는데 200여 년 뒤인 선조 14년(1581) 3사(三司)에서 신덕왕후의 시호와 존호를 복귀하고, 정릉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신들은 태조 능인 건원릉비에 신의·신덕왕후가 열거되어 있고, 강씨가 차비(次妃)로 서술된 점, 태조가 정한 강비를 시책(諡冊)에 칭송한 것을 감안하면 후대인들이 부묘(祔廟, 종묘에 신주(神主)를 모시는 일)를 폐하고 능을 옮기는 등 중대한 원(寃)을 남게 한 것은 모두 천리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그 뒤 현종 10년(1669) 송시열 등이 정통 명분주의에 입각한 유교이념과 예론을 강조하면서 복위를 주장하자 마침내 그녀의 신주가 태조와 함께 종묘에 나란히 봉안된다. 한편 능을 봉하고 제사를 베풀며 신주를 종묘에 안치하던 날 정릉 일대에 소낙비가 쏟아졌는데, 이 비를 백성들은 ‘세원지우(洗寃之雨)’라 불렀다. ‘신덕왕후의 원한을 씻어주는 비’라는 뜻이다.
정릉은 입구부터 다소 다르다. 입구의 금천교는 우리나라 자연형 석교의 대표적 조형기술로 주변으로 다양한 나무들이 서식하고 있다. 정릉은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참도가 직선이 아니라 ‘ㄱ’자로 꺾여 있다.
봉분에는 난간석과 병풍석이 없으며 혼유석, 문인석, 석마, 각각 1쌍의 석양과 석호가 있다. 조선 초대 국모의 능이라 할 수 있는 정릉은 다른 왕비의 능에 비해 상설의 규모가 작고 초라한 것은 사실인데다 이들 석물도 원형은 아니다. 현재 고려 공민왕릉 양식을 유일하게 충실히 따른 사각장명등과 혼유석을 받치는 두 개의 고석만 옛 능에서 옮겨온 것인데 장명등은 상부의 주두가 사라졌다. 당초 처음 취현방에 능을 조성했을 때는 고려 공민왕처럼 화려한 병풍석과 난간석은 물론 무인석까지 모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의 능만 보면 남다른 푸대접이 보여 정릉의 수난과 복원의 역사를 한 눈에 느낄 수 있다.
2009년 약수터 근처에서 소전대가 발견되어 원래의 자리인 정자각 좌측으로 옮겼다. 소전대는 조선초기의 릉인 건원릉, 태종의 헌릉과 신덕왕후 왕릉에만 있던 것으로 축문을 태우던 것인데 정조 때 작성한 『춘관통고』에 그 위치를 기록해놓아 쉽게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춘관통고』는 1788년 정조 때 국조오례의 연혁과 실행 사례를 자세히 기록한 책이다. 김동순 정릉관리소 문화해설사는 2012년 처음으로 이 소전대에서 제향을 지낸 후 축문을 불태웠다고 한다. 신덕왕후가 비로소 왕후로서의 대우를 받았다는 설명이다. 소전대는 조선시대 초기의 건원릉, 정릉, 헌릉 세 곳에만 있다.
정릉에서 북악터널 쪽으로 가는 도로 좌측에 신덕왕후의 명복을 비는 원찰 흥천사(興天寺)가 있다. 이성계는 강씨 사망 후 직접 신덕왕후 릉인 정릉 옆에 작은 암자를 짓고 행차를 조석으로 바쳤고 정릉의 아침 재 올리는 종소리를 듣고서야 수라를 들었다고 한다. 또한 원찰인 흥천사에 자주 들러 법도를 마련했다고 한다. 원찰이란 창건주 자신의 소원을 빌거나 사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우는 사찰을 말한다.
정동 자리에 있던 원찰은 연산군 때 불타 버려 폐허로 방치되다 정조에 의해 현재의 자리로 옮겨 새로 지어졌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용화전, 칠성각, 독성각, 만세루, 승방, 대방, 일주문, 종각이 있는 흥천사는 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의 말사다. 이성계가 아침마다 종소리를 들었던 흥천사 대종(보물 1460호)은 동대문(흥인문)을 거쳐 광화문 종루로 옮겼다가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으로 옮겨졌으며 현재는 덕수궁 자격루 옆에 있다. 흥천사는 제향 때 두부를 공급해 일명 두포사(豆泡寺)로 불리기도 한다. 사찰 내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이 5세 때 쓴 글씨가 남아 있고, 조선의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황후가 6·25전쟁 때 피난생활을 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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