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조선왕릉 답사

조선 왕릉 답사 (75) : 제4구역 영녕릉(1)

Que sais 2021. 6. 29. 10:34

https://youtu.be/ZokxfzA-S6I

1구역부터 3구역을 답사하면4구역영녕릉(英寧陵, 사적 195), 장릉, 융건릉이 남는다. 이들을 4구역으로 분리한 것은 영녕릉과 융건릉은 서울에서 떨어져 있으며 특히 단종의 장릉영월에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연계하여 답사하면 북한에 있는 2개의 왕릉을 제외한 40개의 왕릉을 모두 답사하는 대장정이 마무리된다. 제일 먼저 영녕릉을 향한다.

영녕릉은 조선의 4대 왕인 세종과 소현왕후 심씨의 무덤영릉(英陵) 17대 효종인선왕후 장씨의 무덤인 영릉(寧陵)이 좌우로 자리한 곳이다. 우연히도 두 능의 한글 이름이 같아 흔히 영릉으로 함께 불리므로 세종대왕의 능으로만 알려져 있고 효종의 능은 가려지곤 한다.

 

세종대왕에 대해서는 부연할 필요가 없는 조선왕조 최고의 왕으로 인식된다.

한글의 창제와 학문의 발전, 과학과 음악의 발달과 국방의 강화 등 찬란한 세종대왕의 업적은 조선 건국 이래 태종까지 이어지던 문물의 정비와 국가 체제의 확립완성단계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화려하게 꽃 피어난 국가적 자신감제도의 완성능의 모습에도 반영되어 영릉왕실 능제의 전형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영녕릉에서는 해마다 한글날을 전후하여 큰 잔치를 열어 세종의 뜻을 기리면서 지역민의 단결을 꾀하는 것은 물론 향토문화를 가꿔가는 계기로 삼는다.

매표소 입구를 지나면 우측으로 세종대왕의 동상이 있고 좌측으로 세종의 업적을 기념하는 세종전이 자리한다. 영릉에서 주목할 것은 기념관 앞뜰에 왕실의 과학기구들원형의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다는 점이다. 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 세계 유일의 오목 해시계앙부일구,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기측우기와 수표 등은 당시 과학기술의 발전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세종조에 만들어진 우수한 과학 기기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영녕릉을 방문한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덤이다.

 

 영릉(英陵)

살아 백 년의 세월이 아무리 호화롭다고 하더라도 죽어 만 년 유택만 못하다고 한다. 죽음은 결국 또 다른 삶의 연장임을 부인할 수 없는데 풍수지리에 의하면 명당이 아무데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단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이라면 명당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다.

세종대왕의 영릉은 조선왕릉 중에서도 천하의 명당자리라고 한다. 영릉 덕분으로 조선왕조의 국운 100년은 더 연장됐다는 말이 풍수사들 사이에 공공연히 나돌 정도다. 이런 명성을 갖고 있는 영릉은 우리나라 역대 군왕 가운데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긴 조선 4대 세종(13971450)과 소헌왕후(13951446) 심씨의 합장릉이다. 세종태종의 셋째 아들 1408년 충녕군에 봉해졌다. 원래 태종의 뒤를 이을 왕세자는 맏아들 양녕대군이었는데 그는 자유분방한 성품의 소유자이므로 왕세자로서 지녀야할 예의범절이라든가 딱딱한 유교적 교육과 궁중생활 등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이러한 그의 품행은 태종의 눈에도 벗어나 결국 1418년 양녕이 폐세자가 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태종양녕을 폐한 이유는 자유분방한 생활로 자신이 애써 이룩해 놓은 안정되고 강력한 왕권을 보존하는데 적합하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으로 인식한다.

 

그런데 세종태종으로부터 낙점을 받은 이유로 매우 흥미있는 기록 태종실록에서 보인다. 세종술을 적당히 마실 줄 알았다는 점태종으로부터 낙점받은 요인이라는 것이다. 태종실록 18(1418) 6 3일자 기록이다.

 

중국의 사신을 대하여 주인으로서 한 모금도 능히 마실 수 없다면 어찌 손님을 권하여서 그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느냐?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 또 그 아들 가운데 장대(壯大)한 놈이 있다. 효령 대군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니, 이것도 또한 불가하다. 충녕 대군대위(大位, 매우 높은 관작)를 맡을 만하니, 나는 충녕으로서 세자를 정하겠다.’

 

충녕술을 잘 마시지는 못하지만 적당히 마시고 그치므로 세자로 정한다는 뜻으로 태종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지나쳐서도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술 마시는 것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왕이 될 수 있는 자질이라고 태종이 강조했다는 뜻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다.

보통 왕들은 왕위를 물려받을 때 선왕이 죽은 뒤 닷새째 되는 날 입관을 마치고, 다음날 즉위한다. 세종은 다른 왕과 다르게 선왕이 살아있을 때 왕위를 물려받았다. 물론 태종과 세조도 선왕인 태조와 단종이 살아있을 때 왕위에 올랐지만 이 경우는 정황이 세종과 다소 다르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여하튼 태종 18(1418), 태종경복궁 보평전에서 대성통곡하며 만류하는 신하들의 간청을 뿌리치며 세종에게 옥새를 주며 왕의 자리에 앉힌다. 세종이 울면서 사양하자 태종은 결연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찌 나에게 효도할 생각은 하지 않고 이같이 어지럽게 구느냐. 내가 만일 신료들의 청을 들어 왕의 자리에 앉으려 한다면 나는 장차 마음대로 죽지도 못할 것이다. 이미 나는 다시 복위 않기로 북두칠성에 맹세했으니 더 이상 말하지 말라.’

 

사흘 뒤 세종경복궁 근정전에서 조선조 4대 왕에 즉위한다. 이때 충녕의 나이 스물 두 살이었다. 세종에 대해서는 워낙 잘 알려져 있으므로 영릉에 대한 이야기만 다룬다.

원래 영릉 1446년 소헌왕후 사망 후 현재의 서초구 내곡동광주 헌릉 서쪽 대모산에 능 하나에 봉분 속 석실을 둘로 합장 형태동릉이실로 조영된 능이다. 우측 석실은 왕의 수릉(壽陵) 생전에 미리 만들어 두는 능으로 조선 전기 능제의 기본을 이루었다.

그런데 세종의 능은 조성될 때부터 논란이 많았다. 영릉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주장 때문이다. 지관들이 강력하게 능자리를 철회하자고 권했지만 세종 다른 곳에서 복지(福祉)를 얻는다고 하지만 선영 곁에 묻히는 것만 하겠는가?하고 고집을 꺾지 않았다. 세종의 고집대로 능을 조성하였지만 세종의 능이 좋지 않다는 주장은 계속되어 세조 때 보다 강력한 천장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서거정 천장함은 복을 얻기 위함인데 왕이면 되었지 다시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라며 반대하여 옮기지 못했다.

결국 예종 1(1469)천장했는데 그곳이 풍수지리 상 한국 최고의 길지 중에 하나라는 현재의 영릉이다. 이때는 세조의 유언으로 병풍석과 석실을 쓰지 말라고 유언하여 회격(灰隔)으로 합장했다.

그러므로 구 영릉에 있던 석물들은 모두 그 자리에 묻었는데 이들이 1973년에 발굴되어 석상, 장명등, 망주석, , 무인석, 세종대왕 신도비 등이 세종대왕기념관 앞뜰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조선 왕조의 능제를 가장 잘 나타낸 능 가운데 하나가 영릉이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주산을 뒤로 하고 허리에 봉분을 이룩했으며 좌우측에 청룡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합장릉인 봉분 둘레에는 12면으로 꾸민 돌난간을 돌렸으며 난간석을 받치고 있는 동자석주한자 12를 새겨 방위를 표시했다. 병풍석 없이 2개의 혼유석과 장명등, 좌우에 망주석을 놓았는데 혼유석의 고석은 선대의 5개에서 4로 줄었다. 참고적으로 영릉 2개의 격실 사이 48cm의 창문(창혈)을 뚫어 왕과 왕비의 혼령이 통하게 하여 합장릉의 의도를 더욱 명확하게 했다.

 

상여(충주박물관 소장)

봉분 능침 주변석양과 석호를 서로 엇바꾸었고 좌우로 각각 2쌍씩 8마리를 밖을 향하여 능을 수호하는 형상으로 배치하고 봉분의 북 세 방향곡장을 둘렀다. 봉분 앞 한층 낮은 단(중계)문인석 1, 가장 아랫단(하계)무인석 1을 세우고 무인석 뒤에는 각각 석마를 배치하였다. 세종한국의 장례 방식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 예조에서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그동안 운구를 소나 말로 운반하는 수레인 유거(柳車)로 한 것은 중국의 풍습으로, 우리나라는 산지가 많아 불편하니 어깨에 메는 상여가 좋다.’

 

세종이 이에 따랐는데 이후 일반인의 상여도 수레가 아니라 사람들이 메고 운반한다. 상여는 매우 과학적인 원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폭이 1미터도 안 되는 좁은 논두렁을 수십 명으로 이루어진 상여꾼들이 상여를 메고 지나갈 때 양쪽에 있는 상여꾼들은 각각 발을 좁은 길의 벽에 붙이면서 한 발 한 발 전진하며 지나간다.

경사진 산비탈도 이런 형태로 전진할 수 있다. 상여꾼들이 좁은 길이라 할지라도 지나갈 수 있는 것은 역삼각형 피라미드의 형태를 취하여 힘을 분산시키면서 통과하기 때문으로 이것은 한국이 자랑하는 지게의 원리와 다름없다. 지게에 엄청난 짐을 지고 산을 오르내릴 수 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등산용 배낭은 기본적으로 지게의 원리차용한 것이다. 물론 현재는 대부분 버스나 장례차를 사용하지만 아직도 전통 상여로 장례를 치루는 것을 보면 전통이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