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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 답사 (76) : 제4구역 영녕릉(2)

Que sais 2021. 6. 29. 10:35

https://youtu.be/hNO9Q1NkM9I

<연주리의 탄생>

세종대왕릉영릉에 오게 되는 과정 즉 천장(遷葬)에는 매우 흥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앞에서 설명했지만 태종은 원래 서울시의 주요 문화재로 지정된 헌릉(강남구 내곡동 소재)에 묻혔다. 세종의 어머니원경왕후 민씨 사후(세종 2)능기(陵基)를 잡아놓은 것이다.

세종은 자신이 죽어서 아버지인 태종 곁에 묻히고 싶어 했다. 장자인 양녕대군을 물리치고 삼자인 자신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에 대한 보은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세종헌릉 서쪽(수평거리 190미터)자신의 수릉을 재위 시 미리 잡았다. 그러나 수릉 택지 1년 후 소헌왕후가 먼저 사망하여 장사를 지낼 때 수릉 자리풍수지리상 불리하다는 것을 발견한 대신들이 벌떼처럼 일어났지만 세종의 고집은 완강했다. 세종은 이미 태종의 은덕으로 왕위까지 누렸는데 그보다 더 큰 발복이 있겠느냐는 논리로 태종 곁에 자신의 수릉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결국 세종은 그의 고집대로 자신이 원하는 자리에 묻히는데 그의 사후 조선 왕조에 일대 피바람이 몰아친다. 문종이 즉위한 지 겨우 2년 만에 죽고, 아들인 단종은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후 영월 땅에 유배되어 죽는다. 왕자 여섯죽음을 당하는 등 조선 왕가에서 골육상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자 곧바로 이런 환난은 세종의 묘를 잘못 썼기 때문이므로 천장(遷葬)하여야 한다는 이야기가 대두되었다.

결국 예종 원년(1469)세종의 묘를 파묘하니 수의마저 썩지 않은 채로 물이 가득 차 있었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세종의 묘는 매우 좋지 못한 자리로서 왕가의 화를 자초하였다는 것이 공인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예종개장(改葬)할 묘소를 지금의 서울 땅에서 1백 리 이내에서 찾도록 하였는데 이때 지관이 천거하여 천장한 곳이 하늘의 신선이 하강하는 천선강탄(天仙降誕), 또는 신선이 앉아 있는 선인단좌(仙人單坐)이라고 불리는 천하의 대명당인 현재의 영릉이다. 영릉으로 세종대왕천장하게 된 후일담은 그야말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그 자리는 원래 광주이씨 삼세손인 충희공(忠僖公) 이인손(李仁孫)의 묘택이 있던 곳이다. 이인손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우의정에 이르렀고 그의 부친청백리로 유명한 이지직이요, 조부는 고려 말의 절의와 명문으로 명성을 떨쳤던 둔촌(遁村) 이집(李集)이다. 현재 서울시 강동구 둔촌동둔촌 선생이 살아 계셨던 곳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둔촌총목왕 3(1347) 문과에 급제한 뒤, 정몽주·이색 등 당대의 거유(巨儒)들과 교유하였다. 이후 합포종사(合浦從事)를 지내고, 신돈(辛旽)을 논박하다 미움을 받자, 늙은 아버지를 업고 영천(永川)으로 피신하여 천곡(泉谷) 최윤도(崔允道)의 집에서 3년 동안 피신했다. 이때 최윤도는 두 명을 다락에 숨겨두고 천곡의 부인과 여종 연아(燕娥) 등 가족들의 희생적인 보호를 받도록 했다.

 

이 당시의 일화가 역사의 미스터리로 제작되어 방영된 적이 있는데 최윤도의 여종 연아는 다락에 두 명의 외부인이 있는 줄 모르고 주인인 최윤도가 갑자기 식욕이 좋아지는 것을 의아해 생각했다. 평소에는 1인 분의 식사도 남길 정도인데 어느 날 부터는 몇 인 분의 식사를 거뜬히 치우는 것이다. 결국 두 사람다락에 숨어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연아주인의 뜻을 알고 자결하여 비밀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둔촌신돈역모주살된 후 개성으로 돌아와 판전교시사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하여 독서와 농경으로 여생을 보냈다. 현종 때 광주 암사동(현 서울 암사동)서원을 세우고 춘추제향을 모셨고, 숙종 때 구암서원(龜岩書院)이라는 현판이 하사되었으며 저서에는 둔촌유고(遁村遺稿)가 있다. 참고적으로 영천에서의 두 사람의 우의를 기리기 위해 7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음력 10 10이 되면 두 가문이 같은 날에 묘제를 지내고 서로 상대방의 조상에게도 잔을 올리고 참배를 하는 등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이인손이 세상을 떠나기 전, 한 지관이 자신이 일러주는 내용을 유언으로 쓰는 조건으로 묘택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첫째 묘택 앞을 흐르는 개울에 절대로 다리를 놓지 말 것이며, 둘째재실이나 사당일체의 건물을 짓지 말라는 것이었다. 광주이씨 문중이인손의 유언을 그대로 지켰다. 그러자 이인손의 친자 5형제와 종형제 3을 합하여 팔극조정(八極朝廷)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정승, 판서광주이씨 가문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후손이 볼 때 이인손의 묘택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양반 체면에 다리도 없는 냇가를 신발 벗고 건너야 하는 것은 물론 멀리서 온 자손이 잠잘 곳도 없이 모이자마자 헤어져야 하는 등 제사를 지낼 때마다 고역이었다. 누가 봐도 남부러울 것 없는 집안에서 심각한 문제가 생기자 광주이씨의 문중 회의에서 유언에 반하여 재실을 짓기로 결정했다.

한편 예종의 명으로 여주와 이천 쪽으로 세종의 천장 자리를 보러 나온 지관 안효례(安孝禮)는 명당자리를 찾기 위해 이곳을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났다. 주위에 인가가 없었기 때문에 쏟아지는 소낙비를 맞으며 비를 피할 곳을 찾는데 산자락 아래 조그마한 건물이 보였다. 광주이씨 문중에서 바로 전 해에 세운 재실이었다. 그는 재실을 향하여 달렸는데 예상치 못한 장애물이 갑자기 나타났다. 갑자기 쏟아진 소낙비 때문에 냇물이 불어 섣불리 건널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낙담하여 두리번거리던 그는 재실 아래쪽에서 돌다리발견한다. 결국 그는 돌다리를 밟고 냇물을 건너 재실에서 소낙비를 피했다.

소낙비가 그치자 주위를 돌아본 안효례는 깜짝 놀랐다. 그곳이 바로 자신이 찾아다니던 천하의 명당이었기 때문이다. 소낙비를 피하게 만들어준 고마운 묘택의 묘비를 보니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묘택이었다. 고민하던 그는 산도(山圖)를 그려 예종에게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묘택이 이미 자리 잡고 있음을 고하면서 세종의 묘추천했다. 그 자리는 군왕의 묘택으로서는 적합하지만 정승의 묘택으로는 과분하다는 설명도 첨언했다.

물론 여기에 야화가 있다. 당시 광주이씨 가문조정의 요직을 거의 독점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가 이인손의 묘택 때문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이것을 우려한 한 왕손조선은 전주이씨 왕조가 아니라 광주이씨 왕조라고 한탄하며 전주이씨 왕조의 앞날이 어둡다고 개탄했다는 말이 있다. 세종의 천장 자리이인손의 묘택을 선정한 진짜 이유는 광주이씨의 기()를 잘라내기 위한 뜻이 있었다는 설명이다. 당시에 여러 지관이 천장 장소로 여러 대상지를 추천하였는데도 굳이 우의정을 지낸 공신의 묘를 선정했다는 것은 광주이씨의 기를 꺾어야 한다는 뜻이 많이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예종은 당시 평안도 관찰사로 있던 이인손의 큰아들 광릉부원군 이극배(李克培, 성종 때 영의정)를 조정으로 불렀다. 아무리 왕이지만 사대부의 묘택함부로 어찌할 수는 없었다. 예종명당 터를 양도해달라고 우회적으로 압력을 가하였고 결국 이극배는 할 수 없이 문중 회의를 열고 선친의 묘 터를 내놓았다.

예종광주이씨 가문에 많은 재물을 하사하고 이극배의정부 우참찬(2)으로 승진시킨 후 조선의 어느 곳이라도 이인손의 묘를 쓰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인손의 묘를 파서 유해를 들어내니 그 밑에 있는 비단에 다음과 같이 적힌 글이 있었다.

 

단지대왕영폄지지(短之大王永窆之地)’

 

이 뜻은 단지대왕이 묻힐 자리라는 뜻으로 단지대왕(한쪽 다리가 짧다는 뜻)이란 세종대왕을 뜻한다. 이 부분은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사극에도 세종대왕절름발이라고 나오지 않지만, 명확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왕조에서 가장 유명한 천장 사건세종대왕 단지대왕으로 지칭했기 때문으로 만약에 세종절름발이가 아니었는데도 이를 호도했다면 광주이씨 전체가 큰 화를 입었을 것이 틀림없다. 여하튼 지관의 글은 계속되는데 이 자리의 주인이 나타나면 이곳에서 연()을 날려 하늘 높이 떠오르거든 연줄을 끊어라. 그리고 연이 떨어지는 곳에 나의 묘를 옮겨라라고 써 있었다. 이인손의 묘를 만들 때 이미 이장의 운명을 알았다는 것이다.

 

곧바로 편지의 글대로 연을 날리자 연은 바람에 날리어 서쪽으로 약 10리 밖에 떨어졌다. 연이 떨어진 곳에 이인손의 묘택을 삼았다. 현재도 이곳을 연이 떨어졌다 하여 연당이라고 부르며 연줄이 떨어진 지역이 바로 연주리(鳶主里, 현재의 능서면 신지리).

광주이씨 가문천하의 명당자리를 내주어 그 후 걸출한 인물이 배출되지는 못하였다고 하지만 동고 이준경, 한음 이덕형을 비롯하여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문과, 무과 급제자만 해도 무려 500에 이르는 명가를 이룬다. 특히 양수리에 있는 구정벼루정승만 아홉 분이나 묻혀 있는 곳이다. 당시의 여러 여건을 감안해볼 때 이씨 왕가의 많은 견제를 받아 영락하였을 것이지만 광주이씨가 계속 명문 가문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연주리의 충희공 이인손(李仁孫)의 묘 터도 명당이었기 때문으로 설명된다. 이인손의 유언이 적혀 있던 비단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한음 이덕형의 사당 안에 지금도 보관되어 있다고 알려진다.

이 사건을 다시 돌아보자. 이인손의 유언대광주 이씨의 후손재실과 돌다리를 만들지 않았다면 천하의 명당은 아직도 이인손의 묘 터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날 소낙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지관 안효례광주 이씨의 재실로 비를 피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돌다리가 없었다면 불어난 냇물을 건너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놓고 풍수가들이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은 이인손의 묘 터를 잡아준 풍수가이인손으로 하여금 재실과 돌다리를 만들지 말라는 유언을 하도록 했음에도 그는 이미 후손이 그 유언을 어길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풍수가이인손의 묘택이 천하 명당이므로 정승이 들어갈 자리가 아니라 절름발이 군왕(세종)이 들어갈 묘 터라는 것을 이미 알고 이인손으로 하여금 차선책을 대비하도록 조언하였다는 것이다.

세종대왕의 천장 사건은 조상의 기운이 후손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동기감응 혹은 친자감응의 예로서 잘 알려져 있다. 세종의 묘를 잘못 택했기 때문에 조선 초기에 수많은 환고가 있었지만 천장을 한 후에는 지덕 때문에 후손에게 큰 불행을 초래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묘택을 잘 쓰면 후손이 행복하며 그렇지 않은 경우 해가 미친다는 이같은 사례는 그 후 풍수지리의 중요성을 논할 때마다 자주 거론되며 한국인의 풍수에 큰 영향력을 미치지만 서오릉의 창릉 장에서 설명한 것처럼 발복 자체선조의 시신이 오래 지 않고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명당이라는 개념이 상당히 달라진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고양이살기 싫어하는 집은 특히 좋은 집이 아니라고 알려진다. 고양이습기를 싫어하는 짐승이므로 고양이가 도망가는 집의 땅 속에는 지하수의 맥이 흐르고 있기 십상이다. 쥐나 개미가 파고 다닌 땅도 좋은 땅이 아니다. 이것도 땅 속에 수맥이 지나가고 있다는 뜻으로 개미나 쥐는 땅 속에 살 때 어느 정도 습기가 있는 곳에 집을 짓기 때문이다. 습기가 많은 땅은 인간이 살기에 여러 가지 면에서 불리하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음택의 경우도 같은 맥락으로 설명할 수 있다.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보는 발복의 차원을 떠나 음택(무덤)을 굳이 습기가 많은 자리에 선택할 필요는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