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조선왕릉 답사

조선 왕릉 답사(80) : 제4구역 영녕릉(6)

Que sais 2021. 6. 29. 10:39

https://youtu.be/TAw3aaBuUCs

놀라운 것은 최석정 9 직교 라틴 방진 제시했다는 점이다. 이는 각각 9차 라틴방진을 이루면서, 81개의 칸에는 (1, 1)부터 (9, 9)까지 81가지 경우가 중복되지 않고 한 번씩 제시된다는 것을 뜻한다. 구수략에서는 종횡개득구십수(縱橫皆得九十數) 총적팔백일십(總積八百一十)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종과 횡 모두 90을 얻어 더하면 810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각 칸의 첫 번째에 제시된 수들은 각각 가로와 세로 방향으로 1부터 9까지이므로 그 합이 45이고 두 번째 수들의 합 역시 45가 되므로 합하면 90이 되며, 그런 가로줄이나 세로줄이 9 있으므로 810이 된다는 뜻이다.

최석정이 만든 9차 직교라틴방진중국의 수학책에 포함되지 않은 독창적인 것이다. 최석정에게 있어 마방진을 만드는 과정은 단순한 숫자 놀이가 아니다.

유럽에서도 마방진이 알려져 있었다. 1600년대 프랑스의 바쉐 3, 5, 7 등의 홀수 마방진을 만드는 방법을 발표하여 이를 바쉐의 방법이라고도 한다.

3차 마방진에서 각줄의 합은 15, 4차 마방진 34, 5차 마방진 65가 된다. 3차 마방진낙서의 배열이 유일하지만, 4차 이상의 방진에는 배열이 다른 마방진들이 다수 존재한다. 현대 수학자들이 지금까지 알아낸 바로는 4차 마방진 880, 5차 마방진 27530여 개가 존재하는 것으로 계산됐다. 그러나 6차 이상의 마방진에 대해서는 그 숫자가 몇 개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라틴방진 n의 서로 다른 기호를 써서 n n정사각형으로 늘어놓을 때 각행 각열에 어느 기호건 하나씩만 나타나도록 한 것을 말한다. 이에 사용되는 기호라틴문자이므로 이 같은 명칭이 붙었다.

 

최석정오일러(이창주 교수)

또한 라틴방진 중에서 이러한 배열 두 쌍을 결합시켰을 때에도 겹치는 숫자쌍이 없는 두 쌍의 라틴방진직교라틴방진이라 한다. 오일러라틴방진을 연구하다 두 가지 라틴방진을 겹쳐놓았을 때 각 항목이 모두 다른 경우를 생각해내고 거기에 그레코-라틴방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나는 그리스어 알파벳으로, 다른 하나는 라틴어 알파벳으로 이뤄져 있는 두 라틴방진합쳤다는 의미. 이후 오일러를 기려서 그레코-라틴방진 오일러 방진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최석정이 적은 9 직교 라틴 방진 9 9대각선 합 369로 같으며, 이를 이루는 9개의 숫자로 이루어진 9개의 작은 셀이 다시 마방진을 이루는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다. 그의 발표는 레온하르트 오일러발표보다 60여 년 앞서는 것은 물론 오일러 6차부터 마방진이 불가능하다고 했으나, 최석정은 9차 마방진을 만들어 낸 것이다.

최석정 9차 직교라틴방진은 매우 중요한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먼저, 9차 직교라틴방진으로부터 9차 마방진쉽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9차 직교라틴방진의 수는 매우 많은데, 숫자 5가 두 라틴방진 모두의 한쪽 대각선에 있으면 9차 마방진을 만들 수 있다. 최석정은 많은 방법 중에서도 매우 특별한 성질을 지닌 9차 직교라틴방진을 찾았다.

다른 하나는 최석정이 발견한 직교라틴방진의 쌍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 하나의 라틴방진을 중심수직선 기준으로 180도 회전하면 다른 하나의 라틴방진이 된다. 다시 말해서 동일한 행에 기록된 숫자의 순서서로 반대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라틴방진만 알고 있으면 직교하는 나머지 라틴방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직교라틴방진이 가지는 이러한 특별한 대칭적 성질에 대한 연구는 최근에 보다 진전되어 전산학이나 공학 분야에서 유용하게 응용되고 있다.

최석정에게 있어 마방진을 만드는 과정은 단순한 숫자 놀이가 아니었다. 최석정역학과 음양 사상을 바탕으로 수를 연구했으며, 철학적으로 수를 성찰한 것이다. 최석정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관하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다. 헌정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최석정의 수학책 구수략 17세기에 알려진 기초적인 수학에서 중요한 내용을 모두 추리고 역학(易學)이론을 합하여 동양철학에 입각한 수학적 이론을 세웠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최석정은 당시 유럽의 발달된 수학에서도 알려지지 않았던 9차 직교라틴방진을 발견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는 구수략의 부록() 하락변수(河洛變數)에 기록되어 있다. 이런 사실이 2007년 조합론디자인편람(組合論DESIGN便覽)에 언급되면서 국제학계에서 세계 최초로 인정 받았다. 조합수학(組合數學, Combinatorial Mathematics)의 효시로 알려진 레오나드 오일러(Leonhard Euler)직교라틴방진에 관한 논문과 발표(1776)와 비교하자면, 구수략최석정이 죽은 해인 1715에 쓰인 것이라 가정해도 61년 앞서는 결과.’

 

마방진이 얼마나 조선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가는 조선 정조 때의 화가김홍도의 풍속화에서도 나타난다는 점이다. 해학과 정감이 넘치는 풍속화를 다수 그린 단원 김홍도의 대표작 씨름으로 알려진다.

 

김홍도의 씨름과 마방진(자료 박경미)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 방향()대각선의 합 8+2+2 12이고,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 방향()대각선의 합 역시 5+2+5 12가 된다. 김홍도가 의도적으로 계산을 하여 그린 것인지, 아니면 균형감을 유지하기 위한 구도가 X자 마방진으로 귀결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박경미 박사김홍도가 그림 속의 사람들을 적당히 분산 배치시켜 그림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했는데 그 방법으로 마방진이용했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경우들을 중복되지 않게 배치하는 마방진통계학 실험 설계의 모델을 제공하기도 한다. 특히 마방진을 취미로 연구하는 동호인들이 존재하는 데 이는 마방진이 사람을 매료시키는 마법의 힘이 있다고 평가한다.

 

<나선정벌>

효종대에는 하멜의 표류 외에도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다. 나선정벌(羅禪征伐)이다.

재위 기간 오로지 북벌만 준비했던 효종에게 그야말로 자신이 원치 않는 상황을 맞이한다. 청나라러시아 정벌에 나서면서 조선군의 파견요청한 것이다. 러시아 군의 남하가 계속되자 1654년 청나라밍안다리(明安達禮)로 하여금 북경수비대지휘하여 러시아군을 격퇴토록 했다. 이때 은 화력을 보강하기 위해 조총으로 무장한 조선군 포수들의 파병을 요청했다.

1636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와 군신관계에 있었던 만큼 조선 입장에선 청나라 요구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효종은 결국 북병영 우후 변급(變岌)으로 하여금 100명의 조총수를 비롯하여 초관과 기고수 150을 지휘토록 했고 이들은 3월 두만강을 건넜다.

영고탑에 도착한 조선군청나라 군사와 합류흑룡강 방면으로 출발했다. 이들은 4러시아군과 조우해 곧바로 교전했는데 전투는 7일 동안 벌어졌지만 승리조청연합군에게 돌아갔다.

변급의 보고에 따르면 러시아군 300석 크기의 대선 13, 소선 26병력은 400여명이었다. 조청연합군대선 20척 소선 140조선군 152, 청군 1,000으로 구성되었다. 조청연합군의 숫자는 많았지만 이당시 대선이란 고작 17명이 승선하는 작은 배였다.

화력이 열세라고 생각한 변급은 수상전을 피하는 대신 육지버드나무로 만든 방패를 세운 후 러시아 함선집중사격을 가했다. 이 공격에 러시아군은 많은 부상자를 내고 흑룡강을 거슬러 철수했다. 당시 조선군은 단 1명의 사상자도 없었다. 청사고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순치 11(1654) 군사를 이끌고 아라사를 정벌했다. 흑룡강에서 적을 물리쳤다.’

 

조선러시아군을 상대로 싸워 승리한 최초의 쾌거변급은 개선 후 수군절도사를 역임했다.

 

효종의 나선정벌

2차 나선정벌 4년 후인 1658에 일어났다. 청의 요청으로 조선은 다시 북병영 우후로 있는 신류(申瀏)에게 조총수 200, 기고수와 초관 등 총 260을 이끌고 참전토록 했다. 이들은 6송화강과 흑룡강의 합류 지점에 도착해 러시아 제독 스테파노프가 이끄는 함대와 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스테파노프를 포함해 러시아군 270여명전사한 데 비해 조선군 희생자 8에 불과했다. 신류 북정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적선 11척이 흑룡강 중앙에 닻을 내리고 있는 것을 보고 아군이 즉각 전선을 향해 달려들었다. 숨돌릴 겨를 없이 총탄과 화살이 빗발치자 배 위에서 총을 쏘던 적병조차 견디지 못하고 모두 배 속으로 들어가 숨거나 배를 버리고 강가의 풀숲으로 도망쳤다.’

 

러시아의 일방적인 패배 11척의 선단 가운데 10척이 불타고 1척만 겨우 달아났다. 스테파노프의 부하 페트릴로프스키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전투에서 대장 스테파노프카자흐 병사 270전사했다. 차르에게 바칠 국고 소유의 담비가죽 3,080, 대포 6, 화약, , 군기, 식량을 실은 배가 모두 침몰했다. 겨우 성상을 실은  1척에 95이 올라타 간신히 탈출했다.’

 

효종은 북벌을 준비하면서 조선군의 장점조총병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효종의 야심작 조총병청나라를 공격하는 데 쓰이지 못하고 오히려 청나라를 도와 러시아를 정벌하는 데 활용됐다.

주적(主敵)으로 삼고 북벌을 준비했던 효종이 도리어 청의 출병 요구러시아와 전투하기 위해 조선군을 파병한 것이다. 학자들은 효종의 북벌구호로만 그쳤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건이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당대의 북벌왕권유지를 위한 명분 축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