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의 장릉(莊陵, 사적 196호)은 비운의 왕으로 알려진 제6대 단종(1441〜1457)의 능이다. 조선 왕릉은 현재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하고 대부분 도성인 한양을 중심으로 반경 4〜40km에 조영됐다. 그러나 조선 제6대 단종의 장릉(莊陵)은 유일하게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산133-1번지에 있다. 이곳은 산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오지로 면적은 107여 만 평이나 된다. 단종이 이처럼 먼 곳에 묻힌 이유는 ‘단종애사(端宗哀史)’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이곳에서는 생략한다.
단종은 1441년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아들로 태어난 다음날 어머니를 여의었다. 10세 때인 1450년 문종의 즉위로 왕세자로 책봉되었는데 아버지 문종이 왕이 된지 2년 3개월 만에 사망하는 바람에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세상의 모진 풍파를 겪으면서 조선시대뿐 아니라 한국사 전체에서 가장 비극적인 국왕이 된다.
객관적 조건으로만 보면, 왕위 계승자로서 단종의 조건은 완벽했다.
부왕 문종도 적장자였고, 단종도 적장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가장 비참한 운명의 국왕이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역설적이다. 문제는 단종이 너무 어린 나이로 왕이 된데다 수양대군(35세)과 안평대군(34세)을 중심으로 한 숙부들은 인생에서 가장 정력적인 시점에 와 있었다는 점이다. 더구나 그들은 뛰어난 능력과 커다란 야심을 갖고 있었다. 단종의 신하들은 대부분 세종대의 인재들이었다. 삼정승은 세종의 고명(誥命)을 받은 황보인(皇甫仁), 남지(南智), 김종서(金宗瑞)였고, 그 아래의 실무진은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신숙주(申叔舟) 등으로 대부분 집현전 학사 출신이었다.
단종이 즉위한 지 1년 반 만에 ‘계유정난’이 일어난다. 그것은 태종이 일으킨 제1․2차 왕자의 난과 함께 조선 전기의 가장 대표적인 권력 투쟁이었지만 계유정난의 과정과 결과도 잘 알려져 있으므로 이곳에서 설명하지 않는다.
여하튼 계유정난을 거쳐 단종은 숙부인 세조에게 양위하고 상왕이 되었다. 이후 일어난 사육신 사건의 과정과 결과도 잘 알려져 있다. 단종 복위 운동을 하다가 죽음을 당한 성삼문ㆍ박팽년ㆍ이개ㆍ하위지ㆍ유성원ㆍ유응부 등의 6명을 사육신(死六臣)이라 하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분개해 한평생을 죄인으로 자처한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은 귀머거리나 소경인 채 살아가거나 두문불출하며, 단종을 추모했다. 이 6명을 생육신(生六臣)이라 한다. 사육신과 생육신 등의 신하들을 통칭하여 다른 훈구파와 구별하여 따로 절의파(節義派)로 부르기도 한다.
사육신은 워낙 한국사에서 중요한 역사의 한 장면을 제공하므로 간략하게 설명한다.
세종대왕은 생전에 자신의 장남 향 즉 문종이 오래 못살 것이라 판단하고 집현전 학사들을 불러 어린 손자인 단종을 부탁했다. 세종이 이런 영을 내린 것은 왕자들끼리 권력 투쟁이 치열하게 벌어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핵심이 세종의 아들인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라는 점이다. 그들이 역모할 가능성이 있다는 심증은 있지만 확실한 증거없이 그들을 처벌할 수는 없었다.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에게 단종을 부탁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감았다.
세종을 이은 문종은 황보인과 김종서에게 단종을 보위하도록 지시했다. 문종은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집현전 학사들에게 단종을 부탁했고 심지어는 그들에게 술을 권하기도 했다. 집현전 학사들이 술에 취하여 잠이 들자 내시를 시켜 이불을 덮어주게 했다. 이들이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문종이 3년 만에 사망했다. 단종이 보위에 오른 후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 치열하게 다툼을 벌였다. 안평대군은 이현로를 참모로 발탁하고 수양대군은 한명희를 발탁했다.
수양대군은 활을 쏘고 술을 마시는 사음회를 열어 휘하 장사들을 끌어 모았고 안평대군도 이에 질세라 장사들을 포섭했다. 이들의 동태를 예의 주시한 김종서가 수양대군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이들을 제거하려고 했으나 수양대군이 한발 빨랐다. 1453년 수양대군은 한명회, 권람, 홍윤성 등과 함께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는 물론 살생부에 따라 대신들을 살해했다.
이어서 숙청 바람이 일어 안평대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끌려갔다가 사사되었고 황보인, 김종서 일파가 줄줄이 살해되었다. 그리고 수양대군이 스스로 영의정이 되어 군국대사를 좌우했다. 한편 집현전 학사들은 수양대군의 행동에 불만을 가졌으나 단종에게 해가 갈 수도 있다며 내색하지 않았다.
수양대군의 반정 이유는 간단하다. 김종서와 황보인 등이 어린 단종을 조종하여 권력을 휘두르고 있으며 안평대군이 보위를 찬탈하려 하므로 부득이 단종의 허락을 받지 않고 난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집현전 학사들의 이상한 행동이다. 집현전 학사들이 수양대군의 행동에 불만을 갖고 있었지만 왜 이를 방치했는가이다. 즉 이들이 똘똘 뭉쳐 수양대군 일파를 일찍부터 제거하려 했다면 성공했을 가능성도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양대군의 말처럼 김종서와 황보인 등이 어느 정도 단종 밑에서 권력을 휘둘러 집현전 학사들의 눈에 났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단종이 나이 어리다 하지만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를리 없는 일이다. 실록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수양대군 일파들은 단종을 압박하였고 결국 단종은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수양대군에게 양위했다. 이 일은 그동안 눈치만 보고 있던 집현전 학사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집현전 학사들은 비밀리 회동하면서 단종 복위 운동을 시작했는데 그들은 문신이므로 무관인 성삼문의 부친인 성승, 유성원의 부친인 유응부를 거사에 끌어드렸다. 이들이 단종 복위 거사에 가담하면서 계획은 점점 구체화되었다. 박팽년은 형조판서를 지낸 아버지 박중림을 끌어들였다. 박중림은 세조가 이조판서에 임명했으나 거절할 정도로 강직한 원로 대신이었다. 한편 신숙주는 참여를 거부하여 천하의 배신자라는 이름을 얻었고 숙주나물의 오명을 얻는다.
계획은 구체적으로 세워져 1456년 세조 2년 6월 명나라 사신을 향응하는 창덕궁 태평관에서 유응부와 성승이 운검을 차고 있다가 수양대군을 살해하겠다는 것이다. 당시 무관 두 명이 왕의 좌우에 서서 호위하는 것을 운검이라고 한다.
그런데 거사 당일 그야말로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한명회가 연회 장소가 비좁다는 이유로 운검을 세우지 않으며 세자가 병으로 연회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종 복위 운동을 거사하려던 학사들은 돌변한 사태에 거사를 연기하기로 결정하고 유응부와 성승에게 통고했다. 유응부는 이에 오늘 결단하지 않으면 반드시 실패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성삼문이 연기해야 한다는 말에도 논리가 있었다.
‘세자가 경복궁에 있고 한명회가 운검을 폐한 것은 아직 수양대군을 죽이지 말라는 하늘의 뜻입니다. 수양대군을 죽인다 해도 경복궁에 있는 세자가 군사를 끌고 와 진압하면 우리의 거사가 실패할 수 있습니다.’
성삼문과 박팽년이 거사를 연기해야한다고 계속 주장하자 유응부가 성삼문에게 호통쳤다.
‘이런 일은 빨리해야 하는데 늦추면 일이 틀어질 수 있다. 세자가 비록 오지 않았지만 수양대군의 우익이 모두 이곳에 있으니 이들을 죽이고 상왕을 곧바로 복위시키면 성공할 수 있다.’
결론은 잘 알려진 일이지만 유응부의 주장은 많은 집현전 학사들의 반대로 관철되지 않았다. 결국 거사 동조자 중 한 명인 김질이 거사가 연기되자 이에 불안하여 장인 정창손에게 실토했고 곧바로 세조에 고했다.
세조는 즉시 비상령을 내리고 단종 복위에 참가한 사육신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했다.
곧 성삼문 등에게 참혹한 고문을 가했으나 모두 굴하지 않았는데 유응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들이 말하되 서생과는 같이 일을 꾀할 수 없다 하더니 과연 그렇다. 지난번 잔치하던 날에 내가 칼을 시험하려 하니 너희들이 굳이 말하기를 ’만전의 계책이 아니다‘하여 오늘의 화를 당하게 된 것이다. 너희들은 사람이라도 꾀가 없으니 짐승과 무엇이 다르랴.’
한마디로 유응부는 친국장에 끌려 나온 집현전 학사들은 짐승과 같다고 비난했다. 단종을 복위하려던 거사가 그들의 판단 미숙으로 실패했으니 유응부의 비난은 당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유응부의 기개는 이정도가 아니다.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태평관에서 한 칼로 족하(足下)를 폐하고 상왕을 복위하려 했으나 불행히도 간사한 인간이 고발하여 이 꼴이 되었으니 다시 물어 무엇을 하겠는가. 족하는 빨리 나를 죽이라.’
족하란 상대를 낮추어 부르는 말이다. 화가 난 세조는 눈에 핏발을 세우고 유응부의 살가죽을 벗기며 친국했다고 한다. 결국 성삼문ㆍ박팽년ㆍ하위지ㆍ유응부 등은 거열형에 처해졌다. 박평년은 고문을 받다가 옥중에서 죽었지만 대역 죄인으로 역시 거열형에 처해졌다.
한편 유성원은 자기 집에서 자살했지만 역시 거열형을 당했다. 사육신 중 하위지는 세조가 죄를 시인한다면 살려주겠다고 하였으나 스스로 사양하고 죽음을 택했다. 사육신은 세조의 혹독한 고문끝에 일가족과 함께 새남터에서 참수형으로 처형당했다.
사육신과 그 가족들은 본인과 아버지, 형제, 아들, 손자, 조카까지 모두 연좌되어 처형당했고, 생후 1년, 2년 된 어린 남자아이는 입에 소금을 채워 질식사시키거나 나이가 찬 뒤에 처형하였다. 백부, 숙부, 조부, 종조부, 사촌까지는 노비로 보내지거나 관노로 고을에 영속되거나 병사로 충군 당했고, 5촌 이상은 유배형을 당했다. 사육신 사건으로 500여 명에서 800여 명이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진다.
참고적으로 성삼문이 죽은 뒤 그 집을 적몰했는데 세조가 즉위한 해인 1455년부터 받은 녹봉을 따로 한 방에 쌓아두고 이를 일일이 적어두었다. 집에 쓸 만한 재산이 일체 없고 침방에는 초라한 짚자리만 하나 있었다. 성삼문은 이미 오래전부터 죽음을 준비해 놓았던 것이다.
사육신 일족 중 후손이 생존하고 있는 집안은 박팽년가와 하위지 가문이 있다. 하위지의 조카 중 하포, 하박, 하원 등은 미성년자라서 처형되지 않았고, 박팽년의 며느리 이씨는 자신이 낳은 아들과 여종의 딸을 바꾸어, 자신의 딸이라 주장하여 아들을 살렸다. 아들 박비는 성종 때에 자수하여 특별히 사면되고 박일산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그 밖에 사육신 가문의 가까운 친인척 중 살아남은 인물은 이개의 종증손이자 토정비결의 저자 이지함이고 종고손은 북인의 이산해다. 또한 생육신의 산 명인 성담수가 성삼문의 6촌 동생이다.
사육신은 사후 중종 때 복권의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현종 때 송시열, 김수향 등이 사육신의 복권을 청하는 상소를 계속 올려 영조, 정조 때에 관작이 복구되고 증직과 시호가 내려졌다. 정조 6년(1782) 정조는 성삼문ㆍ박팽년ㆍ이개ㆍ하위지ㆍ유성원ㆍ유응부를 추모하여 노량진에 조선육신이라는 신도비를 세워주었고 현재 사육신 공원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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