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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 답사 (81) : 제4구역 영녕릉(7)

Que sais 2021. 6. 29. 10:40

https://youtu.be/A9zJiqnnO0Q

<천장된 영릉>

효종의 무덤건원릉 서쪽 능선에 있는 현재 구리시에 위치한 영조 무덤원릉으로 정해진 후 10월 말 계획대로 안장되었다. 그런데 막상 효종의 시신을 관에 넣는데 문제가 생겼다.

그동안 효종의 어깨가 너무 넓어 시신을 넣기 위해 준비한 관이 맞지 않은 것이다.

조선 시대의 왕의 장례 절차왕이 즉위하자마자 관을 짜고, 왕이 사망하기 전까지 매년 옻칠덧칠해서 보관한다. 효종의 재위 기간 10 동안 어깨가 더 굵고 넓어졌다는 뜻이다. 효종북벌에 신경을 쓰기 위해 체력을 단련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실록에 의하면 송시열 효자는 염을 단단히 묶지 않는데 이는 부모가 살아나기를 바라는 효심을 보이는 법'이라고 주장했다. 염을 단단히 묶지 않아 시신부패하면서 부풀어 올라 관이 맞지 않았다는 설명도 있다.

여하튼 어깨가 넓어 관이 작자 널빤지를 잇대어 왕의 관늘리는 초유의 일이 생겼으며 옻칠을 더하여 널빤지를 이은 자국을 감추도록 했다. 왕의 몸에 맞는 을 만들 널판이 없어 덧댄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기 힘든 일이지만 왕이 즉위하자마자 미리 관을 만드는 당시 절차 때문에 그동안 준비한 관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능이 조성될 당시 10은 양력이 아니라 음력이므로 한창 추울 때다.

왕릉조성 작업은 처음부터 부실하게 이뤄져 다음해 장마 때 석물에 균열이 온다. 곧바로 석물을 고쳤지만 겨울이 다 지나갈 무렵 다시 석물이 무너져 이듬해 능을 다시 대대적으로 고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효종의 후임인 현종은 재위 15년 내내 거의 매년 아버지 무덤 수리를 해야 했다. 결국 현종은 사망하기 일 년 전인 1673 아버지의 무덤을 옮기기로 결정하고 현재의 여주 땅으로 이장했다.

이 당시 천장의 이유는 석물에 틈이 생겨 빗물이 들어 갈 염려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막상 여주의 영릉 곁으로 옮기기 위해 영릉을 개봉하니 깨끗하여 책임자들이 면직되기도 했다.

다음해에 왕릉 앞에 인선왕후 능을 써서 좌우로 이웃한 다른 쌍릉과는 달리 앞뒤로 나란히 쌍릉을 이룬 동원상하릉이다. 이와 같은 형태는 조선왕릉 가운데 성북구의 의릉(경종)과 더불어 2개뿐이다. 그러므로 효종릉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멀리 왕비릉의 뒷모습과 그 너머 정자각의 뒷모습우측에 보인다. 이와 같은 것을 북상(北上)이라 하여 부부의 묘, 조상의 묘를 배치할 경우 매우 좋은 묘택으로 인식한다. 반면에 이 위치가 바뀌면 도장(倒葬)이라 하여 매우 좋지 않게 여겼다. 역적이 나면 삼족을 멸한 후조상의 묘를 그 같이 옮겼다고 한다.

효종의 능에만 3면의 곡장을 두르고 왕비의 능은 두르지 않았는데, 정자각과 곡장 사이를 하나의 공간으로 해석해 왕과 왕비가 같은 방을 쓰고 있다는 의미. 두 능의 상설제도가 같으며 십이지신상을 새긴 병풍석세조 이후 사라졌다가 한동안 다시 사용되었는데 이 능에서 또 다시 폐지되었다. 난간석을 받치고 있는 동자석주에 글씨를 새겨 방위를 표시하고 있다. 석물사회적 안정기에 조성한 것이어서 조각의 기교가 뛰어나고 아름답다. 특히 무인석의 모자 표현중국의 영향을 받은 시대상을 읽을 수 있으며, 석호의 눈망울이 크고 해학적이며 발톱과 꼬리가 생동감을 준다.

영릉에서 눈여겨볼 곳은 재실이다.

영릉 재실도 영릉과 마찬가지로 1659년에 초창된 후 두 번의 이건과정을 거쳐 현재의 위치에 자리하지만 초창 시 장릉(長陵)의 예를 따랐다. 1673천릉하며 기록한 효종천봉산릉도감의궤(孝宗薦奉山陵都監儀軌)에 의하면 이 때 재실은 기존의 건물을 철거하여 이건하였다. 재실안향청(安香廳), 집사청, 전사청, 참봉청, 행랑, 침가(砧家), 일간문으로 구성되었는데 장릉과 비교해보면 어재실안향청으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전체 규모와 형식이 일치한다. 이는 장릉 재실을 모범삼아 영릉 재실건축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재실 1674년 인선왕후사망하자 현종릉과 합사하면서 내청룡 밖에 다시 이건하였다. 이때도 구 재실을 철거하여 이건하였기 때문에 건축의 규모와 형식은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현재 영릉 재실안향청, 제기고, 재실, 행랑채 부속동, 행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재실 뒤편으로 낮은 구릉지를 면하고 있어 가로로 길게 안향청, 제기고, 재실이 차례로 배치되고, 그 전면에 길게 대문이 있는 행랑이 자리하고 있다. 1900년경 영릉의 재실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능제규례(陵祭規例) 재실지도(齋室之圖)를 보면 현재 재실은 능역을 관리하는 참봉의 거처였던 참봉청이었으며, 제기고라 부르는 건물은 집사청이었다. 행랑채 부속동제기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례시 왕과 헌관이 머물었던 안향청은 재실 건물 중 가장 격식있는 건물이다.

한마디로 영릉재실은 두 번의 이건 과정을 거쳤지만 모두 구 건물을 철거하여 이건함으로써 1659초창시의 모습을 대부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큰 이점이다. 현존하는 조선조 왕릉 재실 중에서 원형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으며 건물의 공간구성과 배치가 가장 뛰어난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영릉의 재실 공간에는 주목해 볼만한 것이 있다. 천연기념물 제459로 지정된 회양목과 향나무 그리고 재실 건축 연대보다 더 오래된 500년 이상의 느티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재실의 역사성을 한층 높여준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회양목은 잎이 두껍고 타원형이며 꽃은 45월에 피고 열매는 67월에 갈색으로 익는 사철 푸른나무.

석회암 지대에 주로 자생하지만 원래 회양목은 작고 낮게 자라는 나무인데 이곳 재실처럼 크게 자란 나무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생물학적인 가치큰 노거수 일 뿐만 아니라 1673에 조성한 효종대왕 영릉 재실에서 300여 년 동안 자라온 나무로서 그 유래 및 역사성이 매우 깊어 천연기념물지정되었다.

영릉에서 자동차로 약 20분 거리에 있는 신륵사영릉의 원찰이다. 여주시 동북쪽 봉미산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신륵사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창건했다고 알려지지만 이를 뒷받침할 유물이나 유적이 없다고 지적된다. 현재 남아있는 조형물은 모두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의 것이다.

유명한 나옹화상(13201376)신륵사에서 입적하면서 명성을 얻었고 그의 제자인 무학대사(13271405)신륵사조선왕조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또한 목은 이색(13281396) 등 많은 시인묵객들이 신륵사에 머무르면서 신륵사에 대한 글을 남길 정도로 조선왕조에서 유명세를 보였다. 이색고려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으나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유배되었다 석방된 후 이성계의 부름거절하고 신륵사에서 사망했다.

신륵사가 남다른 것은 다른 사찰들이 산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과는 달리 동서로 길게 누운 남한강의 푸른 물줄기 옆넓은 여주 들판이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처음 4대강 정비가 계획될 때 수장될 것으로 예상되어 이전대상이었으나 다행하게도 수몰 위험에서 벗어나 현장을 지키고 있다.

 

신륵사는 유달리 보물이 많은 사찰로 보물이 7이나 된다.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지공나옹무학영정이 있는 신륵사조사당(보물180), 대리석을 재료로 사용한 비룡문이 새겨진 5미터 높이의 8층석탑(보물225)이 있다. 형식은 방형의 일반형 석탑에 기단부를 2층으로 구성하고 그 위에 여러 층을 거듭해 않은 탑신부를 받고 있다.

여기까지는 신라나 고려 시대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세부로 들어가면 전혀 다른 양식을 보인다. 조선 초기 석조 공예의 성격도 함께 갖고 있다. 특히 상층기단 면석에는 신라나 고려에서는 볼 수 없는 비룡문과 연화문 등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석탑비룡을 조각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예로 학자들은 신륵사 설화 속에 용이 등장하기 때문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반원의 두 줄로 된 문양과 당초문이 양각되어 있는 고려시대의 다층전탑(보물226), 조선시대 일반적인 부도의 전형으로 인식되는 신륵사보제존자(나옹스님)석종(보물228), 목은 이색이 글을 쓴 보제존자석종비(보물229), 이색공민왕돌아가신 부모명복을 빌고자 대장경을 인출하고 대장각을 지어 봉안한 사실을 적은 대장각기비(보물230), 고려말의 대표적인 8각형 신륵사보제존자석종앞석등(보물231) 등이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극락보전시도유형문화제128로 지정되었다. 사찰 아래 나옹화상의 당호를 따라 강월헌이라는 육각의 정자가 강가 바위 위에 있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여주 평야와 남한강은 그야말로 한 폭의 파노라마이므로 방문을 추천한다.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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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수학을 조선에 처음 소개해, 이성규, 사이언스타임스, 2014.05.20.

[이장주의 역사 속 수학 오디세이(5)] 오일러보다 61년 빨리 9차직교마방진 만든 최석정, 이장주, 조선일보, 2015.09.09

[신병주의 왕으로 산다는 것’] (17) 북벌(北伐)만을 꿈꿨던 효종의 갑작스런 사망삼전도 굴욕안긴  復讐雪恥 꿈 무산, 신병주, 매일경제, 2015.10.19.

[신병주의 왕으로 산다는 것’] (18) 북벌 대신 러시아 정벌 나선 효종 | 북벌은 생각만현실은  원군 요청 승낙, 신병주, 매일경제, 2015.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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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여는 과학문화유산답사기1 : 조선왕릉, 이종호, 북카라반,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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