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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 답사 (83) : 제4구역 장릉(2)

Que sais 2021. 6. 29. 10:44

https://youtu.be/y1vdbqHB3sc

<세조에게 끝까지 대항한 금성대군>

단종의 복위사건에서 특이한 것은 세조의 친동생금성대군의 행보다.

그는 세조에게 끝까지 항거했는데 금성대군세종 8(1426) 세종과 소헌왕후의 여섯째 아들세조는 그의 친 형이다. 그런데 세종금성대군을 총애하여 계속 그의 집에 거처하거나 이어하기도 했다. 1444년과 1445년에는 세종이 병이 있어 금성대군의 사저에서 정양하였을 정도다

세종의 금성대군에 대한 총애는 극심하여 1445년에는 세종의 명을 받아 임영대군(臨瀛大君)과 함께 화포(火砲) 제작의 감독을 맡아보았다. 세종 31(1449) 세종이 병석에 눕자 그의 집에 거동하여 2개월간 체류하다가 나중에 영응대군의 사저로 이어했을 정도다.

그는 불교 신자였고 사찰에 후원을 하기도 했다

금성대군 1452년에 단종이 즉위하자, 형인 수양대군과 함께 사정전(思政殿)에서 물품을 하사받으면서 좌우에서 보필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런데 1453 수양대군이 정권 탈취의 야심을 가지고 김종서 장군제거하자, 형의 행위를 반대하고 조카보호하기로 결심하였다.

 

형의 행위를 반대하고 조카를 보호하기로 결심하였다 무사들과 결탁해 당여를 키운다는 죄명을 받고, 삭녕(朔寧)유배되었다가 광주(廣州) 이배되었다. 그 해 수양대군단종을 핍박해 왕위선양받았다.

이후 성삼문·박팽년 등이 중심이 되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실패하였다. 그 결과 여기에 가담한 자들은 대부분 처형되고, 단종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유배되었다. 이때 금성대군삭녕에서 다시 경상도 순흥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당시 순흥부사이보흠이었는데 그 또한 세조의 찬탈비판하고 있었다. 금성대군과 이보흠은 의기투합하여 단종의 복위를 추진했다. 그들은 우선 영월유배되어 있는 단종순흥으로 데려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조령과 죽령을 막고 남쪽 세력을 규합하여 단종을 복위시키자는 것이다.

이 계획을 위해 격문을 작성할 때 순흥의 관노 한 명이 벽 속에 숨어있었다. 놀라운 것은 관노증거확보를 위해 금성대군의 시녀를 설득하여 격문을 훔쳐오게 한 다음 한양에 올라가 고변했다.

세조의 반응은 그야말로 빨랐다. 고변이 들어오자마자 이보흠과 금성대군체포했다. 금성대군안동의 옥에 갇혔다가 탈출했는데 군사들이 그를 수배하자 스스로 자수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그의 말이 다소 놀랍다.

 

너희들의 숫자가 많지만 내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달아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뿐이다. 내가 숨어 지내면 많은 사람들이 다칠 것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보다 나 한 사람 죽는 것이 마음 편해서 돌아온 것이다.’

 

금성 대군이 의관을 정제하고 큰 상에 걸터앉아 죽기를 기다리니 금부도사가 왕이 있는 궁궐을 향해 절을 해야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금성대군은 조카인 단종 영월에 있다며 영월이 있는 북쪽을 향해 통곡하며 네 번 절했다. 당시 그의 나이 32였다. 이 여파로 순흥부해체되는데 이를 정축지변이라 부른다.

금성대군의 묘소를 찾던 순흥부의 주민들은 금성대군이 사약을 받고 사사된 곳에서 그의 혈흔이 묻은 돌을 발견하고 주변에 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다. 이를 금성단이라 한다. 이후 우여곡절을 거쳐 금성대군의 관작 숙종에 들어 복구되고 영조 때 정민(貞愍)의 시호가 내려졌다.

사후에 후손들은 관노로 전락했으나 안평대군의 자손들과는 다르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정조 때에는 그의 자손들이 종친으로써 대접을 받아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전주 이씨 금성대군파로 이어지고 있는데 현재도 금성대군을 기리는 여러 사적지에서 그에게 사사 명령이 내려진 음력 10 21기일로 정해, 봉사손들이 중심이 되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영월에 있는 단종>

단종의 최후가 찾아온 것은 경상도 순흥(順興)에 유배되었던 금성대군 즉 세종의 여섯 째 아들이자 세조의 동생이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가 발각돼 사사(賜死)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단종노산군에서 다시 서인(庶人)으로 강등됐다. 단종이 서인으로 강등되어 사건이 종결되는 듯 했으나 세조의 신하들은 벌떼와 같이 일어나 단종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면 차후에도 사육신, 금성대군과 같은 복위 사건이 계속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사약을 가지고 단종이 위리안치되어 있는 영월 청룡포로 갔다.

청룡포영월읍 중심지에서 서남쪽으로 약 4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데 3면은 깊은 강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 면은 높은 벼랑이 있어 어디로든 빠져나갈 수 없는 천연 감옥과 같은 곳이다.

 

주변에 강이 흐르고 있어서 청령포 유람선을 타고 갈 수 있으며 단종이 머물렀던 어소(御所)와 금표비(禁標碑)가 남아있다. 금표비에는 동서 300, 남북 490이라는 글씨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천하를 호령하던 왕이지만 세조는 단종으로 하여금 이 공간 안에서만 생활하도록 행동범위를 제한한 것이다. 또한 단종이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고 전하는 높이 80미터 되는 낭떠러지 노산대, 망향탑 돌무더기 등 슬픈 역사가 남아 있는 유물들이 있다.

사약을 갖고 온 금부도사 왕방연은 차마 말을 하지 못했는데 공생(貢生) 복득단종의 뒤에서 활시위로 목을 졸라 죽였다. 그러나 실록에 따르면 왕방연이 영월에 도착하자 단종목을 매 자진(自盡)했다고 되어 있다.

사후의 처리도 비참하여 야사에 따르면 시신청령포(淸泠浦) 물 속에 떠있는 것을 평소부터 충성심이 강했던 영월호장 엄홍도(嚴興道)가 몰래 수습해 현재 장릉 자리안장했다고 한다.

엄홍도단종의 어소에 무단으로 출입하면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단종을 생각하며 매일 밤이면 감시중인 군사들의 눈을 피해 청령포 강을 건너서 어소에 있는 단종에게로 찾아와 말동무가 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단종은 유배 초기에 밤이 되면 사람이 없는 외로운 분위기 때문에 슬픔에 잠겼으나 엄흥도가 매일 밤 몰래 어소로 들리면서 그나마 위안을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므로 단종의 시신엄홍도가 장사지내려 할 때 주위 사람들은 후환이 두렵다고 그를 말렸다. 하지만 그는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해도 나는 달게 받겠다라며 단종의 시신을 홀로 밤에 거두어 동을지산장사지냈다고 전해진다.

단종이 사망한지 59이 지난 중종 11(1516) 단종묘를 찾으라는 명령이 내렸으나 엄홍도 일가족이 자리를 감춰 묘를 찾을 수 없었다. 이때 신임군수 박충원 등의 역할로 단종의 묘를 찾아 봉분을 갖추었다.

단종명예를 회복하는 데는 200이 넘게 걸렸다. 선조 13(1580) 강원감사 정철의 장계묘역을 수축하고 상석과 표석장명등망주석을 세웠으며 숙종 7(1681), 숙종은 그를 일단 노산대군으로 추봉(追封)한 뒤 숙종 24(1698) 정식으로 복위시켰고 묘호단종으로 종묘에 부묘했으며 능호장릉이라 했다.

엄홍도의 충절은 높이 인정되어 그의 자손들에게 벼슬자리가 내려진 것은 물론 추후에 공조참판이라는 벼슬도 내려졌다. 이런 예를 근거로 영월 사람들영월 충절의 고장이라는데 대단한 긍지를 갖고 있으며 장릉향토문화재가 거행되는 유일한 왕릉이다.

 

청룡포의 자랑은 우리나라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 가운데 가장 키가 큰 소나무천연기념물 제349 관음송이다. 수령이 600이나 되어 청룡포에서 유일하게 단종의 유배를 지켜 본 존재다. 높이 30m, 가슴높이 둘레 5.19m의 크기로 1.6m되는 높이에서 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 하나는 위로 하나는 서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자라고 있다.

단종은 유배생활을 하면서 둘로 갈라진 이 나무의 줄기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관음송(觀音松)이라는 이름은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해서 볼 관()자를, 단종의 슬픈 말소리를 들었다하여 소리 음()자를 따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무의 껍질검은색으로 변하여 나라의 변고를 알려 주었다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귀하게 여기고 있다.

또한 수령은 관음송에 못 미치지만 단종의 어가 주변에 조성된 크고 오래된 소나무림 270° 돌아 흐르는 서강과 어우러진 청룡포는 자연 경관이 뛰어난 명승지로, 대한민국의 명승 50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