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동궁과 월지>
월성의 도로 건너편에 있는 사적 제18호인 안압지(雁鴨池)가 있는데 임해전(臨海殿)으로도 불렸다. 임해전은 안압지 안에 신라 왕실의 별궁인 동궁 안에 세워진 전궁(殿宮)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곳 발굴 결과 신라시대 때 '월지'라고 불렸다는 것이 확인되어 2011년에 '동궁과 월지(慶州 東宮과 月池)'라는 명칭으로 변경됐다.
신라가 멸망한 후 월지는 관리가 안 된 채 방치되었으므로 조선시대에는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들이 날아들자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러나 1980년, 안압지에서 발굴된 토기 파편 등으로 신라시대에 이 곳이 월지(月池)라고 불렸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는 신라 왕궁인 반월성(半月城)과 바로 인접해 있기 때문인데 임해전의 이름도 원래 월지궁이었다고 알려진다.
월지는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룬 직후인 문무왕 14년(674)에 황룡사 서남쪽 372m 지점에 조성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왕 14년 2월에 대궐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무산십이봉을 본 떴으며 화초를 심고 진기한 짐승들을 길렀다’는 기록이 나온다.
무산십이봉은 중국 사천성의 비산산맥에 있는데 초나라 회왕이 그곳에서 선녀를 만나 놀았다는 전설 때문에 신선이 노니는 정원을 뜻하는 단어가 되었다. 둥근 못을 만든 뒤 돌을 쌓아 섬을 만드는 석가산 방식의 정원은 도교가 활발했던 당나라 무렵 크게 유행하였는데 국내에서는 백제의 궁남지와 신라의 동궁과 월지가 바로 무산십이봉의 영향을 받은 연못이다.
동궁과 월지는 통일과정에서 많은 영토를 넓혀 부를 축적하자 통일신라가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서 축조한 것으로 인식한다. 김봉렬은 동궁과 월지의 형태가 한국 정원의 전형이라고 설명했다. 『삼국사기』에는 국왕이 임해전에서 연회를 베푼 기록이 여러 번나온다. 후백제 견훤에게 살해당한 뒤에 즉위한 경순왕이 고려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왕건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푼 곳도 이곳이다. 그러므로 경순왕이 연회를 베푼 2〜3년 후 나라를 고려 왕건에게 바치는 것도 이곳에서의 연회와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못은 동서 길이 약 190미터, 남북 길이 약 190미터의 장방형 평면이며 세 섬을 포함한 호안 석축의 길이는 1,285미터다. 석축을 보면 불국사의 석축, 불국사의 천장, 남산신성의 석축 등에서 보이는 동틀돌(돌못)이 나타나 동궁과 월지의 비중을 알 수 있다. 못의 깊이는 약 1.8미터 정도이며 바닥에는 강회와 바다 조약돌을 깔았다.
중앙에 우물 모양의 목조물을 만들어 그 속에 심은 연뿌리가 연못 전체로 퍼져나가지 못하게 했다. 못가의 호안은 다듬은 돌로 쌓았는데 동쪽과 북쪽은 굴곡으로 만들고 서쪽과 남쪽은 건물을 배치했다. 서쪽 호안은 몇 번 직각으로 꺾기도 하고 못 속으로 돌출시키기도 했다. 따라서 못가 어느 곳에서 바라보더라도 못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연못이 한없이 길게 이어진 듯 보인다.
못 속에 섬이 세 곳이 있는데 크기가 서로 다르다. 대도는 연못 남쪽, 중도는 대도와 대칭 방향인 연못의 서북쪽, 소도는 못의 한 가운데에서 약간 남쪽으로 치우친 곳에 위치한다. 이들 섬은 모두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다. 학자들에 따라 발해만의 동쪽에 있다는 삼신도(방장산, 봉래도, 영주도)를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다.
발굴 조사결과 건물지 기단 석축은 물에 잠긴 부분과 물 위에 노출된 부분의 축석 기법이 다르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물에 잠긴 부분은 모두 괴석(塊石)으로 면만 골라 쌓았으며, 수면 위에 노출된 부분은 대부분 길고 높은 장대석을 정연하게 맞추어 쌓았다. 또한 연못의 남동 모서리에서는 2단 수조로 된 입수구를 확인하였고 북쪽에서는 배수시설이 발견되었다.
입수구를 통과한 물은 1미터 정도 되는 높이에서 떨어지며 폭포같은 소리를 내도록 설계되었다. 조선시대에 이곳을 방문했던 김시습은 ‘영의 목구멍에서 토해내는 물소리가 급하다’라는 시를 남긴 것을 볼 때 입수구에 용머리가 있었으리라 추정하지만 현재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발굴 조사로 3만 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가장 많이 출토된 것은 24,000점에 달하는 기와와 전(塼)류다. 용도별로 보면 수막새, 암막새, 수키와, 암키와, 특수기와, 장식기와, 바닥에 깔거나 벽이나 불단 등에 장식되었던 전(塼) 등이다. 전 가운데 옆면에 당의 연호를 사용한 보상화 무늬가 있는 것과 벽사의 의미로 사용된 귀면와들이 돋보인다.
와전류는 거의 대부분 삼국통일 직후부터 신라 멸망시까지 사용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통일신라 와전의 집합체라 할 수 있다. 신라에서 언제부터 기와가 제작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4〜5세기경부터 궁성에 암키와⋅숫키와가 사용되었으리라 짐작한다. 불교가 공인되고 흥륜사⋅황룡사 등 큰 사찰이 건설되는 6세기 중엽 경에는 연꽃무늬 수막새도 만들어지면서 본격적으로 기와를 사용했다고 추정한다. 또한 ‘월지’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어 안압지의 원래 이름을 ‘월지(月池)’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월지라면 ‘달빛이 곱게 비치는 연못’이라는 뜻으로 안압지를 보면 적절한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궁과 월지의 동쪽 언덕에서 10점의 불상이 발견되었는데 통일신라 조각의 최절정기인 8세기 경 불상의 가장 큰 특징은 신체의 볼륨을 강조하는 옷주름에 선각이 없고 모두 입체적으로 이루어져 마치 파도가 밀려오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이들 입체적인 옷주름은 8세기 후반부터 서서히 양감을 잃고 단순화되거나 가느다란 선각으로 변하는데 이러한 변화의 첫 단계를 보여주는 예가 동궁과 월지에서 나온 금동여래입상이다.
금동판삼존불과 금동판보살좌상도 특징적이다. 금동판삼존불은 탄력감 넘치는 육체미를 통해 생명력을 표현하고자 했던 통일신라 조각의 새로운 조형 사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불상이다. 결가부좌한 본존불은 민머리에 풍만한 얼굴을 하고 있으며, 눈·코·입을 아주 세밀하게 조각하였다. 손갖춤은 엄지와 검지, 엄지와 중지를 각각 맞대어 마치 얽힌 실타래를 푸는 듯한 모습의 설법인(說法印)을 맺었는데, 인도 간다라 불상의 초전법륜인(初轉法輪印)의 모습과 흡사하다. 얇은 가사는 양쪽 어깨를 덮은 통견식이지만, 몸에 밀착되어 풍만한 신체가 그대로 드러난다.
금동판보살좌상은 보살상이 합장인(合掌印)을 하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앞에서 설명한 금동판삼존불좌상과 양식 및 제작 기법 등이 동일하다. 대좌 아래에 긴 촉이 두 개 달려 있는데, 아마도 불감(佛龕)과 같은 곳에 독립적으로 고정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모두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유물 중에서 큰 주목을 받은 것은 초심지를 자르는 데 사용했던 길이 25.5센티미터 크기의 금동초심지가위다. 잘린 심지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날 바깥에 반원형의 테두리를 세웠으며 손잡이 쪽에 어자문(魚字文)과 당초무늬를 화려하게 장식하여 당시의 금속제조 수준을 알려준다.
흥미로운 것은 토기류 중 건물에 단청할 때 물감을 담아 쓰던 단청용 그릇이다. 그릇 안팎에 붉은 석간주가 묻어 있는 것이 많고 주황색을 내는 데 쓰는 물감인 장단(長丹) 칠이 묻어 있는 손잡이 달린 항아리도 있다.
당시 바닥의 뻘 속에서 신라시대의 통나무 배가 발견되었다. 배의 크기는 길이 5.9m, 너비 1.2m, 높이 60cm 가량이며 더불어 2척분의 파편도 발견되었다. 완형은 세 개의 나무를 통으로 파서 배 모양을 만든 후 비녀장 모양의 막대기를 안쪽 바닥에 앞뒤 하나씩 가로 질러 조립한 것으로 우리나라 배의 실물로는 가장 오래된 배이다. 통나무 배가 발견될 수 있었던 것은 뻘 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썩지 않고 보존되었기 때문이다.
글자가 쓰인 다수의 목간도 발견되었다. 목간은 나무편을 얇게 깎아 문서, 편지, 기타 글을 기록한 것을 뜻하는데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출토된 것이다. 먹으로 예서나 행서체로 쓰거나 새긴 것인데 대부분 8세기 중엽 경덕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신라 귀족들의 생활을 알 수 있는 유물들도 발견되었다. 가장 크게 주목받은 것은 목제 주사위다. 높이 4.8cm에 14면으로 된 이 주사위에 써 있는 글대로 따라하게 되어 있는데 ‘술 다 마시고 크게 웃기’, ‘술 석 잔 한꺼번에 마시기’, ‘다른 사람이 귀찮게 해도 가만히 있기’ 등이 새겨져 있어 신라인들의 해학을 알 수 있다.
나무를 사용하여 실물에 가깝게 만든 남근도 있었다. 남근의 발견은 세인의 주목을 끌었는데 고대사회에서는 남자의 성기를 신성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남녀가 결합하여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경이롭게 생각했기 때문인데 일부 학자들은 어떻게 갖고 놀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놀이용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일본의 평성궁에서도 비슷한 것이 발견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7세기 신라시대 왕궁의 수세식 화장실 터가 발견된 것이다. 사람이 쪼그려 앉을 수 있고, 물을 흘려 오물을 내보낼 수 있는 시설이 있었다.
1976년까지의 발굴을 토대로 동궁과 월지의 복원을 추진하여 3개의 전각을 복원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이 복원을 잘못했다고 지적했다. 전각의 구조는 상당 부분 원형을 최대 반영했다고 하지만 동궁과월지에서 출토된 화려한 금속 장식물들을 전혀 활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라시대의 궁궐 건축물은 서까래나 난간 끝에 일일이 금동으로 된 장식 마개 등을 달았으므로 햇빛이 비치는 날은 건물이 금빛으로 번쩍거렸다고 한다. 신라를 아랍에서 황금의 나라라고 부른 이유가 빈말이 아닌 것이다.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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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동궁과 월지」,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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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60514&cid=40942&categoryId=33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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