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경주역사지구 답사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54) 석굴암(4)

Que sais 2021. 12. 9. 14:10

https://youtu.be/NTmgJK3JzX4

<전각이 방해>

성낙주 박사는 이 문제에 관한 한 단호하다. 석굴암 전면에 지붕이 있는 전각이 있었으므로 아침 햇살이 직접 본존불을 비추는 광경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그의 주장은 이런 내용이 일제 강점기 때 태어났다며 이런 이야기가 태어나게 된 전말을 제시했다.

한국의 문화유산에 큰 영향을 미친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유종열총독부의 보수공사 1915에 끝난 후 1년이 지나 1916년 석굴암을 방문하면서 감명받은 후 1919 석불사 조각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1916 9 1일 오전 6시 반, 화창한 태양빛이 바다를 건너 굴원(窟院)의 불타 얼굴에 닿았을 때 나는 그의 곁에 섰다. 그것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행복한 순간의 추억이다. 불타와 그를 둘러싼 여러 불상이 놀라운 새벽 햇살로 선명한 그림자와 흐르는 듯한 선을 보인 것도 그 순간이었다.’

 

본존불(사진제공-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태양의 빛석굴암의 본존불 얼굴에 비친다는 그의 설명은 일본인들로 하여금 환상적인 생각으로 몰아갔고 1920 오쿠다테이(奧田悌)는 보다 나아가 아침 햇살본존불의 백호에 집중된다는 말로 이야기했다. 그는 신라구도경주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석존의 백호는 지금은 탈락되어 없으나 오래도록 매몰되어 땅속에 있었던 것을 최근 수선 때에 토사(土砂)에서 발견되었다고 하지만 통독부의 박물관에 있다고도 하고 혹은 전혀 행방불명이라고도 이르는데 원래는 동해의 떠오르는 햇살새벽의 운무를 떨치고 만경창파에서 떠올라 훤하고 또렷하게 광명이 훨훨 타오르면 곧바로 굴 내에 들어와서 석존의 이마백호에 반영되어 참으로 있기 어려운 대금광명을 발사하며 수정의 이면에는 황금을 붙여놓았다고 이르는데 애써 수선하면서 예전과 같이 되지 못함이 애석하다.’

 

성낙주 박사는 이와 같은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은 일본석굴암의 일출 광경에서 해돋는 나라를 떠올린다는 제국의 영광에 사로잡혔다는 것이다. 사실 이 당시는 일제강점기이므로 석굴암에서 바라보이는 바다는 동해가 아니라 일본해였다.

석굴암 전면전실이 있느냐 없느냐를 차치하고 어떤 특별한 예배 공간에 햇빛이 비추게 하는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니다. ‘건축의 대왕으로 불리는 유명한 람세스 2(Ramesses II, 기원전1303?1213?)가 누비아에 건설한 아부심멜 신전의 깊숙한 신상에 새벽 빛이 비추게 설계되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해인사의 장경판전 출입구보안당(普眼堂)도 원형으로 뚫려있는데 춘분과 추분동트는 빛이 이곳을 통과하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석굴암에 전실이 있든 없든 설계에 따라 일년 중 해가 가장 짧은 동지햇빛본존불의 백호에 비춘 다음 그 빛이 양 옆 감실의 백호에 비쳐 후면의 십일면관음보살에 비출 수 있다는 개연성은 충분하다는 설명인데 놀랍게도 각도의 오차는 1000분의 1 미만이다.

일본인들이 반출감실 속의 두 보살상과 본존불 이마의 백호가 다시 원위치에 선다면 이런 효과를 재현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참고적으로 현재 사라진 감실보살상으로 되었다는 설명도 있다.

본존불의 백호에서 반사된 태양빛옥보살상에 비치면 옥보살이 그 광선을 받아서 붉은 광채를 돔 안으로 뿜어 내 돔 내부가 온통 붉은 색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이 실제로 가능한 것인지 아닌지 현재의 천문기술로는 석굴암이 세워질 당시의 태양의 위치를 정확하게 찾아 낼 수 있으므로 투과체의 각도를 정밀하게 계산한다면 이를 확인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다. 현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이를 위한 기초연구를 계획 중이다.

참고적으로 주실반지름 12당척인 원형이며 참배자의 위치 12당척두 배되는 지점에 위치한다. 이 거리는 참배자본존불을 보는 이상적인 거리. 그리고 통로(비도)와 전실은 주실의 입구에 내접하는 12당척의 삼각형을 세 배 확장한 정삼각형에 내접하는 곳에 위치한다. 또한 감실은 12당척의 정사각형이 만들어낸 황금비에 위치한다.

정확한 비율도 눈에 띈다. 본존불상의 얼굴 너비 2.2, 가슴 폭 4.4, 어깨폭 6.6, 양 무릎의 너비 8.8 1:2:3:4의 비율을 갖는다.

석굴암과학뿐 아니라 불교의 교리에 따라 조성됐다. 석굴암 구조기본단위 12당척은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의 수 4 8이 결합된 단위다. 고대 인도 8진법을 썼고 불교가 이를 수용해 8진법의 8과 그 반인 4진리의 수가 된 것. 불교의 기본사상사성제와 팔정도도 모두 진리의 수에서 나온 것이다. 동국대 문명대교수 석굴암은 첨단과학과 불교 교리가 조화를 이뤄 탄생한 최고의 걸작품이라고 말했다.

 십일면관음보살(十一面觀音菩薩)

본존불 바로 뒤에 있어 전면에서 보면 잘 보이지 않지만 십일면관음보살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11개의 얼굴 모습을 갖추고 있는 관세음보살이다. 본존불 바로 뒤에 관세음보살, 본존불 앞으로 좌우에 문수·보현의 두 보살이 조화롭게 배열된 석굴암 원실의 배치는 영원한 힘의 원천과 양상과 기능의 질서를 표시하고 있다. 석굴암의 십일면관음일제강점기 때에 9이라고 알려져 왔는데 실제로는 일본인 2을 떼어가 9이 되었던 것이며, 원래는 11이었다.

십일면관음보살

십일면관음신주심경에 설명된 십일면관음의 형상석굴암 관세음보살상과 거의 완전한 일치를 보인다. 십일면이라고 한 것은 관음보살의 정면인 본얼굴을 제외하고 두부에 부가된 면이 11이라는 말이다. 경에는 두부 전면에 3이 있고, 그 좌우에 각각 3, 그리고 후면에 1, 정상에 1, 모두 11을 가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석굴암의 관음은 전면에 화불 1이 있고, 좌우에 각 3, 위쪽에 3, 정상에 1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이 11의 배치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은 석굴암의 관음상이 부조이기 때문에 부득이 생긴 변화 때문이다.  11다방면의 기능과 양상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앞의 3자상(慈相)인데 선한 중생을 보고 자심(慈心)을 일으켜 이를 찬양함을 나타낸 것이다. 왼쪽의 3진상(瞋相) 화난 얼굴인데, 악한 중생을 보고 비심(悲心)을 일으켜 그를 고통에서 구하려 함을 나타낸 것이며 오른쪽의 3백아상출상(白牙上出相)으로 이를 드러내어 미소짓는 모습이다. 이는 올바른 수행정업(淨業)을 행하고 있는 자를 보고는 더욱 불도에 정진하도록 권장함을 나타낸 것이다.

뒤의 1폭대소상(暴大笑相)으로서 착한 자, 악한 자 모든 부류의 중생들이 함께 뒤섞여 있는 모습을 보고 이들을 모두 포섭하는 대도량을 보이는 것이며 정상의 불면(佛面)대승근기(大乘根機, 남을 위해 보살행을 닦는 사람)를 가진 자들에 대하여 불도의 구경(究竟, 가장 지극한 진리)을 설함을 나타낸 것이다.

석굴암 십일면관음보살에는 중생의 근기(根機)에 따라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부드럽고, 그러나 늘 자비로운 웃음을 잃지 않고, 그러한 모든 것들을 포용하는 크나큰 미소 속에 중생안주(安住)시키려는 대자대비의 의미가 응결되어 있다.

팔등신에 가까운 다른 천부상이나 보살상들과는 달리 6.5등신에 정면을 바라보고 또 돌출이 두드러져 현실감이 느껴진다. 긴 몸에 섬세하게 표현된 천의와 온몸을 덮고 흐르고 있는 구슬목걸이는 화려함을 더해 준다. 오른손을 내려서 목걸이를 잡았고 왼손은 병을 잡아 가슴 앞에 들었는데 그 병에는 활짝 핀 한 송이의 연꽃이 꽃혀 있다.

몸의 아래로는 몇 겹으로 겹쳐진 연화좌가 두 발을 받치고 있으며 구슬목걸이와 천자락연화좌에까지 걸쳐져 있다. 혹자는 미스 신라라고도 부를 만큼 뛰어난 아름다움을 지닌 관음보살상으로 높이는 2.2미터.

오른손영락 자락을 살짝 쥐었으며 왼손연화가 꽂힌 정병을 들고 있다. 온몸을 천의와 함께 복잡한 영락 장식으로 화려하게 장엄하고 있는데, 다른 어떤 상들보다 정성들여 조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머리 맨 꼭대기의 광배가 있는 조각상의 얼굴까지 합하면 부처의 얼굴은  11이나 된다. 그러나 이 광배가 있는 조각상은 일본인이 근거 없이 만들어 올려놓은 것이다. 원래는 앞면에 10, 뒷면에 1을 조각하여 11면 관음보살상을 만드나, 부조에서는 뒷면을 표현할 수 없어 10면만조각한다.

관음보살자비의 화신으로 모든 보살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다뤄진다. 흔히 아미타불의 협시로 자주 등장하지만, 십일면관음이라는 변화관음(變化觀音)으로 성립되면서 독립적인 예배 대상이 된다. 십일면관음은 일반적으로 밀교(密敎)의 도상으로 알려져 있지만, 석굴암의 십일면관음상성관음(聖觀音)의 성격을 극대화한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십일면관음은 현재 남아 있는 것이 3에 불과하나, 더 많은 십일면관음상들이 만들어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