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경주역사지구 답사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53) 석굴암(3)

Que sais 2021. 12. 4. 12:28

https://youtu.be/NTmgJK3JzX4

 팔부신중(八部神衆)

전실에 들어서서 좌우 양벽에 각각 4구의 상이 있는데, 그것을 팔부신중 혹은 천룡팔부(天龍八部)라고 부른다. 이들은 가상 동물로 원래는 인도의 힘 있는 신들이었지만 석가의 교화를 받아 불교수호하는 신들이 되었다.

현재의 조상에 나타난 각 상이 천룡팔부의 어느 상을 나타내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현재 석굴암에 배열된 팔부신중의 순서가 일반적으로 각 경전에서 열거되는 것과 같은 순서는 아니라는데 동조한다. 학자들은 대체로 부처를 향해 우측으로 첫 번째부터 가루라(迦樓羅), 건달바(乾闥婆), (), 마후라가(摩喉羅伽)이며, 본존불을 향하여 좌측으로 입구에서부터 아수라(阿修羅긴나라(緊那羅야차(夜叉()의 순으로 인식한다.

가루라는 두터운 옷을 입고 신을 신었는데, 왼손에는 삼지창을 쥐고 있고, 두 귓가에는 새의 날개 모양의 것이 조각되어 있다. 다른 상에 비해서 훨씬 선명하게 양각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건달바는 오른손에을 쥐고 왼손에는 군지, 깨끗한 물을 담은 그릇을 들고 있는데 이것은 건달바가 천상에서 지키는 소마의 영약(靈藥)을 담은 그릇으로 보기 때문이다.

석굴암 배치도

은 머리 위에 화염을 표시하고 사방을 환하게 비추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마후라가는 오른손에 을 쥐고 왼손은 가볍게 구부러진 손바닥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손의 모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복행(服行), 배를 땅에 대고 기어다니는 생태를 표현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수라의 조각은 머리와 발 부분이 없어진 형태로 있으나, 여섯 개의 팔을 갖고 있는 삼면육비(三面六臂)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는데 아수라의 특징 그대로 가볍게 부분적으로 천을 감고 있을 뿐이다. 에는 악귀의 얼굴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것은 악귀를 정복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긴나라상은 머리를 기르고 단정하게 서 있으며, 왼손에 삼차극(三叉戟)을 쥐고 있다.

야차상은 머리 위에 사자를 이고 있고 가슴 밑에 밧줄을 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불교에서 매우 중요시된 신중의 하나이자 호국의 선신으로도 간주되는 은 머리 위에 을 이고 있고 왼손에는 구슬을 쥐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석굴암 창건 당시의 조각은 아니라고 본다. 첫째 팔부중상 신앙 8세기 중반 이후에 나타나므로 석굴암조성된 연대와는 차이가 있고 둘째 본존불이 있는 석굴암 후실의 조각에 비해 전체적으로 솜씨가 떨어진다는 점이다.

 

 금강역사(金剛力士)

본존불이 있는 굴의 입구 좌우 양쪽에는 용맹한 모습의 매우 역동적인 두 개의 조상이 있다. 이들을 금강역사 또는 인왕역사(仁王力士)라고 부르며, 언제나 탑 또는 사찰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守門神將)의 역할을 맡는다. 그들의 머리 뒤에는 커다란 원형의 두광이 있는데 단순히 힘센 자가 아니라, 신성한 지혜를 고루 갖춘 존재임을 표시하는 것이다.

본존불을 향하여 좌측의 역사을 크게 열어 하고 소리를 내는  금강역사의 모습이고, 우측의 역사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빈틈 없는 방어의 자세를 갖춘  금강역사의 모습이다. ‘산스크리트문자의 첫째 글자이고, ‘은 그 마지막 글자시작과 끝을 표시한다.

금강역사(사진제공-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둘 다 밖에서 안으로 한 팔을 올리고 한 팔은 내린 채, 아무런 무기도 가짐이 없이 안정된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그것은 신라 무인의 면목을 보여주는 것으로 중국이나 일본의 금강역사상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입을 벌리고 있는 인왕높이 2.11미터, 입을 굳게 다문 인왕높이 2.16미터.

금강역사(사진제공-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일제 강점기1차 수리 때에 굴 내에 쌓인 흙 속에서 금강역사상의 두부 하나와 왼팔 하나, 왼손 하나소보탑과 더불어 발견되었다. 머리의 크기는 56, 왼팔의 길이는 47.5, 왼손은 19.6라고 보고되었다.

이는 현존 금강역사상이 여러 차례의 조각을 통해서 비로소 완성되었거나 이 조상보다도 앞서 있었던 조각상이 파손된 뒤에 새로 조성한 것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사천왕(四天王)

석굴암에는 본존불을 맞이하는 문턱에 좌우 각각 2상씩 병렬된 사천왕의 조각이 있다. 사천왕수미산 중턱의 동서남북의 네 지역을 관장한다는 천왕으로 동방에는 지국천(持國天), 서방 광목천(廣目天), 남방 증장천(增長天), 북방 다문천(多聞天)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본존을 향해서 우측에 있는 두 천왕상 중 처음에 있는 상이 동방지국천이고, 그 옆의 좌측에 있는 상이 북방다문천이다.

사천왕상(사진제공-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지국천왕은 갑옷을 걸치고 아주 용맹스러운 무사와 같은 형태로 두 손으로 칼을 들고 입을 굳게 다물었으며, 악귀를 밟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일본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이 조각상에 채색이 되어 있었으며 높이는 2미터.

높이 1.92미터의 다문천상은 얼굴을 북쪽으로 돌리고 왼쪽에는 옷자락을 쥐고 있으며, 오른손은 위로 들어 올려 보탑(寶塔)을 손 위에 올려 놓고 있다. 보탑일제강점기 때 수리하면서 떨어져 나갔는데 1962대수리공사 때 땅 속에서 보탑의 파편이 발견되어 현재와 같이 복원되었다. 이 두 천왕은 복장도 거의 비슷하고 그들이 밟고 있는 악귀의 모습도 상당히 유사한데 악귀의 모습이 이처럼 실감나게 표현된 것은 많지 않다.

본존불을 향해서 좌측 벽에 있는 두 천왕상 중 처음이 높이 2.03미터의 남방증장천이고 그 우측의 것이 높이 2.04미터서방광목천이다. 증장천다문천과 대각선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고, 광목천은 역시 대각선으로 지국천과 대칭을 이루고 있다.

사천왕상(사진제공-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증장천의 모습지국천의 모습과 상당히 비슷하나, 증장천이 밟고 있는 악귀의 모습이나 광목천이 밟고 있는 악귀의 모습들은 그 이웃 벽에 있는 악귀의 모습이 서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둘 다 엎드려 있고, 하나는 동남쪽을 향하고 또 하나는 서북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광목천상은 오른손을 가슴 위에 올려서 둘째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은 굽히고 나머지 다른 세 손가락은 폈으며, 오른손에는 칼을 쥐고 발 밑에는 악귀를 밟고 서 있는 모습이다. 상의는 갑옷이고 하의는 평범한 옷으로, 얼굴 부분다른 돌로 새겨진 것을 볼 때 나중에 삽입된 것으로 추정하지만 언제의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항마촉지인 본존불

석굴암의 본존불은 조각상 가운데 가장 중심적 존재로서 석굴 자체가 그를 봉안하기 위해 조영된 것으로 예배의 주 대상이다. 광배를 갖추고 연화문이 새겨진 대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있다. 손모양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왼손은 선정인을 하고 오른손은 무릎에 걸친 채 검지손가락으로 땅을 가르키고 있다.

중앙의 본존불은 높이 3.4미터에 이르며 대좌까지 합치면 5미터나 되는 큰 불상으로 신체의 비례가 알맞고 각 부분이 부드럽고 세련된 솜씨로 조각되어 있다. 본존불의 크기는 29.7센티미터당척(唐尺)으로 높이 115, 양 무릎 폭 88, 양 어깨 폭 66이다.

본존불(사진제공-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한 장의 둥근 연화판석(蓮花瓣石)으로 되어 있는 광배는 따로 만들어져 후벽 가운데에 있는 십일면관음보살입상 바로 위 천장 밑에 설치했는데 전실의 중앙에서 바라볼 때, 가장 이상적인 위치에서 광배의 역할을 하도록 한 계산에 따라 설치되었다. 한편 석굴 천장 중앙의 연화문 원판본존불상의 천개(天蓋)로서의 역할을 한다.

본존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우선 불국사 8세기 중엽에 유행한 화엄종의 사찰이므로 보리수나무 밑에서 깨달은 석가모니부처의 형상으로 여러 대중과 보살들에게 깨달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견해다.

본존의 소외경전으로는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 본존의 원조 석불로는 인도 부다가야 대각사(大覺寺)의 본존을 제시한다. 방광대장엄경석가의 탄생에서 깨달음의 순간까지를 담고 있는 경전으로 석굴암의 본존은 바로 이 정각(正覺)의 순간을 구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가장 유력한 설은 본존불아미타여래라는 설이다. 아미타불은 경전에 의하면 무한한 목숨을 의미하는 아미타바(Amitabba), 무량수(無量壽)무한한 빛을 의미하는 아미타유스(Amitayus) 무량광(無量光)이란 두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는 중생을 구하는데 시간적 공간적으로 무한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국에서는 주로 무량수라는 의미를 사용한다.

이는 다음의 세 가지 사실로 뒷받침된다고 설명되고 있다.

첫째 1891년 석굴을 중수한 사실을 담은 현판에서 미타굴(彌陀窟)이라 불렸던 기록이 있고(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또 오늘날까지 무량수불무량광불(無量壽佛無量光佛)을 뜻하는 수광전(壽光殿)이라는 편액(扁額)이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수광끝없는 빛이란 뜻으로 아미타불의 다른 이름이다.

둘째는 일본인들이 본존불의 명호를 추정하는 주요 근거로 삼았던 오른손의 항마촉지인과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만 감싸는 옷차림 양식인 우견편단(右肩編袒)의 양식신라아미타불상에 가장 많이 적용된다는 점이다.

셋째 부석사 무량수전 본존불 역시 항마촉지인을 했는데도 석가불이 아닌 아미타불이다. 또한 석굴암 김대성을 비롯한 신라 왕실의 정토 왕생을 바라는 의미에서 조성되었으므로 아미타불이라는 설이 틀림없다는 설명이다.

정토고통이 없는 맑은 땅을 의미한다. 번뇌와 더러움의 가득한 고해(苦海)의 세계예토(穢土)의 반대 개념으로 번뇌가 소멸된 청정한 세계. 즉 부처님이 상주하는 깨달음의 세계를 말한다. 극락정토신앙은 고통스러운 현세를 벗어나 죽어서 극락에 태어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과 죽음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해결해주는 신앙이다.

물론 아직도 이에 반론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가장 먼저 지적되는 것은 '항마촉지인'은 본래 석가불만 취하는 수인(手印)이라는 설명이다. 그래서 일본인들도 오랫동안 석굴암 본존불상 석가여래로 판단했다고 설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 본존불석가여래라고 주장하는 것은 본존불 주변에 있는 10대 제자상 때문이다. 10대 제자석가불에만 따라붙는 상이며 아미타불제자상이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본존불석실 통로에 새겨진 11면 관음이 있는데 관음보살석가불을 호위하는 보살이다.

그러나 석굴암의 본존불에 관한 한 아미타여래라는 주장은 매우 견고하다.

불교에서는 수승한 공덕을 닦은 인간이 죽은 다음에 태어날 세계로 안양(安養), 안락(安樂), 묘락(妙樂)이라고 한다. 불국사 극락전으로 통하는 문이 안양문이고, 부석사 무량수전으로 통하는 문이 안양루. 불교에서 정토는 수없이 많지만 그 중 가장 한국인에게 친근한 정토아미타불이 있는 서방 극락정토. 석굴암의 본존불아미타여래여야 한다는 설명인데 이 문제는 아직도 논란이 있다는 선에서 마무리한다.

학자들은 석굴암 본존불이 남다른 균제의 미를 갖고 있으므로 본존불의 모델이 어딘가 존재할 것으로 추정했다. 강우방은 똑같은 치수의 크기뿐만 아니라 수인(手印)향방(向方)이 똑같은 불상의 존재를 현장 대당서역기에서 찾았다고 발표했다. 현장인도에서 성지순례하는 가운데 석가모니가 정각을 이룬 보드가야의 대각사에 안치된 불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정사 안에 불상이 훌륭한 모습으로 왼발을 괴어 오른발 위에 얹고 왼손을 샅 위에 두었으며 오른손은 늘어뜨려 항마인(降魔印)의 상을 지은 가운데 동쪽을 향해 앉아 있었다. 근엄한 모습은 참으로 그곳에 부처님이 계신 것 같았다. 대좌의 높이 42이고 넓이 125이며 불상의 높이 115에 양 무릎의 폭이 88이며 양 어깨의 폭은 62이다.’

 

불상은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앉은 높이와 양 무릎 폭은 물론 수인과 향방이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반면에 어깨의 폭은 다소 다른데 강우방어깨의 폭은 기준점을 잡기 어려워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적었다. 적어도 석굴암 본존불의 모델인도 대각사 본존불과 유사하다는 것은 바로 신라의 토함산에서 석가모니가 정각을 이루었다는 것으로 신라의 불국토 사상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는 설명이다.

본존불의 두광(頭光)은 주실 뒤쪽 벽면에 연화문을 조각한 운형을 감입하여 조성했다. 이처럼 두광을 벽면에 둔 것은 주실과 본존 사이의 공간을 최대로 살리며 입체감을 주어 신비감을 살리기 위해서다. 높이 133.8센티미터의 커다란 연화대좌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으로 나뉜다. 하대석은 하나의 돌에 24개의 연판을 둘러 조각한 둥근 원형이며 중대석은 여섯 개의 기둥을 둔 6각형의 특이한 구조로 만들어졌고 상대석은 하대석처럼 하나의 돌에 연판을 조각한 원형이다.

신라인들이 이처럼 석가모니불의 정각상을 완벽하게 조각한 것은 불교가 지향하는 정각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정각불교가 지향하는 최고최선의 인간의 궁극적 존재 양식이다. 정각의 순간 중생은 여래가 되고 속세는 정토가 된다. 항마촉지인상석굴암을 기점으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예불의 주대상이 되었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유독 한국에서 크게 유행했으므로 우리나라 조각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본존불

석굴암에서 학자들의 주목을 끄는 것은 본존불 이마 한 가운데 있는 백호(白虎) 성인의 32가지 상호 중 하나를 박았는데 이것을 다면체로 깎아 햇빛을 반사하여 후면에 있는 11면관세음상의 이마에 비추게 했다는 설이다.

한국과 일본의 문화에 저명한 카터 코벨 박사는 매우 주목할 만한 내용을 설명했다.

이를 위해 제일 앞에 있는 좌우 첫 번째 감실 두 곳에 놓인 불상일본인반출한 것도 본존불처럼 이마백호 구슬을 지니고 있어 동트는 새벽첫 번째 빛석굴암 입구와 그 위에 달린 광창을 통해 본존불 이마의 백호에 와 닿고 반사된 빛이 두 보살상의 백호를 통해 다시 한 번 굴절되어 나온 후 11면관세음상의 이마에 비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새벽의 짧은 한 순간석굴암 내부의 조명 효과를 극적으로 보여준다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