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경주역사지구 답사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 (52) 석굴암(2)

Que sais 2021. 12. 3. 14:42

https://youtu.be/NTmgJK3JzX4

<종합건축물 석굴암>

엉뚱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던 석굴암 1996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국보 제24로 우리 문화유산이다.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산자락 해발 565미터에 자리 잡고 있는데 신라의 김대성전생의 부모를 위해 735에 세웠다고 한다.

한편 최완수 박사원성왕성덕왕과 경덕왕으로 이어지는 전왕조, 진흥왕의 혈통을 이은 순수 진골혜공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음을 주목했다. 그는 원성왕이 과거 왕들과의 단절을 표방하기 위해 경덕왕성덕왕의 추복사찰로 국력을 기울여 건립해온 불국사의 건립 시말을 자세히 밝히는 것을 피하고 불국사 건립을 마무리 지은 원성왕은 이를 공사 감독관으로 건립의 총책임을 맡았던 김대성 개인의 원찰로 둔갑시켰다고 주장했다.

석굴암은 원래 석불사(石佛寺)라는 이름의 독립된 절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불국사에 예속되었고, 1910경부터 일본인들이 석불암 대신 석굴암(石窟庵)으로 불렀다.

석굴암이 세계적으로 그 우수함을 인정받는 것은 신라 사람들의 지혜와 재능이 잘 녹아 있는 종합적인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석굴암의 구조는 다른 나라의 어느 석굴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징을 갖고 있다. 우선 석굴암화강석을 다듬어 석굴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은 인공 석굴로서 자연석을 뚫고 굴을 만든 고대 인도나 중국의 석굴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중국과 인도의 것은 굴 속에 조각품을 설처한 것으로 불 수 있지만 신라의 석굴암은 명백히 건축물이다.

열대지방인 인도에서는 기원전 100경부터 예배와 수련을 행할 수 있는 공간적 장치암벽을 파고 들어가 그 속에 사람이 기거할 수 있는 내부 공간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은 서늘한 곳에 부처님을 모시는 뜻으로도 이해되었는데 이 풍습이 간다라미술과 융합되어 고유의 석굴미술을 구비한 채 2001년 탈레반에 의해 폭파된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안 석불, 우즈베키스탄의 테르메스(Termes) 석굴, 중국 신장의 키질과 쿰투라 석굴, 투르판의 베제클릭 석굴, 돈황과 운강 석굴사원 등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인도와 중국에는 조직이 무른 퇴적암의 사암이나 석회암의 거대한 암벽 지형이 많다. 따라서 암벽을 뚫어 규모가 큰 석굴을 만드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또한 기후도 일 년 내내 매우 건조하고 기온이 높기 때문에 암벽을 뚫어 만든 석굴은 매우 시원하므로 안락한 사원의 공간을 조성하는데 적당하다.

군위 삼존석굴(국보제109호)

여하튼 이러한 석굴 신앙 78세기 초 우리나라에 전해지면서 단석산 신선사 마애석불, 군위 삼존석굴과 같은 석굴사원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자연 여건은 중국이나 인도와는 다르다. 추운 겨울과 고온 다습한 여름을 갖고 있는데다가 전 지역이 매우 단단한 화강암 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더구나 경주지역에는 인도나 중국과 같은 석굴이 없으므로 신라의 예술가들은 새로운 방법을 창안할 수밖에 없었다.

, 산을 파 굴을 만들고 조각된 돌들을 조립한 후 흙을 덮어 석굴사원처럼 보이도록 한 것이다. 인공으로 구축된 석암(石岩)에 예술적으로 조각된 불상들이 배치되어 있는 곳은 전 세계적으로 오직 석굴암뿐이다. 거대한 암벽을 뚫어 석굴을 만들지 않았다하여 석굴암을 조성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오히려 인공 석굴고도의 축조 기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석굴암의 건축구조>

학자들은 불교현대 과학의 원리와 닿아 있다고도 설명한다. 불교가 교리에만 국한돼 있지 않다는 뜻인데 처음 들으면 다소 의아하게 느낄 것이다. 그런데 이를 다소 구체적으로 사찰, 불상,  등 조형물 속에 과학이 녹아 있다고 설명하면 곧바로 이해할 것이다.

또한 불교의 융성과학의 진보로 이어지기도 했다고 설명한다. 가장 단적인 예로 부처의 말씀을 듣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항상 보고 읽고 싶은 생각이 인쇄술의 발전을 가져와 세계 최초의 인쇄물로 인정받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만들게 했다. 우리나라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불조직지심체요절 일명 직지심경 불교로 인해 이뤄진 과학기술의 발전을 상징한다는 설명이다.

과학 기술로 무장한 상당수 불교 유산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것은 종교적, 예술적인 가치뿐 아니라 과학적, 기술적인 가치도 인정하여 지정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의 기준항목 6가지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중 네 번째 가장 특징적인 사례의 건축양식으로서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예술적, 과학적, 기술적 혹은 산업의 발전을 대표하는 양식을 곱고 있다.

한국의 경우 석굴암과 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인도아잔타 석굴, 산치의 불교기념물군, 보드가야의 마하보디사원 단지도 이에 해당하며 중국돈황의 막고굴, 라사의 포탈라궁, 아미산과 낙산대불, 운강굴이 있다. 일본호류사의 불교기념물군, 나라 역사기념물이 있다. 스리랑카아누라드하푸라 신성도시, 칸디 신성도시가 해당된다. 네팔카트만두 계곡네 번째 항목으로 문화유산에 등재됐는데 바로 석굴암도 그런 예이다.

석굴암윤회의 12단계 12지연기(12支緣起)를 나타내는 법당으로 꾸며져 있다. 연기(緣起), 우주 만물은 어떤 독자적인 힘만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과 연()의 결합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로 석가부다가야의 마하보디 사원에서 정각한 진리의 내용이다. 연기설불교의 기본 사상으로 무명(無明), (), (), 명색(名色), 육입(六入) 또는 육처(六處), (), (), (), (), (), (), 노사(老死)의 순서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석굴 법당불교미술의 정수인 불상들의 총집합체.

불상이란 부처상만을 뜻하기도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보살상이나 천왕상, 나한상, 심지어는 각 사찰의 입구에서 불교세계를 지킨다는 사천왕상이나 금강역사상, 팔부중상 등도 포함된다.

석굴암에는 본존불을 포함하여 모두 40구의 불상이 있었지만 제일 앞에 있는 좌우 첫번째 감실 두 곳에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반출되었기 때문에 불상이 놓여 있지 않다. 그러므로 현재 석굴암에 안치되어 있는 불상도합 38.

불상은 원래 간다라 미술에 시원을 두고 있다고 설명된다. 석가모니가 입멸한 후 약 500년 동안은 불상이 조성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기원후 1세기 파키스탄 북서부 페샤와르를 중심으로 한 간다라 지방에 정착하고 있던 그리스인들이 헬레니즘 문화를 기반으로 불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간다라 미술의 탄생이다. 그러므로 간다라 미술은 한마디로 헬레니즘미술 양식과 수법으로 불교의 주제를 표현한 조각 위주의 그리스풍 불교미술이다. 이러한 영향은 석굴암의 불상에서도 면면히 엿볼 수 있다.

석굴암은 경주 역사지구 안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다.

우선 불국사 등과 함께 입장료를 받는 몇몇 안 되는 유적이다. 더구나 관람키 위해 석굴암으로 들어가더라도 석굴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으며 유리로 만든 차단막이 설치된 통로 밖에서 지나가면서 보는 것만 가능하다. 물론 석굴암 신도증이 있는 사람에 한해 석굴 안에서 참배할 수 있다.

그러나 매년 단 하루부처님 오신 날음력 4 8에만 예외적으로 차단막 안으로 들어가 옛날 신라인들이 했던 것처럼 본존불 주변을 한 바퀴 돌 수 있다. 물론 내부에선 사진 촬영이 금지된다.

세계의 찬탄을 받는 석굴암의 평면전실, 통로, 주실로 이루어졌다. 방형공간전실에는 팔부중상과 금강역사상이 있고 사천왕상이 있는 좁은 통로를 지나면 궁륭(Dome) 천정을 인 원형 공간의 주실이 나온다. 주실 중앙에 본존불을 모셨다.

전실 벽면에 있는 8구의 팔부중상무사의 성격을 띠고 불법을 수호하는 여러 가지 모습의 신들이다. 치마를 입은 금강역사상 또한 불법을 수호하는 한 쌍의 수문장이다. 주실로 들어가는 통로의 좌우에는 두 발로 악귀를 밟아 항복시키는 사천왕상이 있다. 이들은 동서남북 사방을 다스리는 수호신으로 온 몸을 화려하게 무장한 채 무기를 들고 있다.

천계를 상징하는 주실로 들어가면 원형부 중앙 뒤쪽에 대좌가 있고, 그 위에 본존불 좌상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다. 벽 전체는 약 89센티미터 높이의 하단부가 요석(腰石)으로 둘려 있으며 그 위로 폭 약 1.19미터, 높이 2.67미터판석(板石) 29가 놓여 주벽 중간 부분을 이루고 있다.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범천상(梵天像), 제석천상(帝釋天像), 보현문수의 두 보살상 그리고 십대제자상이 대칭을 이루도록 조각돼있다. 법천의 ()’은 원래 우주의 최고 진리를 말하며 범천은 이것을 신격화한 것이다. 제석천천둥과 번개의 신으로 비를 내려 농사가 잘되고 사람들이 풍요롭게 살도록 해주기 때문에 가장 무서우면서도 자비로운 인도 최고의 신으로 숭배된다.

범천과 제석천 옆으로 두 보살상이 대칭을 이루며 서 있는데 보살깨달음을 이루었으나 모든 중생을 구제하여 함께 해탈하고자 부처가 되기를 보류하고 이 세상에 머물며 자비를 행하는 실천자를 뜻한다. 이 두 보살상은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실천을 상징하는 보현보살로 추정한다. 그 좌우로 석가모니 생존시의 십대제자가 다섯 명씩 조각돼있다. 다른 조각들은 추상적인 관념을 이상적으로 형상화한 것이지만 이들은 실재했던 사람들의 조각이므로 얼굴의 세부나 몸의 자세가 당시 인도인의 이국적인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석굴암의 건물 내벽에 조각된 이들 천부상, 보살상, 십대제자상 등은 특정한 경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석가모니의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든 회중의 광경을 나타낸 것이다. 신라인들은 여기에 나름의 종교적 해석을 가미하여 독특한 불상의 도안과 구성을 창안했다. 문수와 보현 두 보살상을 일정한 도상으로 표현하지 않고 무량한 보살을 대표토록 한 점, 천부상인 범천과 제석천을 보살 형태로 과감히 변형시킨 점, 감실의 여러 보살유마상을 추가한 점, 십일면관음상을 정면관으로 하여 중안본족불의 바로 뒤에 배치시킴으로써 일체감을 강조한 점 등은 다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신라인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을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는데 사실 이들 설명은 매우 딱딱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불교 용어와 한자들이 나오므로 전문가라 할지라도 어렵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이들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언젠가 석굴암에 대한 답사는 물론 여타 불교 유적지를 답사할 때 사전 정보로서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등 여러 자료를 기본으로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