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경주역사지구 답사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65) 불국사(3)

Que sais 2021. 12. 16. 14:12

https://youtu.be/tS4j_44SFMw

 자하문과 회랑

청운교와 백운교를 오르면 자하문이 나타나는데 자하문이란 붉은 안개서린 문이라는 뜻으로 부처의 몸에서 나온다는 자금색 광채를 말한다. 이 문을 통해서 부처가 있는 대진리의 도장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불국사 자하문

축대를 따라 5칸씩 행각이 있고 그 끝에 1칸씩 앞으로 돌출하고 지붕이 솟아오르게 건축되었는데 동편의 것경루(經樓)좌경루이고 서쪽종루(鐘樓)범영루이다. 종루의 원명수미종각(須彌鐘閣)으로 수미산에 있는 종각이란 뜻이다. 수미산석가여래의 이상향인 사바세계의 표상이다. 신라인들은 부처의 나라불국(佛國)을 만들기 위해 토함산 기슭수미산을 쌓았는데 그것이 불국사의 자연석 축대로 상징되고 그 위의 건축물들은 부처가 상주하는 보궁(寶宮)이다. 범영루에는 현재 법고를 넣어두고 있으며 좌경루경판을 넣어두었던 경루였으나 지금은 목어와 운판(雲版, 사찰에서 식사 시간 등을 알리기 위해 치는 금속편)을 달아두었다.

불국사 범영루

범영루 하부의 석조구조는 잘 다듬어진 돌을 짜 맞추어 특이한 기둥을 만들었다. 즉 돌단 위에 판석(板石)을 새웠는데 밑부분을 넓게 하고 중간 돌기둥을 지나면 다시 가늘고 좁게 하였다가 윗부분에 이르러 다시 밑부분과 같이 넓게 쌓았다. 쌓은 형태는 기둥돌이 모두 8씩 다른 돌로 되어 있고 다른 돌을 동서남북의 네 방향으로 조립한 것으로 대단히 독특한 조형미를 가지고 있다. 반면 좌경루의 하부 석조구조연꽃으로 장식한 8각 기둥으로 단순히 처리하여 대칭의 자리에 비대칭의 조형을 조성했다.

그런데 여기에도 대단한 건축 기법이 숨어있다. 돌기둥중방을 들이듯이 결구한 부분을 자세히 보면 기둥머리네모 난 돌이 약간 나와 있다. 이 돌이 바로 동틀돌 돌못으로 안으로 깊숙이 박혀 있는데 석굴암의 궁륭천장, 남산신성안압지동궁과 월지석축, 감은사의 축대도 이런 구조로 되어 있다.

동틀돌머리 안쪽으로 홈을 판 후 그 홈에 상하의 돌기둥이 걸리고 또 좌우의 중방처럼 생긴 수장재도 끼워진다. 그 턱에 걸리게 결구되면서 앞으로 밀려나지 않는다. 토압 때문에 석재대를 형성한 석재들이 밀려나기 쉬운데 동틀돌을 사용하면 이런 위험을 원천부터 봉쇄할 수 있다. 천 년이 훨씬 넘는 석굴암과 불국사가 오늘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선조들이 이런 과학적인 시공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자하문을 통과하면 세속의 무지속박을 떠나서 부처님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는 것을 상징한다. 자하문 좌우에 회랑이 복원되었는데 회랑의 구조궁중의 것과 유사하다. 국왕세간의 왕이요 ()출세간의 대법왕이라는 뜻에서 대웅전을 중심으로 동서회랑을 건립하는 수법이 생긴 것이다.

불국사 회랑

 

 대웅전(보물 제1744)과 무설전

대웅전 경내로 들어서면 불국사의 사상과 예술의 정수라 볼 수 있는 석가탑과 다보탑이 나타난다. 두 탑은 서로 크게 다른 모습을 하고 있으나 모양과 주변 분위기가 서로 어우러져 경내를 장엄한 불국토로 만든다. 석가탑과 다보탑은 각기 석가여래상주설법탑 다보여래상주증명탑으로 불교의 이상이 이곳에서 실현된다는 상징성을 갖는다.

불국사 다보탑(좌), 석가탑(우)

창건 당시 대웅전의 본존불 시각에서 두 탑을 바라보면 화려한 다보탑 뒤로 단순한 건물경루가 들어섰고 단아한 석가탑 뒤로는 화려한 종루가 배치되어 각가 생김새가 다른 두 탑과 누각이 전체적으로 다양함 속에서도 통일성을 잃지 않는 균형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불에 타 원래 모습이 크게 손상되었고 또한 여러 번의 복원 과정에서 종루와 경루제 모습을 잃었다고 본다. 대웅전 앞의 석등과 봉로대배례석도 주목할 만하다. 석등은 소박하지만 신라시대의 것으로 가장 오랜 것에 속한다. 석등 앞에 면마다 안상을 새긴 석대향로를 얹어 향을 피우던 봉로대.

불국사 대웅전

석가정토의 대웅전 건물은 기본적으로 아미타정토의 극락전보다 한 층 높은 위치에 위치한다. 임진왜란 이후 1659중건했던 것을 1765에 다시 지었다고 전해져 오는데 정면 5칸 측면 4으로 되어 있으며 창건 당시와는 구조가 달라졌다고 추정한다. 또한 창건 당시에는 석가여래와 미륵보살, 갈라보살삼존상이 모셔졌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신영훈은 이것은 불국사의 또 다른 특성 중에 하나라고 설명했다.

협시(挾侍)보살미륵과 갈라보살이 서 있는 예는 매우 드물다고 알려진다.

미륵보살미륵불이 아직 성불하기 전의 모습이며 갈라보살정광여래(定光如來)성불하기 이전의 형상인데 정광여래과거불이면 미륵불미래불이어서 현세불석가여래와 함께 과거현재미래를 나타내는 삼세불의 세계석가삼존불로 조성했다는 것이다.

대웅전 삼존상

무설전은 강당에 해당하는 건물로 현재의 건물은 1973년 중창 불사 때 세워졌다.

무설전이란 설이 없는 전당이란 뜻으로 강당이면서도 강의함이 없다는 건물명을 갖고 있음은 불교의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고 김상현 박사는 적었다.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불국사 경내에서는 가장 먼저 지어진 건물신라 문무왕 10(670)에 왕명에 의해 무설전을 새로 짓고 그곳에서 화엄경을 강의했다고 한다. 이 기록대로라면 불국사를 창건한 751년보다 훨씬 앞서므로 무설전불국사가 창건되기 이전의 건물로 추정한다. 따라서 무설전은 현재 볼 수 있는 것보다는 다소 작은 규모의 건물일 가능성이 높다.

불국사 무설전

무설전경론(經論) 강술(講述)하는 장소이므로 건물 안에는 불상을 봉안하지 않았으며 단지 강당으로서의 기능에만 충실했다고 본다. 그런데 현재 지장보살 김교각 스님의 등상(等像)이 안치되어 있다. 이 등상이 무설전에 안치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김교각 스님(697794)신라 33대 성덕대왕의 아들 24에 출가하여 당나라로 가서 구화산의 초당(草堂)에서 초인적인 수행을 했다. 구화산의 주인인 이 지역의 토호 민양화의 아들이 산에서 길을 잃고 사경을 헤맬 때 스님의 도움으로 무사히 귀가할 수 있게 되자 양화는 답례차 필요한 것을 물으니 스님중생을 이익되게 할 절을 짓고자 하니 가사크기만큼의 땅을 시주해 달라 했다. 민양화가 이를 승낙하여 스님이 가사를 펴니 구화산 99개봉을 모두 덮었다. 놀란 민양화가 스님에 귀의하여 구화산 자체시주했고 이곳에 화성사창건했고 지장보살추앙되었다.

스님이 입적하자 시신은 3년이 지나도 얼굴과 살갖이 살아있는 것과 다름없어 구화산 남대등신불을 모시고 그 위에 법당을 지으니 바로 육신보전(肉身寶殿)이다. 이때부터 구화산중국의 대표적인 지장도량이 되었다. 생전에 언제 고국인 서라벌로 돌아가느냐 질문하자 스님은 1300년 후에 다시 돌아갈 것이다라고 했다. 1997이 바로 김교각 스님 탄신 1300주년이므로 구화산 화성사김교각 스님의 탄생지경주의 불국사등신기증하여 무설전에 보셨다.’

대웅전 영역에는 모두 회랑이 둘러져 있다. 회랑을 건립한 근본 취지는 부처에 대한 존경의 뜻이다. 대웅전의 정문을 바로 출입하는 것은 불경(不敬)을 의미하므로 참배객존경을 표하는 뜻에서 정면으로 출입하지 않고 이 회랑을 따라 움직인다.

무설전 뒤쪽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피라미드식의 지붕을 얹은 관음전이 있다. 관음전에는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다. 이 가파른 계단을 낙가교라 하는데 이곳에 오르면 회랑이 어떻게 무설전과 대웅전을 두르고 있는지 잘 볼 수 있다.

 

다보탑

불국사가 갖고 있는 예술의 정수로 석가탑(국보 제21)과 다보탑(국보 제20)을 꼽는 학자들도 있다.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데 높이도 10.4미터로 같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 현재의 부처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 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다보탑(국보제20호)

다보탑은 온 우주의 근본 형상처럼 네모나고 둥글고 뾰족한 원형과 방형과 삼각형이다. 원형하늘, 방형이며 삼각에서 발달한 팔각인산의 상징이다. 학자들은 다보탑우주와 인간들이 바르게 걸어야 할 길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고 설명한다.

흥미로운 것은 다보탑몇 층인가는 아직 명쾌한 답이 없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탑과 모양이 너무 다르므로 층수를 헤아리기가 없기 때문인데 그 동안 이 문제가 얼마나 학자들간에 큰 화두였는지는 다음으로도 알 수 있다.

<동아일보>이광표 기자다보탑 맨 아래쪽의 계단이 있는 부분이 기단부(받침 부분)라는 데에는 대체로 전문가들의 의견이 일치한다고 국보이야기에서 적었다. 그러나 그 윗부분을 놓고 학자들의 의견이 엇갈린다. 기단부 위쪽의 사각 기둥이 있는 부분을 기단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이것을 하나의 층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탑 중간의 난간 부분 4각 난간과 8각 난간 부분을 각각 하나의 층으로 보기도 하며 이와 반대로 4각 난간과 8각 난간 부분을 모두 합쳐 하나의 층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그리고 난간 위부터 8각 옥개석(지붕돌) 아래 부분을 또 하나의 층으로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다보탑은 일반적으로 외형상으로 3층탑으로 인식하지만 주체부가 편평한 개석 위에 있다는 것을 감안하고 그 아래에 4개의 기둥으로 개방적인 공간을 구성한 부분을 하나의 층으로 보아 4으로도 볼 수 있다고 김광현 박사는 적었다.

한편 이광표무급(無級)의 탑에 무게를 두었다. 무급탑 설은 난간 안쪽에 숨겨져 있는 8각 기둥에 주목한다.  8각 기둥다보탑의 탑신(몸체)인데 이것이 난간에 의해 가려져 있다는 점에서 탑신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견해다. 탑신은 있으면서 없는 것이며, 탑신이 없다는 것층이 없음을 의미한다는 뜻이다. 다보탑이 몇 층인가 하는 외형상의 형식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751)으로 추측된다. 다보탑목조 건축을 하듯 접합제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다양한 석재를 조립하여 정교한 조화를 이루도록 축조한 탑으로 동양에서는 유일하다. 일반적으로 석재를 이용한 건축은 쌓아 올리는 방식이 대부분인 데 반해 불국사 다보탑석재목재와 같이 짜 맞추는 방법을 사용했다. 신라 장인들이 무겁기 그지없는 돌을 사용하여 석조 건축의 혁신을 이뤄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