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경주역사지구 답사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67) 불국사(5)

Que sais 2021. 12. 19. 13:54

https://youtu.be/tS4j_44SFMw

<석가탑의 도굴>

석가탑은 엉뚱한 일로 한국의 문화유산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된 탑으로도 유명하다. 석가탑창건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왔으나 1966 9 도굴범에 의해 석탑훼손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므로 정부는 도굴꾼이 훼손한 탑복원하기 위해 탑신부를 해체했는데 해체수리과정에서 2층 지붕돌 중앙에 있는 방형사리공 안에서 사리를 비롯한 사리용기(‘불국사 삼층석탑 내 발견유물이란 명칭으로 국보 제126호로 지정)와 각종 장엄구 등을 발견했다.

석가탑 해체당시모습

이 당시 발견된 유물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다음과 같다.

 

 금동제, 은제 사리외합 1

 은제 사리내합 1

 금동 방형사리합 1

 동경, 청동비천상

⑤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1

 묵서지편(墨書紙片)

 곡옥, 홍마뇌 환옥, 수정 환옥옥 종류

 은가락지, 수정 큰 구슬

 목탑 12 등이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평가되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다. 경문목판인쇄물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는데 690년에서 705 사이 당나라 측천무후 당시에 공문서에 사용되었던 글자 중 네 글자 10여 차례나 등장하고 있어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물로 밝혀졌다. 따라서 이 다라니경석가탑 건립 이전에 만들어서 불국사 창건 당시에 봉안된 것으로 보이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부분은 한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금속활자 등과도 연계되므로 보다 상세하게 설명한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복원전 상태

석가탑 무영탑(無影塔, 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는데, 현진건의 소설로도 유명한 아사녀와 아사달의 애처로운 사랑 이야기불국사를 찾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고 불국사가 널리 알려지는데 큰 공헌을 했다. 홍사준석가탑을 건축한 아사달 황룡사 9층탑을 지은 아비지와 동족으로 백제 사람일 것으로 추정했다. 아사녀와 아사달의 전설이 있는 영지불국사 입구 매표소에서 멀리 서쪽으로 내려다보인다.

석가탑석가모니를 상징하는 탑이다. 이 탑을 세운 아사달은 이 점을 착안해 석가탑의 자리를 보통의 탑과는 다르게 만들었다. 탑의 기단이 땅과 만나는 곳에 놓는 석재지대석이라고 하는데, 지대석의 아래큰 바윗돌을 옮겨다 놓아 탑이 바위를 타고 앉은 모습으로 만들었다. 석가모니가 눈 덮인 히말라야 산에서 6년 동안 수행하면서 앉았던 자리가 주로 바위였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으로 추정한다.

석가탑(국보제21호)

석가탑바위 위에 조성됐다. 탑 아랫 부분을 자세히 보면 바위와 탑의 기단이 만나는 부분이 독특한 것을 알게 된다. 울퉁불퉁하게 크고 작은 바위들을 깔고 그 위에 석가탑을 올렸는데 여기에서도 그랭이 공법이 사용되었다. 받침돌을 울퉁불퉁한 바위에 따라 도려내고 수평을 맞춘 것이다. 자연미가 돋보이는 부분으로 다른 나라의 탑에선 찾아볼 수 없다. 그랭이 공법에 대해 좀 더 설명한다.

그랭이 공법 불국사 석벽에서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는데 원래 자연석과 자연석접합하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다. 바위는 울퉁불퉁하게 생겼고 이가 벌어져 있는 것이 보통이므로 고르게 쌓으려면 자연석을 가공해야 한다. 그런데 그랭이 공법은 특정 바위를 생긴대로 놓아둔 채 바위의 형태에 따라 다듬어 가면서 맞추는 것이다.

이 공법은 우리나라 건축의 독특한 특성 중에 하나다. 서양의 건물주춧돌과 기둥을 서로 견고하게 결색하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주춧돌 위에 기둥을 간단하게 올려놓기만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건물지진과 같은 충격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경우 화재에 의해 건물이 소실되는 경우는 많지만 지진 등에 의해 피해를 보았다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한국에 큰 지진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가능하지만 한국의 건물들 대부분이 충격에 강한 것은 그랭이 공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주춧돌을 아무리 유리와 같이 갈아 놓는다하더라도 기둥을 올려놓으면 유격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는 기둥과 주춧돌 사이의 간격을 없애고 밀착시키기 위해 그랭이 공법을 사용했다. 주춧돌을 생긴 모습 그대로 두고 나무기둥 밑둥을 도려내어 밀착시킨 것이다. 그레질칼로 기둥을 다듬어 돌에 맞추면 돌의 요철에 따라 기둥이 톱니처럼 서로 맞물린 듯이 된다. 기둥과 주춧돌은 막중한 건물의 하중으로 인해 밀착되기 때문에 지진에 흔들렸다하더라도 기둥의 요철에 따라 다시 제자리로 들어선다.

신영훈 1967멕시코시에 전통적인 한국 건축 기법으로 건설한 한국정(韓國亭)멕시코에서 일어난 수많은 지진에도 불구하고 아무 탈 없이 아직까지 견딜 수 있는 것은 그랭이 공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끄새멕시코에 가서 직접 답사할 때 안내한 멕시코인에게 그랭이 이야기를 했더니 어느 한 곳에서도 강력한 지진의 흔적을 볼 수 없어 이상했다고 했는데 그 이유를 알게 되어 기쁘다고 말했다.

석가탑의 둘레에는 팔방금강좌라고 하는 별도의 탑구가 있다. 정사각형의 탑구 네 모서리와 네 변의 중심원형의 연화좌대를 놓고 그 사이를 장대석으로 연결한 것이다. 각각의 연화대에는 여덟 분의 보살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팔방금강좌가 들러져 있음으로 인하여 석가탑에 전체적인 안정감이 더해진다.

석가탑(국보제21호)

석가탑의 탑신의 높이 2층보다 1이 훨씬 높다. 2층부터는 1층 높이의 반 이하로 줄어든다. 3층은 2보다도 약간 낮게 만들었다. 폭과 지붕돌은 위로 올라가면서 조금씩 줄어들었다. 덮개에 해당하는 하 갑석의 윗면은 경사를 약간 주어 빗물이 잘 빠지도록 했다. 경사가 사방에 나 있으므로 모서리 45도 각도로 융기된 선이 생겨나는데, 이 선을 무리 없이 다듬기란 쉽지 않은 데도 석가탑을 보면 둔하게 보이기 쉬운 부분을 아주 뛰어난 솜씨로 날렵하게 처리했음을 알 수 있다.

상륜 3층 지붕돌 위에 올린 네모반듯한 모양의 노반에서 시작된다. 노반 위에 복발 그리고 이어서 앙화, 보륜, 보개, 수연받침, 수연, 용차, 보주의 순으로 상륜이 구성된다. 이 석재들은 크기가 작은 데다 높게 쌓아 올려야 하기 때문에, 중심부에 구멍을 내고 3층 지붕돌에 꽂아 세운 철찰주(철로 만든 기둥)에 죽 내려 끼우는 방식으로 설치하였다. 상륜부 전체에 세밀한 조각들이 많지만 특히 앙화의 네 모서리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비천상, 네 변에는 음식을 바치는 공양비천상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석가탑은 원래 앙화까지만 남아 있었는데, 1973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의 상륜부를 본떠서 그 위의 상륜을 다시 만들어 놓았다.

석가탑시각 교정 등 매우 정교한 건축 기술을 도입한 것으로 유명하다. 기단 기둥의 수치를 보면 안쪽 기둥에 비하여 바깥쪽 모서리 기둥의 높이가 약간씩 높다. 또한 기단과 탑신의 너비는 아래쪽이 넓고 위로 갈수록 좁다. 이것을 귀솟음과 안쏠림기법이라고 부른다.

귀솟음중심 기둥과 모서리 기둥의 높이를 같게 할 경우 양쪽 끝이 중심보다 낮게 보이는 착시 현상을 방지하기 위한 기법이다. 이는 가령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에서 볼 수 있듯이 중앙부가 처져 보이는 것을 막기 위해 중앙부의 기둥을 높게 하는 것을 반대로 이용한 기법이다. 안쏠림기단과 탑신의 기둥수직으로 올리는 것이 아니라 약간 안쪽으로 기울게 만드는 것으로 역시 수직으로 올렸을 때 착시 현상에 의해 건물의 윗부분이 넓어 보이는 것을 교정하기 위한 기법이라고 강우방은 설명했다.

석가탑통일신라 초기 석탑 양식의 대세를 따르고 있지만 이를 보다 간략화하면서 석재가 갖고 있는 특성을 최대한 살려 하나의 완성된 양식을 확립했다. 탑신부의 비례통일 초기의 경향에 따라 1층에 비해 2부터 체감률이 급격히 높아지지만 옥신석은 높이에 비해 폭이 줄어들어 종래의 장중한 외관에서 경쾌한 외관으로 바뀐다. 여기에도 상당한 미적 지혜가 발휘된다. 석가탑은 기단부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균형있게 체감되는데 그 체감의 비율 4 : 2 : 2이라는 것을 앞에서 설명했다. 상식적으로 보면 4 : 3 : 2가 훨씬 더 균형있게 보일 것 같지만 사람의 눈은 착시 현상을 일으키므로 아래에서 올려다 볼 경우 2층과 3층의 길이를 같게 하여도 3층이 거리상으로 멀리 있기 때문에 작게 보인다는 점을 고려하여 체감한 것이다. 이후 이러한 석가탑의 양식을 따라서 건축된 신라의 수많은 석탑들을 일반적으로 일반형 석탑이라고 부른다.

석가탑은 현재 완전 해체하여 복원 중이다. 2014년 말까지 석가탑의 상륜부와 탑신부, 기단부와 내부 적심(탑 안을 채우는 흙과 자갈)완전히 해체하고, 석탑 아래 지반까지 조사하는 것이다. 최대한 원래 부재를 사용하는 것을 기본으로 해체한 석탑 부재는 깨끗이 닦아내고, 훼손된 곳은 접합·강화 처리를 한 뒤, 내부 적심도 다시 채워 넣고 조립하는 것인데 그동안 석가탑해체·수리한 적이 있으나 탑 아래 땅속까지 발굴하는 것은 창건 이래 처음이라는 설명이다. 학자들은 신라시대탑과 건물 지반 아래 공양품을 바치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신라인들이 쓰던 장신구나 허리띠 장식, 관식(冠飾) 등 일상용품같은 신라의 타임캡슐이 나올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석가탑기단부 금동불입상

2013 7월 탑 아랫부분인 기단(基壇) 내부의 적심석(돌무지)을 들춰내던 중 석가탑 아래쪽에 숨어 있던 금동불(金銅佛) 입상(立像) 1271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발견 위치북측 상층 기단의 면석(面石·세움돌) 외곽에서 석탑 중심부 쪽으로 48 지점. 불상높이 4.6, 대좌(불상을 올려놓는 받침)의 지름이 2.3소형 불상이다. 학자들은 이 불상 8세기 중엽에 제작됐으며, 석가탑이 만들어진 경덕왕 원년(742)에 탑 속에 납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문화재청진단구(鎭壇具)  나쁜 기운이 근접하지 못하도록 건물의 기단 등에 넣은 물건으로 추정했다. 반면에 강우방 박사는 지체 높은 신자들이 평소 자신들이 갖고 있던 귀한 물건을 공양품으로 탑 속에 넣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