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경주역사지구 답사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66) 불국사(4)

Que sais 2021. 12. 18. 15:21

https://youtu.be/tS4j_44SFMw

다보탑접합재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조립식으로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 8을 한 탑에서 짜임새 있게 구성한 ,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이 돋보인다.

특히  3으로 구성된 석가탑의 1, 2, 3몸돌의 높이는 각각 4:2:2 비율로 돼있다. 엄영일 포항공대 교수 ‘4:2:2 비율은 사람이 아래에서 볼 때 상승하는 느낌과 안정감을 주는 과학적인 지혜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특히 1920 다보탑을 실측한 요네다 교수는 이 탑이 정확하게 기하학적으로 8 : 4 : 2 : 1의 비례인 등비급수의 비로 세밀하게 구성되었다고 발표했다. 한마디로 다보탑이야말로 신라인의 독창적인 공학기술과 예술성을 가미한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다보탑(국보제20호)

다보탑 상층기단 중앙에는 네모난 돌기둥이 있다. 아래에 주춧돌이 있고 머리 위에 주두를 얹었다. 네 기둥과 가운데 기둥은 오방(五方)을 뜻하는데 오방티베트 불교에서 우주의 표상이다.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일본인들이 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다보탑 자체는 신라의 독창적인 작품은 아니다. 다보탑칠보로 장식된 화려하고 장엄한 탑으로 묘사되어 법화신앙이 팽배하던 남북조시대 중국인들이 건설하기 시작했다. 당나라 고종 건봉(乾封) 2(667)혜상(惠祥)이 지은 홍찬법화경(弘贊法華經)에서 여러 기의 다보탑 건립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고 최완수는 적었다.

 

동진(東晋) 애제(哀帝) 흥녕(興寧) 2(364)혜력(慧力)이라는 승려가 현재의 남경인 건강(建康) 와관사(瓦官寺)에 돌로 다보탑 하나를 만들었다. 송나라 문제(文帝) 원가(元嘉) 5(428) 팽성사람 유불애(劉佛愛)건강다보사를 짓고 또 다보탑 하나를 지었다.

() 고제(高帝) 건원(建元) 원년(479)예주자사(豫州刺史) 호해지(胡諧之)종산(鍾山)법음사(法音寺)를 지으니 사인(舍人) 서엄조(徐儼助)석조 다보탑 하나를 지었다. 당나라 국자좨주 소경(簫璟)난릉(蘭陵) 사람인데 양무제의 현손으로 누님수양제의 황후가 되었다. 귀족집안에서 태어나 집안 대대로 불법을 깊이 믿었으므로 수양제 대업(大業, 605616) 중에 스스로 법화경을 외우다가 경문에 의지하여 다보탑을 만들었는데 전단 향나무로 하였다.’

 

이 글을 보면 4세기 중반부터 7세기 중반까지 300여 년 동안 중국에서는 다보탑이 끊임없이 조성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현재 중국에서는 기록에 남은 다보탑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으므로 중국 다보탑의 형식이 어떠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운강석굴에서 보이는 다보탑 안에는 항상 지붕과 탑신을 갖춘 일반형의 목조다층탑 양식으로 하층부에 다보불과 석가모니불이 함께 앉아 있는 이불병좌상이 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불국사 다보탑중국에서 건설된 역대 다보탑을 참고한 후 그 틀에서 벗어나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가미하여 만들어낸 것으로 추정한다. 불국사 다보탑중국식의 누각형 층탑개념에서 벗어나 스투파(stupa) 원형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국의 석탑양식으로 변모시킨 작품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그 동안 성덕왕릉을 비롯한 스투파식 왕릉을 축조하면서 터득한 지혜가 다보탑을 건립할 때 영향을 끼친 결과일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법화경 견보탑품에서 다보탑을 서술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다보여래는 평소 내가 부처가 된 뒤 누군가 법화경을 설법하는 자가 있으면 그 앞에 탑 모양으로 솟아나 그것을 찬미하겠다고 약속했다. 다보여래는 훗날 석가 법화경의 진리를 말하자 정말로 으로 불쑥 솟아났다.

그 탑의 높이 500유순이고 가로와 세로 250유순인데 땅에서 솟아나와 공중에 머물러 있었다. 갖가지 보물로 장식하니 오천의 난간과 천만의 감실이 있고 무수한 당번()으로 장엄하게 꾸몄으며 보배영락을 드리우고 보배방울 만억을 그 위에 달았다. 사면(四面)에서 모두 다마라발전단향(多摩羅跋檀香)의 향기가 나와 세계에 두루 가득 차고, 모든 번개(幡蓋), , 유리, 자거, 마노, 진주, 매괴 등 칠보로 합쳐 만드니 높이가 사천왕 궁전까지 이르렀다.’

 

이런 내용을 가능한 한 조형적으로 완벽하게 표현하고자 한 것이 불국사 다보탑이라는 설명으로 세계에서 한국의 다보탑처럼 변화무쌍하면서도 법화경의 진리를 이상적으로 구현한 탑은 찾아볼 수 없다는 설명이다. 한마디로 다보탑은 세계 어떤 탑에서도 전혀 볼 수 없는 통일신라 최전성기의 화려한 탑으로 완전히 규범에서 벗어나 참신하고 기발한 착상으로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다보탑에는 지금 사자 한 마리가 서있다. 하지만 원래는 네 마리였다.

1902년 일본인 세키노 다다스(關野貞)다보탑을 조사한 후 사자 네 마리가 있다고 기록을 남겼는데 1909 다시 왔을 땐 두 마리만 남았다고 했다. 1916 발간된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사진두 마리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1902년부터 1909년까지 두 마리, 1916년 이후 다시 한 마리가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빙허의 불국사기행에는 이 탑의 네 귀에는 돌사자가 있었는데 두 마리동경의 모 요리점의 손에 들어갔다 하나 숨기고 내어놓지 않아 사실 진상을 알 길이 없고 한 마리는 지금 영국 런던에 있는데 다시 찾아오려면 500만원을 주어야 내어 놓겠다 한다던가? (중략) 이 탑을 이룩하고 그 사자를 새긴 이의 영이 만일 있다하면 지하에서 목을 놓아 울 것이다라고 썼다고 홍석민은 적었다.

현재 사용되는 10원짜리 동전다보탑이 그려져 있다. 1966최초로 발행되었고 1983도안을 약간 변경하여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둘의 다보탑 도안이 약간 다르다. 처음에 만들어진 동전에는 다보탑의 계단 위에 돌사자가 없고 새로 만든 동전부터는 돌사자가 있다.

1971년부터'나 십원화'(좌)와 1983년부터'다 십원화'(우)(사진-한국조폐공사)

그런데 1983에 제작된 10원짜리 동전 속의 다보탑은 엉뚱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1987민주화 열기가 분출되면서 새 대통령을 뽑는 중요한 시기였다. 이때 대통령 후보김대중, 김영삼, 노태우 3이었는데 노태우 후보의 진영에서 수십만 부처를 모시면 당선이 무난하다는 말을 점술가로부터 듣고 10원짜리 동전의 다보탑불상을 새겨 넣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시중에 진짜처럼 떠돌아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으로 된 이후에도 시들지 않고 유포되었다.

그러나 1983년의 동전 속돌사자를 새로 넣은 것은 다보탑을 자세히 보면 의문이 풀린다. 1966년의 동전을 도안한 디자이너는 돌사자가 없는 면의 다보탑을 그렸다면 1983 새로운 동전을 도안한 디자이너는 돌사자가 있는 면을 45도 각도에서 그린 것이다. 1983년 이후에 만들어진 동전에서 보이는 돌사자선거와 전혀 관련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이런 루머는 조작된 유언비어가짜뉴스.

일부 학자들은 연화대좌에 새긴 꽃 모양이며 화려한 목걸이로 미루어보아 이들 사자는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장식적인 화려함으로 들어간 9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불국사삼층석탑(석가탑)

다보탑과 대조되는 것은 대웅전 앞 뜰 서쪽에 있는 석가탑이다. 석가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석가여래가 이 탑 속에 머물면서 영원히 설법하는 탑이라는 뜻이다. 다보탑다보여래가 탑 속에 머물면서 영원히 석가여래의 설법을 증명하는 탑이라는 뜻이므로 이 탑들은 둘이면서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불국사삼층석탑이라고 부르지만 일반적으로 석가탑 이라고 줄인 명칭을 더 많이 사용한다.

석가탑(국보제21호)

석가탑석가보리수 아래에서 크게 깨닫고 항마촉지하였을 때 모습을 표현한다고 설명된다. 그러므로 석가탑 아래 삐죽삐죽 튀어나온 바위보리수 아래 석가가 않았던 암좌(岩座)이며 여덟 개의 둥근 연화석팔부금강신장들이 부처님을 모시고 둘러앉았던 자리를 의미한다.

석가탑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우고 그 위에 상륜부를 조성한 일반형 석탑으로 기단부나 탑신부에 아무런 조각이 없어 간결하고 장중하며 각 부분의 비례가 아름다워 전체의 균형이 알맞은 뛰어난 작품으로 사람에 따라 다보탑보다 더 후한 점수를 주기도 한다.

높이 10.8m. 1층 탑신 7.7t, 1층 옥개석 7.1t, 2층 옥개석 6t, 탑 상륜부를 떠받치는 접시 모양 장식 노반(露盤) 500이나 되는 만만치 않은 석탑으로,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제112)과 고선사지삼층석탑(국보 제38)의 양식을 이어받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한국 탑에서는 지붕의 처마 밑 부분의 공포구조를 추상한 형태로 만든다. 석가탑에서는 여러 층급으로 단을 이루는 방식에 따라 5이다. 처마 좌우 끝에는 구멍을 파고 금동으로 만든 장엄구를 장치했다. 3층 지붕 위에는 노반(露盤)을 얹고 위에 상륜(相輪)을 올렸는데 철심(鐵心)에 돌을 다듬어 만든 여러 부재들을 중첩시켜 완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