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한국유산)/경주역사지구 답사

경주역사유적지구 답사(68) 불국사(6)

Que sais 2021. 12. 23. 12:37

https://youtu.be/tS4j_44SFMw

목판 인쇄물의 대명사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인쇄기술은 세계적으로 목판, 목활자 인쇄를 걸쳐 금속활자 인쇄로 발전하였다.

이는 금속활자목판과 목활자 단계를 거치지 않고 이루어졌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목판인쇄에서도 세계 최고의 자료를 갖고 있다.

목판인쇄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책판을 만드는 데 적합한 재질의 나무를 선택하여 베어내서 바닷물에 넣어 을 빼고 판각하기 쉽게 결을 삭히는 과정부터 시작한다. 지역에 따라 바닷물 대신 민물을 이용하기도 한다. 바닷물에서 건져낸 목재는 적당한 크기와 두께로 자른 후 응달에서 건조시켜 나무가 뒤틀리는 것 등을 막는다. 목판을 만들기에 충분해 진 나무대패질로 반질하게 만든 후 새기고자하는 책의 본문을 쓴 종이를 나무판에 뒤집어 붙인 후 한자 한자 각필하여 목판을 완성한다. 목판 위에 인쇄용 잉크를 칠하고 종이를 덮어 인쇄하면 된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문화재청)

현존하는 목판 인쇄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 바로 불국사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126)이다. 불국사 석가탑의 제2층 탑신부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704751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가로 52센티미터, 세로 6.7센티미터 가량 되는 닥나무로 만든 종이를 12 이어 찍은  7미터 정도 되는 두루마리 형식의 인쇄물인데, 각 행마다 일곱에서 아홉 자씩의 문자를 목판으로 인쇄했다. 밀도 0.815g/, 두께 0.08mm로 표면이 고르고 인쇄된 먹이 전혀 번지지 않은 인쇄물의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와 같이 폭이 좁은 것은 탑 안에 넣어야 하므로 크기를 절대 규모로 작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다라니 주문을 뜻하는 말로 이것을 필사해 탑 같은 데 봉안하면 무병장수하고 재앙이나 악업소멸시켜 준다고 생각하여 과거에 널리 보급되었다.

금강반야바라밀경(대영박물관)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랜 목판 인쇄물로 알려진 것은 영국의 고고학자이자 도굴꾼으로 유명한 스타인이 중국의 돈황에서 발견한 금강반야바라밀경(금강경)으로 발행 시기는 868이며 왕개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인쇄한 것으로 이 인쇄물에 비하면 석가탑에서 나온 목판 인쇄물 120년 이상 앞선 것이다. 또한 일본에서도 776에 인쇄하였다는 백만탑다라니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보다 최소한 20이 늦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일본의 백만탑다라니에 비해 제작 연대뿐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뛰어나다.

백만탑다라니(츠쿠바대학)

먼저 백만탑다라니목판에 문자를 새겨 날인한 것이지만 무구정광대다라니경판목 전체에 글자를 새기고 종이를 얹어 인쇄한 본격적인 의미의 목판 인쇄.  백만탑다라니작은 종이에 불과하지만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인쇄한 두루마리이며 조각기술 또한 정교하여 어느 목판 인쇄보다 아름답다.

일본의 백만탑다라니보다 앞섰다는 것이 확인되자 1996 12월 중국에서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낙양에서 인쇄된 뒤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중국 측은 그 근거로 690704에 재위한 당나라 측천무후가 특별히 만들어 썼던 무주제자(武周製字, 측천무후 즉위 첫해인 690년에 반포하여 사용하다가 705년 복위한 중종이 폐지함) 무구정광대다라니경 8군데에 나온다는 점을 들었다. 측천무후 때 쓰던 글자가 나온다는 것은 곧 중국에서 만들어 이를 한국에서 수입하여 봉안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중국의 주장이 성립하려면 중국에서 이 경이 인쇄됐다는 증거를 제시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더구나 중국의 주장대로라면 중국에서 나오는 영어신문영어로 인쇄됐기 때문에 미국 것이며 미국에서 인쇄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중국의 주장이 얼마나 억지인지 알 수 있다.

우리 학자들은 이에 대해 즉시 반론을 폈다. 박지선 교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종이신라 닥종이 8세기 초중국 종이와 차이가 있음을 밝혔고, 김성수 교수경주 구황리 3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외함(舍利外函)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함께 안치했다라고 새긴 글씨(706년 제작)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권미제(卷尾題, 책의 마지막 부분에 제작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적은 글) 글씨에 필적 감정을 의뢰한 결과 동일한 사람이 썼다는 것을 제시했다. 더불어 글자체가 당시 중국 것과는 다른 신라 특유의 필체로 제작 시기가 기존의 750년경이 아니라 사리함 제작시기와 같은 706으로 올라간다고 발표했다.

특히 8세기 초 당나라는 이미 안진경, 왕희지 등을 거친 시기이므로 글자체가 매우 정교하고 격식과 질서를 중요시했는데 무구정광대다라니경중국에서 도입된 것이기에는 너무 자유분방하고 질서가 없게 제작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글자 크기에 구속됨이 없이 한 행에 79자를 자유롭게 배열하고, 글자의 좌변과 우방이 불규칙한 상태일 뿐 아니라 글자를 상하좌우로 자유분방하게 배열했다. 이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면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 확실하다는 뜻이다.

한편 박상국 무구정광대다라니경 704년 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되어 신라로 들어왔으며 석가탑의 다라니경 751년 석가탑 건립을 계기로 간행했던 목판본이라고 주장했다. 불경 번역에 관한 내용을 담은 개원석교록에 의할 경우 무구정광대다라니경 704년 인도 승려중국에서 한문으로 번역했다는 것이다. 그는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사리함 명문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붓으로 옮겨 적은 다라니경 706신라에 들어와 유통된 후 석가탑에 안치하기 위해 목판으로 인쇄했다고 발표했다. 중국학자들이 702년경중국에서 간행했다는 억지를 물리칠 수 있는 또 하나의 근거 자료로 의미가 있다.

그런데 2005 9월 국립중앙박물관의 발표로 온통 소용돌이로 몰아갔다.

국립중앙박물관 1966년 해체 때 다라니경과 함께 발견된 묵서지편(墨書紙片)고려시대 초기인 11세기 무렵에 작성된 불국사 석가탑 중수기(重修記) ()국사무구광정탑중수기(()國寺无垢光淨塔重修記)라고 발표했다. 또한 당시 중수 상황과 전말을 기록한 불국사서석탑중수형지기(佛國寺西石塔重修形止記)라는 제목의 또 다른 문건과 다라니경으로 추정되는 사경(寫經) 붓으로 베껴 옮겨 적은 불경 조각 등도 확인됐다.

석가탑원명확인묵서

한지에 묵서로 작성된 이 중수기에 의해 석가탑고려 초기에 중수됐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졌으며, 아울러 그 당시 이름은 무구광정탑(无垢光淨塔) 또는 서석탑(西石塔)이라는 놀라운 사실도 밝혀졌다. 석가탑을 서쪽에 있는 석탑이라는 의미에서 서석탑으로 불렀으므로 그 맞은편 다보탑 동석탑(東石塔)이 된다.

한편 깨알 같은 무수한 글씨를 적은 총 110쪽 분량에 달하는 이 불국사 중수기가 발견됨으로써 향후 판독에 따라 한국 불교사를 새로 쓸 획기적 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되지만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제작 년대가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되었다. 한마디로 중수기로 인해 예기치 않은 논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현존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인쇄물로 알려진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두고 1990년대 후반부터 동아시아, 특히 중 학계에선 인쇄술 원조(元祖) 가 어디냐란 논쟁을 벌여왔고 한국 측이 매번 판정승을 거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11세기 전반 석가탑 중수사실을 담은 기록이 확인되자 다라니경의 제작연대나 탑 안에 넣은 시기를 고려 초기로 주장할 수 있는 여지를 새로 열어놓은 셈이기 때문이다.

박물관이 공개한 중수기 마지막 줄에 석가탑이 착공된 지 285이 지났다는 기록이 적혀 있다. 탑의 중수가 이뤄진 때는 중국 요나라 태평 18으로 고려 정종 때 1038이다. 여기서 285을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 제35대 경덕왕 재위 12(753)이 된다. 이는 다라니경의 제작연대에 혼선을 주기에 충분하다. 한 발 더 나아가 다라니경을 중수 과정에 넣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므로 목판인쇄의 종주국 자리를 내주어야할 뿐 아니라 한국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설명도 된다.

<중국과학원자연과학사연구소>판지싱(潘吉星) 연구원 1997년 서울에서 열린 국제심포지엄에서 한국의 목판인쇄는 1011세기경에야 시작됐다석가탑에서 발견된 다라니경 702년 중국 뤄양(洛陽)에서 인쇄된 것이라는 주장까지 펼쳤다. 따라서 고려 정종 대인 1038 보수된 사실 정도만 파악된 이번 중수기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폭발성이 큰 논쟁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었다.

초미의 관심사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고려시대 수리 당시에 새로 만들어 봉안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하는 점이다. 이 문제는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다음과 같이 정리되었다. 우선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고려 때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결론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등장했던 고졸한 서체

 지질이 신라 특유의 닥종이.

 사용된 신라 산이다.

 측천무후 집권기 690704에만 사용되었던 한자들이 발견된다.

 

측천무후 때 사용된 글자가 발견된다는 자체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조성연대가 고려 때 임을 부정한다는 뜻이다. 놀라운 연구가 계속 발표되었는데 중수기가 두 번에 걸쳤다는 것이다. 1024 불국사 무구정광탑 중수기 1038 불국사서(西)석탑중수형지기. 당연히 석가탑을 두 번 중수한 것이라고 여겨졌으나 같은 탑을 다른 이름으로 불렀는가가 관건이었다.

이 문제를 남동신 서울대 교수가 말끔하게 해석했다. 1024년 중수기의 해체 기술 부분에서 앙련대(연꽃 모양의 부재)’, ‘화예(꽃술 모양의 기둥)’, ‘통주(대롱 모양의 기둥)라는 부재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볼 때 이는 석가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보탑의미한다는 것으로 한마디로 1024다보탑을 수리하고 1038석가탑을 수리했다는 설명이다. 다보탑의 중수기가 석가탑 안에 들어 있는 것은 1038년 석가탑 중수 14년 전의 다보탑 중수기를 옮겨 석가탑봉안했다는 설명으로 이유는 다보탑 내부의 안치 공간이 좁아 그곳에 있던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함께 석가탑으로 옮겨졌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석가탑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038 이전까지는 원래 다보탑에 있었던 것이라는 얘기다. 이 말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원래 다보탑에 있었지만 석가탑에는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1024에는 다보탑만 수리했는데 1036 지진으로 석가탑도 붕괴 위험에 놓이자 1038 두 탑을 모두 수리했으며 이 때 다보탑에 있던 무구정광대다라니경 2종 중 1권을 빼내 새로 석가탑에 집어넣은 것이라는 시각으로 현재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다보탑 창건 당시신라 때라는 것이 맞는다는 결론이다.

1038에 새로 만든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집어넣었을 가능성에 대해 박 교수는 단호하다. 고려시대는 이미 탑에 봉안하는 경전으로 납탑공양경(納塔供養經) 즉 탑에 넣어 무병장수와 복을 비는 경전인 보협인다라니경을 넣는 것이 유행한 것을 감안할 때 석가탑 중수 당시에 굳이 번거롭고 예산이 많이 드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새롭게 목판본으로 만들어 간행할 이유가 없었다는 주장이다.

다보탑·석가탑의 창건 연대 740742으로 기록한 중수기로 인해 오히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제작 시기 기존의 751에서 9 이상 올라가게 되는 성과도 얻었다. 분명한 것은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술이라는 국사 교과서의 기술을 고칠 필요가 없게 됐다는 사실이다. 한편 강남대학교의 조형진 교수 중수기와 상관없이 안진경체를 닮은 점 등을 종합해보면 다라니경의 제작연대는 750800년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여하튼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어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인쇄국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데에는 유물 도굴단이 큰 역할을 했다. 수사 기록에 의하면 네 명의 도굴단이 밤중에 불국사로 숨어들어가 탑의 옥개석을 들어내다가 체포되었는데 이때 그 속에 보관되어 있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된 것이다.

그런가 하면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본으로 인정하더라도 우리나라가 목판 인쇄술을 처음으로 창안한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천혜봉 교수동양 인쇄문화의 발달사적인 시각과 중국과의 문화 교섭사를 고려할 때 우리나라가 목판 인쇄술의 원조라는 주장에는 이견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현재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술에 의해 간행된 증거물이라 하여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로 목판 인쇄를 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주장 역시 우리 유산을 보다 객관적이고 정당하게 평가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라경준 박사 700년 경 중국에서 목판 인쇄가 시작되었다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