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한 장의 쾌거>
DNA가 유전자의 핵심이라는 것을 인지한 때부터 세계 각국의 학자들은 이들 구조를 규명하는데 총력을 기우렸다. DNA구조를 분석하는 것이 유전의 핵심을 찾는 가장 빠른 길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학자들의 예견대로 DNA가 이중 나선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 발견된 순간부터 유전자분야는 획기적으로 발전한다.
핵산 구조를 밝히는데 제일 먼저 도전장을 던진 사람은 1954년에 이미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라이너스 폴링(Linus pauling)이었다. 그는 우선 자신이 노벨상을 수상하게 한 분야인 X선 회절 연구를 참조하여 분자의 축소 모형을 만들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커다란 분자는 여러 번의 연결로 다양한 대칭을 이룰 것이라는 기존 학자들의 일반적인 관념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다. 폴링은 나선형이 ‘당량(當量)이지만 비대칭인 두 물체의 일반적 관계’를 표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 하나의 세포 속에 들어 있는 DNA를 풀어서 직선으로 펼치면 그 길이는 일반적으로 1.8~3미터에 이른다. 특히 살아 있는 모든 세포의 생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어떤 단백질 물질이 나선형 가닥처럼 생겼음을 볼 때 DNA구조는 나선형이 틀림없다고 추측했다.
그의 예측은 정확했지만 그에게 노벨상이라는 두 번째의 과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DNA는 3중 나선형을 취한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의 모형은 2중 나선형이라는 정답에서 약간 벗어난 것이다. 그는 DNA구조를 발견할 수 있는 가장 근접한 거리에 있었고 거의 정확하게 DNA구조를 밝혔음에도 이 실수로 인해 2번째 노벨상 수여 기회를 잃어버리고 단지 다른 연구팀이 DNA 구조를 발견하는 보조자로서 만족해야 했다.
그가 이와 같이 다소 틀린 결론을 내리게 된 배경에는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폴링은 1952년 킹스 칼리지에서 윌킨스가 찍었다는 DNA 분자의 X선 회절 사진을 직접 볼 예정이었다. 그러나 미국 국무성은 의회의 반미 활동 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폴링의 정치적 견해가 자유주의라는 것을 이유로 여권을 갱신해 주지 않았다. 결국 폴링은 미국에 남았고 윌킨스의 사진을 보지 못한 채 DNA 분자를 3중 나선 모형으로 발표한 것이다.
그는 그 후 많은 정치 활동으로 더욱 바쁘게 지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냉전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핵실험 금지 조약을 주창했다. 그의 평화운동은 많은 호응을 얻어 1963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여 궁극적으로는 두 개의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의 대열에 포함되었다.
결론을 먼저 말한다면 DNA가 이중 나선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을 밝힌 사람은 크릭(Francis Harry Compton Crick)과 왓슨(James Dewey Watson)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들에 의해 유전자 분야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며 현대의 유전학이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만든다.
DNA 나선 구조를 밝힌 쌍두마차 중의 한명인 크릭은 영국 노샘프턴에서 구두 공장을 운영하는 부모로부터 태어났다. 크릭은 어릴 때부터 과학에 큰 흥미를 보여 부모는 크릭이 8세 때 어린이백과사전을 사주었다. 크릭이 우주에 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 일일이 답을 해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37년 런던의 유니버시티칼리지에서 물리학과를 졸업한 후 그는 대학원에서 수력학을 공부했다. 학자들은 그가 유전자분야 즉 생물학을 전공하지 않고 물리학을 전공했다는 것이 생물학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라고 믿는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크릭은 해군연구소에서 일하면서 자기 기뢰와 음향 기뢰를 설계했다. 전쟁이 끝나고 30세가 된 크릭은 자신의 미래를 당시에 획기적인 발전이 이뤄지고 있는 생물학에 투입하기로 했다. 그는 그 중에서도 생명이 없는 원자들이 어떻게 생명을 만들어내고 생물들이 자신의 특성을 어떻게 후손에 전달하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으므로 자신이 해결해 보겠다고 생각했다. 당대에 크릭은 다소 괴짜로 불릴만했는데 그것은 물리학에서 생물학으로 전향한 극소수의 젊은이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1946년 크릭은 스트레인지웨이즈연구소에서 세포질의 물리적 성질을 연구하는 임무에 투입되었다. 그는 생명을 이해하기 위해 유전자의 분자 구조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크릭은 X선 회절을 이용해 단백질의 구조를 연구하기 위한 연구팀이 케임브리지 대학의 캐번디시연구소에 설립될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1949년 다시 대학원생이 되어 캐번디시연구소에서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배웠다.
한편 케임브리지 대학의 제임스 왓슨(James Dewey Watson)은 22살의 나이에 인디애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미국 정부 장학금으로 덴마크의 코펜하겐으로 갔다. 추후에 그는 덴마크로 가면서 생명의 비밀을 발견하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고 말했다. 고리따분한 학자로 그냥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당대에 DNA의 X선 회절 연구의 최전선에 있던 사람은 윌킨스와 프랭클린이었다. 그들은 런던의 킹스칼리지의 생물학부에서 연구하고 있었다. 1951년 봄 윌킨스의 강연을 들은 왓슨은 X선 회절 사진을 해석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워싱턴에 있던 국비장학사무국의 허락도 받지 않고 캐번디시연구소로 달려가 X선 결정학을 연구하는 일을 얻었다. 그곳에는 크릭이 1949년부터 일하고 있었다.
캐번디시연구소를 총괄하는 사람은 1915년에 X선 회절 연구로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자 윌리엄 로렌스 브래그(William Lawrence Bragg, 1890〜1971)였다. 캐번디시에서 왓슨이 맡은 과제는 근육 중에 있는 미오글로빈이라는 단백질의 복잡한 구조를 밝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윌킨스와 크릭처럼 왓슨 역시 X선 회절이 DNA 원자들의 배열을 밝히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크릭과 왓슨은 1951년 가을 처음으로 만났고 두 사람 모두 거대 분자 DNA에 큰 관심을 갖고 있음을 서로 확인했다. 크릭은 훗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왓슨과 나는 즉시 죽이 맞았다. 우리의 관심사가 놀랍게도 똑같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젊은 혈기의 오만함과 겁 없는 패기, 그리고 느슨한 사고를 싫어하는 기질 등이 맞아 떨어진 것도 크게 작용했다. 왓슨은 나보다 더 노골적이었지만 우리의 사고 과정은 매우 비슷했다.”
문제는 두 사람 모두 캐번디시연구소에 있지만 공식적으로 DNA를 연구하는 일을 맡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두 사람의 죽이 잘 맞았지만 크릭이 연구소장 브래그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런데 크릭과 왓슨이 킹스칼리지의 연구를 베끼려 한다는 정보가 브래그에게 들어갔다. 브래그는 두 사람을 불러 생명의 비밀을 찾는 비공식적인 연구를 중단하고 본연의 임무에 전념하라고 명령했다. 브래그의 명령을 듣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그들이 취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은밀히 작업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장애가 왓슨에게 닥쳤다. 1952년 1월 미국의 국비장학사무국이 왓슨이 코펜하겐을 떠나 캐번디시연구소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장학금과 급여 지불을 취소하고 즉시 미국으로 귀국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왓슨은 케임브리지가 마음에 든다면서 당장에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당당하게 답장을 보냈다.
그런데 그들을 낙담시키는 정보가 들어왔다. 앞에서 설명했지만 라이너스 폴링이 DNA 구조를 거의 발견했다는 소문이었다. 1952년 1월, 왓슨은 DNA물질을 찍은 X선 사진 음판을 현상했을 때 나선 자국을 발견했다. 크릭은 이를 보고 즉각적으로 DNA구조가 직선이 아니라 나선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러나 그들은 1952년 말까지 더 이상 진전을 볼 수 없었다. 나선이 얼마나 많은 가닥을 이루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 라이너스 폴링의 아들이 캐번디시연구소에 와 있었는데 그가 아버지의 논문 원고를 크릭과 왓슨에게 보여주었다. 폴링의 논문은 DNA구조를 3중 나선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미 3중 나선 개념을 갖고 씨름한 적이 있었는데 그 개념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포기한 상태이므로 폴링의 잘못된 결론에 다소 위안을 받았다. 문제는 폴링이 자신의 실수를 깨달으면 즉시 연구에 박차를 가해 올바른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폴링이 옳은 결론을 내릴 때까지의 시간이 얼마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결론과 문제점을 갖고 최후로 브래그에게 찾아가 단판을 했다. 폴링보다 앞서 DNA구조를 밝히려면 시간이 촉박하니 연구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는 것이다. 그들은 폴링이 자기의 실수를 알아차리는데 6주 이상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노벨상 수상자인 브래그가 그들의 설명에 동조하고 얼마간의 유예 시간을 주었다. 연구소장인 브래그가 그들의 DNA구조 분석에 대한 연구를 인정했으므로 두 사람이 맨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은 윌킨스와 프랭클린이 연구한 최신 결과를 얻는 것이다. 이때 윌킨스는 핵산 분자가 규칙성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뉴클레오티드와 뉴클레오티드 사이의 거리보다 훨씬 더 큰 간격으로 반복된다고 발표했다. 그 역시 핵산 분자가 어떤 특정적인 반복 형태가 나타나는 나선의 형태를 갖고 있다고 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행운의 여신은 왓슨과 크릭 편이었다. 그들이 어렵게 윌킨스를 찾아갔는데 윌킨스는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의 연구원인 로잘린 프랭클린(Rosalind Franklin)이 찍은 한 장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DNA분자를 세로로 내다본 사진으로 꼬여있는 두 갈래의 DNA 줄기와 그것의 중심을 수직으로 싸고 있는 염기의 그림자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 지름은 20Å, 염기와 염기의 간격은 3.4Å 정도였다. 왓슨은 그 당시의 일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입이 딱 벌어지며 심장이 마구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폴링과의 경쟁은 이미 끝난 셈이다. 두 사람은 곧바로 캐번디시연구소에서 이중나선모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설명을 들은 브래그 소장도 적극적으로 그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작업은 생각처럼 빨리 진행되지 않았는데 미국의 결정학자 제리 도나휴(Jerry Donahue)가 매우 귀중한 정보를 제공했다. 도나휴는 수소 결합과 아데닌은 티민, 구아닌은 시토신과만 결합하는 특별한 양자역학 이론을 알려주었다. 이 정보가 두 사람으로 하여금 올바른 이론의 방향을 잡게 만들어주었다.
그들은 도나휴의 조언과 프랭클린의 사진을 기초로 마치 회전 계단과 같은 모형에 당-인산의 두 뼈대는 분자의 바깥쪽에서 서로 꼬여 있고, 그 속에 수소 결합으로 연결된 염기쌍이 들어있는 2중 나선의 구조 모형을 발표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폴링이 이미 발표한 3중 나선 구조를 2중 나선 구조로 바꾼 것으로 폴링이 발표한 지 겨우 2개월 후였다.
이것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이래 과학 분야 중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라고 칭하는 2중 나선 구조의 발견이다. 그들의 발견은 생물학 전반에 혁명을 가져왔고, 유전 연구 부분을 완전히 뒤바꾸었으며 의학에서도 광범위한 발전을 일으키게 했다. 왓슨과 크릭은 이후 많은 자료를 토대로 DNA 특성을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① DNA는 2중 나선 형태를 갖고 있다.
② DNA 분자는 동일한 반경으로 되어 있다.
③ DNA 분자는 오른쪽 방향으로 돈다. 즉 DNA는 오른쪽으로 꼬여 있다.
④ DNA 분자는 역평형하다. 즉 두 사슬이 반대 방향으로 달린다.
⑤ DNA분자는 두 줄기로 당과 인산기를 골격으로 해서 만들어진다. DNA를 이루는 기본단위, 즉 당, 염기, 인산으로 이루어진 구조를 뉴클레오티드라고 부르므로 결국 DNA분자는 뉴클레오티드가 연속적으로 결합된 고분자화합물로 볼 수 있다. 각각의 뉴클레오티드는 매우 강한 공유결합으로 결합되어 있어 특정한 효소의 작용이 없으면 끊어지지 않는다.
⑥ 두 줄기의 DNA의 염기들은 반드시 아데닌(A)은 티민(T)과, 시토신(C)은 구아닌(G)과 짝을 짓고 수소결합을 한다.
DNA의 결합은 특별한 규칙에 의해 이루어진다. 즉 아데닌(A)은 티민(T)과 결합하고 시토신(C)은 구아닌(G)과 결합하며, 결코 다른 경우의 결합은 생기지 않는다. 상대편 DNA 골격에 매달린 염기의 순서는 반대쪽 염기순서의 음화와 같은 관계가 있는 것이다.
나선 구조를 지퍼로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염기는 지퍼의 이빨에 해당하고 당의 사슬은 이빨을 붙인 헝겊에 해당한다. 이 두 가닥이 서로 상호보완적이며 수소로 연결되어 있는데 두 가닥이 풀렸다가 각 염기의 수소 결합에 의한 친화력으로 원래 구조와 재결합하기도 한다. 이적이며, DNA가 자기 복제에 안성맞춤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이중 나선에서 풀려진 한쪽 염기의 배열법이 결정되면 자동적으로 다른 쪽 염기의 배열법이 정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나선구조가 풀리면서 각각의 기둥에 새로운 뉴클레오티드가 차례로 붙어 새로운 DNA를 만들면서 새로 생겨난 DNA는 원래 DNA를 정확하게 복제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생물체에서 분리되는 DNA의 구조는 X선 회절 및 화학적 구성으로 보아 서로 비슷하며 생물체 전반에 걸쳐 보편적인 유전물질임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같은 종의 개체들 사이에 있는 차이점과 다른 생물들의 개체 사이의 차이도 모두 DNA분자 안에 연결된 4개의 염기 총 수와 다양한 조합에 의해 결정된다.
크릭은 자신들의 발견으로 유전 분야에서 획기적인 발전이 이루어질 것을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장담했다. 그의 장담은 사실이 되어 수많은 과학자들이 이를 해석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의 발견의 중요성은 단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오늘날 새로운 바이러스 게놈의 전체 염기 서열이 발견되어 사스(SARS) 같은 발생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다. 운이 좋으면 언젠가 마찬가지로 유행성 독감을 막을 것이다. 우리는 게놈과 진화 계통수를 그릴 수 있으며 범죄 현장을 조사하고 남아 있는 DNA를 이용해 누가 거기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식물을 더 건강하게 개조할 수 있고 효모균을 이용해 중요한 약을 만들 수 있다. 왓슨과 크릭의 DNA 구조 설명이 없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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