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의 기초를 이룬 연금술>
1천여 년을 걸려 금을 만들려고 했던 노력이 모두 헛된 것은 아니다. 금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연금술 과정에서 여러 가지 발견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만물이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원자라는 알갱이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도 도출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현대과학이 발전되기 시작한 또 하나의 계기라 볼 수 있다.
물론 만물이 원자로 되어 있다는 것은 그리스 시대부터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의 데모크리토스가 내세운 원자론은 철학적이면서도 모호했고 에피쿠로스가 다시 거론했지만 소수인들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원자론이 ‘허공’ 개념과 연관되었다는 이유로 철저히 부정되었다. 여하튼 그리스 과학은 서로 다른 다양한 현상들을 연관 짓는 원리나 법칙을 갖추지 못한 경험과학에 불과했기 때문에 과학시대로 들어가자 더 이상 논거의 대상이 아니었다.
17세기에 들어서자 데카르트가 탄생하지만 그 역시 토리첼리(Evangelista Torricelli)의 진공실험을 알고 있었음에도 진공 또는 허공의 개념을 부정했다.
그런데 가생디(Pierre Gassendi)가 1649년 그리스 원자론을 다시 부활시켰다. 그는 원자들의 성질이 형태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했고 원자들이 허공 속에서 떠돌아다니고 있으며 원자들 사이에는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토리첼리의 진공실험의 영향이었다.
이런 가운데서 보일(Robert Boyle), 샤를(Jacques Charles), 캐번디시(Henry Cavendish), 셀레(Karl Wilhelm Scheele), 라브와지에(Antoine Laurent de Lavoisier) 등에 의해 연금술은 화학이라는 이름으로 변하며 황금을 쫓는 몽상가의 연구가 아닌 과학의 중요한 일부분으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한다.
셀레는 특이한 사람인데다 기막힐 정도로 운이 없었던 사람이다. 실험기자재도 구입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약사였지만 놀랍게도 염소, 플루올, 망가니즈, 바륨, 몰리브데넘, 텅스텐, 질소, 산소 등 여덟 가지 원소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 업적을 하나도 인정받지 못했다. 특히 그는 공기가 단일 원소가 아니라 연소를 도와 주는 공기인 산소와 연소를 방해하는 공기인 질소의 혼합물이라고 주장하고 산소와 질소의 존재비는 1 대 3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암모니아, 글리세린, 타닌산처럼 유용한 화합물을 발견했고 염소를 표백제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아낸 최초의 과학자였다.
그런데 그의 유일한 단점은 그가 사용하던 모든 물질을 직접 맛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당대에 많이 사용된 수은은 물론 독성이 강한 청산(靑酸)도 맛보아야 했다. 셀레는 결국 그의 고집 때문에 겨우 43세에 실험실에서 사망했는데 한 가지 위안은 그의 업적을 현대인들은 알고 있다는 점이다.
물질의 본성에 관한 논쟁은 점차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화학자들이 주도하기 시작했고 실험, 면밀한 관찰 등을 통한 연구로 방향이 옮겨가기 시작했다.
프랑스인 라부아지에는 모든 물질이 고체, 액체, 기체라는 세 가지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그는 기체가 물질이라는 것을 암시함으로써 공기가 질량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체들의 혼합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르는 길을 열었다. 마침내 두 가지 주요 기체인 산소와 질소가 섞인 것이 공기라는 사실을 보여 준 이도 라부아지에였다. 그는 화합물이 원소로부터 어떻게 형성되는지 처음으로 분명하게 설명했다.
이제 원자 개념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소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이것을 어떤 식으로든 원자와 연결할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다. 사람들은 공기를 포함해 물질이 원자로 구성돼 있다면 모든 원자는 반드시 똑같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공기 중 각 기체의 원자들이 서로 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사람이 돌턴(John Dalton)으로 그가 근대 원자설의 토대를 마련하면서 화학은 새로운 길로 들어선다.
존 돌턴은 1766년 9월 영국 레이크디스트릭트 연안에 있는 코커마우스라는 마을의 퀘이커교도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민첩하고 호기심 많은 소년으로 그의 나이 열두 살에 인근 학교의 선생님으로 학생을 가르칠 정도로 똑똑했으며 열다섯 살에 캔들의 기숙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그곳에서 맹인 철학자 존 고프가 돌턴에게 수학과 자연과학을 소개했다. 돌턴이 첫째로 종사했던 과학적 업무는 기상관측이었다. 그는 15년에 걸쳐 20만 건이 넘는 관측 일지를 썼다.
이 업적으로 돌턴을 ‘화학의 아버지’와 ‘기상학의 아버지’로 부르기도 한다. 돌턴이 당대의 학자들과 다소 다른 것은 항상 자신이 직접 관찰한 것만 믿으려 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당연하다며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동안 나는 다른 사람의 연구 결과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가 종종 오류에 빠지곤 했다. 따라서 가능한 한 조금 쓰되, 실제 경험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을 쓰기로 했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는 특별히 뛰어난 관찰자도 아니었고 똑똑한 실험과학자도 아니었지만 회의적인 기질과 통찰력 있게 전체를 살펴볼 줄 아는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신이 생각하는 의문을 해결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온도 저하로 인해 공기가 수증기를 붙잡아 두는 능력이 떨어지면서 대기의 수분이 비로 변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1788년 북극광을 목격한 후 오로라가 지구의 자성에 의해 생겨난다는 놀라운 결론도 유도했다.
그 자신이 색맹이었기 때문에 처음으로 색맹을 과학적으로 연구했다. 특히 자신이 색맹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자신이 죽으면 눈을 조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자신의 눈의 체액이 파랗기 때문에 색맹이 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검시 결과 체액은 정상이었다. 1990년대에 150년간 왕립연구소에 보관되어 있던 그의 눈에 대한 DNA 실험을 통해 녹색을 감지하는 데 필요한 색소가 부족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여하튼 1800년대 초에 돌턴은 그를 세계적인 학자로 만들어 준 원자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그는 전임교사직을 포기하고 맨체스터에서 중산층 자녀들의 개인 교사로 일했다. 당대의 개인 교사는 수입도 나쁘지 않고 과학 연구에 필요한 시간도 많이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돌턴이 원자론을 전개한 가장 초창기의 논문들은 기압에 대한 연구 및 물 흡수에 기압이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에 관련이 있다. 기상 관측학자로서의 그의 전문 분야를 십분 발휘한 것으로 공기가 물처럼 화합물이라고 확신했다. 또한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물은 왜 비슷한 종류의 모든 기체를 자신의 부피만큼 받아들이지 않는가? 나는 이 질문에 대해 충분히 심사숙고했으며 완전히 만족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납득할만한 답을 얻었다. 답은 그 상황이 몇몇 기체들의 무게와 기본 입자들의 수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1803년 10월 21일 맨체스터 학회에서 한발자국 더 나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물체의 기본 입자들의 상대적인 무게에 대한 연구는 내가 아는 한 완전히 새로운 주제다. 최근 나는 이 연구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각 원소의 원자들이 매우 간단한 비율로 합쳐져 화합물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각 원자의 무게는 화합물 속에 들어 있는 각 원소의 무게를 이용해 계산해 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나중에 ‘배수 비례의 법칙’으로 불린다.
과학사가들은 돌턴이 근대 원자설의 토대를 마련하면서 화학은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고 평가한다. 돌턴이 원자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기체의 부피와 압력 사이에는 반비례하는 관계가 있다고 한 보일의 법칙을 이해하기 시작해서부터이다. 그의 기체 연구는 샤를르로 하여금 샤를르의 법칙을 발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샤를르 법칙은 기체의 부피는 온도가 올라가면 늘어나고 온도가 내려가면 줄어든다는 내용이다.
돌턴은 기체의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기체의 본성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도 관심을 기우렸다. 그는 A기체와 B기체를 섞으면 A기체 원소 사이에는 반발력이 작용하지만 A기체 원소와 B기체 원소 사이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했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분압의 법칙을 발견했다. 여러 가지 원소가 섞여 있는 기체의 총 압력은 같은 부피의 용기에 각각의 원소만 있을 때의 압력을 합한 것과 같다는 것이 ‘분압의 법칙’이다. 돌턴이 주장한 원자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자연계의 모든 물질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자로 이루어졌다.
② 모든 화학 반응은 원자가 결합 또는 분리되는 현상이다.
③ 무(無)로부터 생기는 것은 없으며 존재하는 것은 소멸되지 않는다.
④ 원자에는 그 때까지 알려진 원소의 수만큼의 종류가 있다.
⑤ 같은 종류의 원자는 형태, 크기, 무게가 같은 동일한 입자이고 다른 중류의 원자는 특히 무게가 다르다.
⑥ 같은 종류의 화합물을 이루는 원자는 같으며 화합물은 같은 수의 원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다.
⑦ 화합물의 정량 분석으로 원자량과 분자식 중 하나를 알면 다른 하나를 알 수 있다.
⑧ 두 가지 원자가 결합하여 하나의 화합물을 만들 경우 화합물은 원자 한 개씩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⑨ 기체를 이루는 입자는 단체(한가지 원소로 이루어진 분자)이면 개개의 원자이고 화합물이면 복합원자다.
⑩ 원자 및 복합 원자는 열소의 원자군에 둘러 싸여있다.
그러나 돌턴의 원자론에는 기본적으로 결함이 있었다. 그는 같은 원소의 원자들이 결합할 수 있다는 사실은 몰랐기 때문에 원자들의 화합물(분자)에는 각 원소의 원자가 하나만 있다고 가정했다.
이탈리아의 아메데오 아보가드로(Amedeo Avogadro)가 분자의 비율을 이용해 원자량을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후 반세기가 흘러야 했다.
그의 원자 가설은 그후 많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여러 부분이 수정되고 보완되었다. 19세기 말 방사능이 발견되어 원자도 분해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져 원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다고 한 것은 틀린 것이다. 그러나 화학 반응을 원자의 결합과 분리로 파악한 것은 탁월한 통찰력이었다.
돌턴은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사교 활동도 하지 않았으며 시간을 온통 학생들과 과학 연구를 위해 바쳤다. 1810년 왕립학회회원으로 초청되면서 그는 과학적 업적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회원으로서 부담해야 하는 돈이 없어 그 제안을 거절했지만 1822년 왕립학회는 그를 회원으로 선출하고 회비를 대신 내 주었다. 프랑스학술원은 그를 유일한 외국인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평생 과학 연구에만 투입하여 맨체스터 학회에 수백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1817년 회장으로 선출되어 평생 그 자리에 있었다. 78세의 나이에 뇌졸중으로 사망했을 때 4만 명이나 되는 맨체스터 시민들이 참석하여 가히 국장이라 부를만한 장례식을 거행했다.
<계속 업그레이드되는 원자론>
돌턴의 원자론은 스웨덴의 베르셀리우스(John Jacob Berzelius)에 의해 보다 업그레이드된다. 그는 돌턴의 원자론을 지지하면서 전기적으로 양성인 원자와 음성인 원자가 결합해 화합물을 만든다고 생각했다. 베르셀리우스는 2000개의 서로 다른 화합물을 연구해서 원소들의 결합 비율을 측정했는데 이는 돌턴의 원자론을 증명하는데 사용되었다. 이 당시까지 미세한 원자들의 질량을 잴 수 있는 기술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는 셀렌, 토륨, 리튬 같은 몇 가지 새로운 원소들을 분리해냈으며 유사한 화학적 특성을 지닌 원소들을 한데 묶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편 1815년 영국의 프라우트(William Prout)는 모든 원자가 서로 다른 수의 수소원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제안했다. 화학자들이 화학원소의 원자량을 측정한 결과 원자량들은 모두 수소 원자량의 정수배에 가깝다는 것을 발견했다. 프라우트의 가설에 의하면 모든 원자들은 공통적으로 수소원자를 가지고 있으며 원자들의 차이는 단지 그 수만 다를 뿐이었다.
원자에 대한 이론이 계속 제공되자 이에 상관되는 연구가 계속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탈리아의 화학자인 아보가드로(Amedeo Avogadro, 1776~1856)가 드디어 같은 부피의 기체는 같은 수의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가설을 발표하여 원자설을 기체에 적용시켰다.
처음에는 아보가드로의 가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그의 가설로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문제란 수소 1부피와 염소 1부피가 결합하면 2부피의 염화수소가 만들어진다. 그의 가설이 옳다면 수소 100개와 염소 100개가 결합하여 염화수소 200개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것이 가능하려면 수소와 염소 원자는 화합과정에서 2개로 분열해야만 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아보가드로는 수소와 염소가 2개의 원자가 결합된 2원자 분자라고 설명했지만 같은 원자끼리는 반발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견해였으므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학자들의 관심은 한 가지에 몰렸다. 여러 종류의 화합물들은 어떻게 조성되었는가를 규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원자들의 상대적인 무게를 측정하면 알 수 있다. 즉 원소의 원자량을 밝히면 되었다.
이탈리아의 칸니차로(Stanislaro Cannizzaro, 1826~1910)가 보다 간단한 기준치로서 산소의 질량을 제안하자 베르셀리우스가 제시한 원자량을 결정하는 방법은 곧바로 사장되었다. 그는 기체의 분자량은 수소 원소를 1로 하여 결정한 원자량의 2배라는 것을 밝히고 그 이유는 기체의 분자가 두 개의 원자로 이루어졌으며 다른 기체 또는 화합물은 같은 온도, 같은 부피, 같은 압력에서 같은 수의 입자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설명은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에 아보가드로의 가설이 비로소 인정받게 된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원소들은 모두 어려운 실험과정을 거쳐가면서 하나씩 그 원자량이 정해졌다. 수소 원자의 무게를 임의적으로 1이라고 정한 뒤 이를 기준으로 다른 원소들의 원자량이 정해졌다. 즉 산소의 원자량이 16이라는 것은 산소원자(O)가 수소원자(H)보다 16배 더 무겁다는 것이다. 산소는 여러 가지 원소들과 쉽게 결합하므로 기준치로 정하는데 유리하였다. 곧바로 산소의 원자량이 16으로 결정되었고 가장 가벼운 원소인 수소의 원자량은 대략 1(정확히 1.0080)로 결정되었다.
또 물을 전기분해하면 수소 2부피와 산소 1부피가 생성되기 때문에 물을 ‘H2O'로 표기하기로 했다. 염소의 질량을 분석해보았더니 수소 1그램의 기체가 35그램의 염화기체와 결합했고 이를 반대로 해도 동일한 부피의 수소와 염소가 생성되었다. 그래서 염소원자의 질량은 35가 되고 염화수소는 ’HCl'로 표시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사람들은 서서히 원소들의 정확한 원자량에 접근해가고 있었다.
칸니차로 이후 화학자들은 원자량을 더 정확히 계산하는 방법을 탐구하였고 1904년에 미국의 화학자 리차드(Theodore William Richards)는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정확도로 원자량을 결정했다. 이 연구로 그는 1914년에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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