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조원소, 옥타브의 법칙>
인간이 원소라는 개념을 창안한 이후 현재까지 알려진 원소를 발견하기까지의 과정과 그 결과를 나열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인류의 오랜 경험이 쌓이고 쌓이면서 구리, 금, 은들을 찾아 낸 이후 이들 외의 수많은 자원들의 생산과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화학은 원자론의 기초 위에 올라서게 되고 보다 정밀한 근대과학으로 발전한다.
이는 과학자들로 하여금 세상에 있는 거의 모든 물체를 분석하도록 유도하여 1815년에 41종의 원소가 알려졌고 1818년 49종, 1850년 59종, 1869년에는 63종이 알려졌다. 특히 화학자들은 원자론의 입장에서 물질의 구조를 해명하기 시작했고 유기화학의 등장으로 더욱 세분된 과학 분야의 하나 독자적인 과학으로 화학이 등장한다.
학자들의 원소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어 대부분 원소들의 원자량을 비롯하여 가장 기본적인 성질들이 규명되었지만 이들 원소들의 특성이 너무 달라 이들 원소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산소, 수소, 염소, 질소와 같이 기체 상태로 존재하는 것도 있고 수은과 브롬 같은 원소들은 정상 조건에서는 액체 상태로 존재했으며 나머지 원소들은 고체 상태로 존재했다.
백금이나 이리듐처럼 단단한 금속이 있는가하면 나트륨과 칼륨처럼 무른 금속도 있었다. 리튬은 금속인데도 물에 뜰 수 있는가 하면 오스뮴은 물의 22.5배에 달하는 무거운 금속이었다. 연금술사들이 애용하던 수은은 금속의 속성을 지니지만 고체 상태가 아니라 액체 상태로 존재했다.
오늘날의 정의에 따르면 하나의 원자는 하나의 원소에 속한다.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결합된 다양한 종류의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즉 어떤 원소들은 산소 원자 하나와 결합하지만 어떤 원소들은 산소 원자 두 개, 세 개 이상과 결합한다. 그러므로 이들 원소들 간에 어떤 질서가 있는지를 파악한다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학자들은 지구 상에서 발견되는 원소들 간에는 분명히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원소를 체계적으로 분류하려는 시도는 영국의 화학자이자 물리학자로 잘 알려진 존 돌턴부터 시작된다. 그는 1803년에 물질은 무게가 서로 다른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또 물질은 간단한 무게비로 결합된다고 주장했다. 그를 근대 자연과학의 선구자라고 평가하는 이유이다.
각 원소들의 원자량을 확인하는 방법론이 제시되자 화학자들은 원자량 간의 상관관계에 도전했다. 그것은 원소를 공유하는 물질 사이에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특성상의 유사성이 구조의 유사성까지 나타내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1817년 독일의 화학자 요한 되베라이너(Johann Wolfgang Döbereiner, 1780~1849)는 스트론튬의 원자량이 이것과 화학적 특징이 유사한 원소인 칼슘과 바륨의 원자량 중간에 위치해 있음을 알았다. 또한 할로겐인 염소, 브롬, 요오드 등 세 개의 원소가 비슷한 성질로 묶일 수 있다는 것을 파악했고 알칼리 금속인 리튬, 나트륨, 칼륨 세 개 원소 역시 비슷한 성질로 묶일 수 있다는 것을 파악한 후 자연은 삼조원소(三組元素)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즉 가운데 원소의 화학적 성질은 다른 두 원소로 추정할 수 있다. 이를 보면 주기율표의 최후의 승자인 멘델레예프가 알려지지 않은 원소로 간극을 메울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지만 되베라이너가 먼저 생각한 것은 사실이다. 여하튼 그의 주장은 당대에 크게 각광을 받지는 못했지만 학자들의 주목을 받았고 계속적인 연구에 의해 화학적 관계 유형이 세 개에만 국한되지 않고 더 큰 그룹 즉 족(族)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제 학자들은 화학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유사한 특성을 나타내는 원소의 순서를 생각하기 시작했고 이것을 주기율표라고 부른다.
주기율표를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은 프랑스의 지질학자 드 샹쿠르투아(A. E. Beguyer de Chancourtois)이다. 그는 1862년, 원소의 특성은 원자번호의 특성이라며 원자량 순으로 원소 목록을 원통에 그려 넣었다. 또한 그는 원소의 특성이 일곱 번째 원소마다 반복된다는 것을 처음으로 발견했고 이들 반복은 ‘주기성’을 뜻한다.
드 샹쿠르투아의 주기율표는 이온과 화합물도 원소를 취급했다는 점에서 큰 결함이 있었는데 1865년 설탕 정제업자이자 아마추어 화학자인 뉴런즈(John Newlands)가 간단한 물리적 특성을 기초로 56개의 원소들을 11개의 족으로 분류했는데 이를 ‘옥타브의 법칙’이라고 한다.
그의 주장은 원소들의 원자량을 여덟 단위로 끊어 원소들을 유사한 쌍으로 묶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옥타브의 법칙을 같은 족에 속해 있는 원소들은 옥타브가 같은 음들처럼 유사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의 서투른 발표 방법과 아마추어라는 사실 때문인지 뉴런즈는 학계로부터 비웃음과 놀림거리였다. 어떤 화학자는 그에게 원소들로 한 곡조를 연주해 줄 수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또 다른 학자는 그의 체계가 우연을 기초했음이 분명하다며 원소들을 알파벳 순서로 손쉽게 배열하는 것이 어떠냐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이들은 누구도 뉴런즈가 원소를 배열하는 유용한 표의 발전에 근접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엄밀하게 말해 그의 체계는 다소 오류가 있지만 시간과 격려만 있었더라면 뉴런즈는 주기율표에 관한 제반 문제점들을 해결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당대 학자들의 냉소적인 반응에 크게 낙담하여 화학에서 영원히 손을 뗐다.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인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박탈한 것이다.
<러시아 황제를 위한 과학>
지구 상에 있는 원소들을 간단명료한 주기율표 속에 넣는다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님을 이해할 것이다. 인류사를 보면 어려운 일이 있으면 꼭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느끼는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주기율표에 관한 한 그 어려운 작업을 한 사람은 외견상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학자상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외모에 신경 쓰지 않아 ‘머리카락이 모두 제각각으로 뻗어 있었다’고 알려졌고 1년에 한 번 정도 머리를 깎고 수염을 손질할 정도였다.
그의 이름은 러시아의 멘델레예프(Dmitri Ivanovich Mendeleev)이다. 190센티미터나 되는 거구인데다 그의 외모는 결코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는 탁월한 과학자이자 철학자였고 이상주의를 신봉하는 정치운동가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학문은 러시아 황제를 위한 것이라고 표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멘델레예프는 영웅적인 개척자 집안 출신이었다. 그가 출생하기 1세기 전 피터 대제는 러시아를 서구화하기 시작했으며 1787년 시베리아의 토볼스크에서 트미트리의 할아버지는 최초로 인쇄소를 열었으며 시베리아 최초의 신문 <이르티시(Irtysch)>를 발간했다.
1834년 2월 7일, 멘델레예프는 토볼스크에서 부유한 유리공장 주인의 딸인 마리아 드미트리예브나 코밀리예프와 덕망 있는 교장선생인 이반 파블로비치 멘델레예프의 열일곱 명(자료에 따라 11, 13, 14명)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러시아의 토볼스크는 익명높은 시베리아 유형지의 중심지였다. 유형이라 해도 간단한 감시만 있을 뿐 시내를 왕복하는 것도 자유였다. 유형자들은 거의 모두 로마노프 체제에 반대하여 체포된 인텔리 계층으로 멘델레예프의 부모는 정치범들을 가정교사로 초빙하여 학교 수업 이외의 영재교육을 시켰다. 당대 ‘육체만을 위해 사는 것은 무의미하다’라고 가르쳤던 어머니는 교육열이 높은 신세대 여성이었다. 그러나 토볼스크에서 멘델레예프의 가족이 비교적 상류층이라 해도 매우 가난하여 멘델레예프의 형제자매 중에서 공부할 여유가 있던 것은 막내인 멘델레예프 정도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두 눈을 실명하고 교직에서 물러나자 어머니가 친정에서 물려받은 유리 공장을 물려받아 가사를 이끌어나가면서 아이들의 교육을 책임졌다. 그러나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하던 아버지가 사망하고 유리 공장마저 원인 모를 화재로 타 버리자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독립한 다른 아이들은 놔두고 막내아들 드미트리가 러시아 최고의 교육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이미 57세 임에도 가산을 정리하여 멘델레예프와 그의 누나 엘리자베스와 함께 장장 6,000킬로미터의 장거리 여행을 시도하여 모스크바 대학에 입학 허가를 신청했다. 그런데 대학에서는 멘델레예프가 시베리아 출신이므로 허가하지 않았다. 모자는 이에 굴하지 않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김나지움에 입학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의 입학 준비를 했고 결국 입학에 성공했다. 그의 어머니는 멘델레예프의 학업 뒷바라지에 전력을 다한 후 그가 입학에 성공하자 10주 뒤 세상을 떠났다. 얼마 뒤 멘델레예프의 누나도 폐결핵으로 숨을 거뒀다. 한마디로 멘델레예프는 그 자신이 부모님의 유물이었다.
그는 대학 3년에 결핵에 걸렸는데 의사는 그가 2년밖에 살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멘델레예프는 자신의 야망을 이룰 때까지 죽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고작 스물한 살이었고 의사의 선고와는 달리 건강을 회복했고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여 금메달을 받으면서 교사 자격을 얻었다. 그가 줄곧 결핵에 시달렸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런 성취는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멘델레예프는 시골인 크리미아로 내려가 중학교 교사로 2년을 지냈는데 이때 건강을 회복했고 국비유학생 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1857년에 프랑스로 건너가 루뉴 교수로부터 화학을 공부하였고 이어서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연구를 계속하여 그곳에서 유명한 과학자인 로베르트 분젠, 스타니슬라오 카니차로, 구스타프 키르히호프 등의 지도를 받았다. 특히 하이델베르크에서 화합물의 성분 분석에 많이 사용하는 분광기의 사용법을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은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분광기를 활용하여 모든 원소들을 색으로 검출하는 실험을 수행했다. 또한 그들로부터 그는 주기율표가 화학계가 가장 필요하다는 것을 듣고 자신의 첫 번째 일이 주기율표 작성이라고 목표를 정했다.
1866년에 러시아로 돌아온 멘델레예프는 알코올과 물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페테르부르크 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대학교에서 무기화학 분야의 강의를 맡게 되자 자신의 강의에 사용할 적당한 교재를 찾을 수 없자 자신이 직접 교재를 집필했다. 그것이 1868년에 발간된 500여 페이지의 유명한 『화학원론』인데 그는 단 2달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그는 이 책으로 도미도프상을 수상했고 생전에 8판이나 찍었다.
그가 다방면에 소질이 있고 열정적이었다는 것은 화학에만 그의 관심을 집중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과학으로 인간 생활에 얽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역설하면서 농작물의 질과 생산성을 높이려는 실험을 했다. 또한 러시아의 석유자원이 외국 자본에 의해 착취되고 있으므로 러시아는 러시아의 이익을 위해 석유자원을 개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사생활은 구설수 일색이었다. 추후의 일이지만 1882년 조카딸의 친구인 안나 이바노파 포포바라는 어린 여자와 결혼하려 했는데 교회는 그의 결혼을 반대했다. 러시아 정교회법은 이혼 후 7년 동안은 재혼할 수 없도록 금했다. 그는 신부를 매수해 간단하게 결혼식을 올렸지만 정교회법상 멘델레예프는 공식적으로 중혼자였다. 더구나 그의 결혼을 주재한 신부가 성직을 박탈당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1904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윌리엄 램지(Sir Willian Ramsay)는 자줏빛 염료를 발견한 윌리엄 퍼킨(William Perkin)을 기념하는 만찬에 참석하기 위해 런던에 도착했을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내가 만찬 장소에 너무 일찍 도착하여 참석 예정자들의 이름을 살피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머리칼이 제멋대로 헝클어진 좀 별난 외국인이 다가와서 인사를 했다. 내가 ‘참석자가 꽤 있을 것 같죠?‘라고 말하자 그는 영어를 할 줄 모른다고 말했다. 내가 독일어로 혹시 독일어를 아느냐고 묻자 그는 약간이라고 대답하면서 멘델레예프라고 말했다. 우리는 또 다른 참석자가 나타 날 때까지 약 20분 정도 공동의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꽤 괜찮은 친구였으나 완벽한 독일어를 구사하지 못했다. 그는 동 시베리아에서 자라 17세가 될 때까지 러시아어를 몰랐다고 한다. 내 생각으로 그는 칼무크인이나 혹은 비슷한 종류의 외지인으로 여겨진다.’
이 외지인이 바로 세상의 주목을 받던 러시아의 예언자 멘델레예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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