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의 성질에 관한 이론이 어느 정도 정립되자 학자들은 미소세계에 대해 더욱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원자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아내는 일이었다.
1903년 일본의 도쿄대학교에서 나가오카 한타로 나카오카(長岡半太郞, 1865~1950)는 토성 원자모형을 발표했다. 하지만 양전하가 중앙에 있고 그 주위를 전자들이 고리 모양으로 돌고 있는 토성 원자모형은 역학적 불안정성 때문에 발표되자마자 심한 비판에 부딪혀 폐기되었다. 전하를 가진 전자가 원자 내에서 궤도 운동을 한다면 전파를 발생하게 마련이며 결국 순식간에 에너지를 잃고 핵으로 떨어지고 만다는 설명이다.
J. J. 톰슨은 그가 발견한 전자와 수소이온을 바탕으로 1904년에 원자의 모형을 제시했다. 이 당시 이미 전자의 실체가 알려졌고 천연방사능의 연구에 의해 원자에서 음전하를 띤 전자와 양전하를 띤 양성자가 방출된다는 사실도 알려져 있었으므로 원자가 전자와 양성자로 이루어졌다고 가정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톰슨의 모형은 양전하가 고루 퍼져 있는 입자에 음전하를 띤 전자가 여기 저기 박혀서 전기적으로 중성인 입자를 이루는 것이었다. 즉 원자(푸딩)는 전자(건포도)들이 그 속에 여기저기 박혀 있는 물렁물렁한 고체로 생각되었다.
<보완되는 원자 모형>
원자의 질량이 원자를 이루는 공간에 골고루 퍼져 있다는 톰슨의 모형에 이의를 달고 새로운 원자모형을 제시한 사람이 러더퍼드이다. 러더퍼드는 원자의 질량이 원자를 이루는 전체 부피에 골고루 퍼져 있다는 톰슨의 원자모형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발견했다.
1910년에 러더퍼드는 알파 입자 빔을 매우 얇은 금박으로 만든 화면 위에 겨냥했다(금박을 사용한 가장 큰 이유는 금이 이 세상에서 가장 얇은 박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러더퍼드는 모든 알파 입자들이 원자 푸딩을 통과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험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1만 개에 한 개골로 알파 입자가 거꾸로 튀어 나왔다.
러더퍼드는 큰 충격을 받았다. 전자의 질량은 알파 입자의 질량보다 8천 배나 작은데다 또 초속 1만 마일의 속도로 발사되었기 때문에 백만 개 중에서 하나라도 튀어나오길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커다란 각도로 산란되는 것을 여러 개의 양성자 입자에 의하여 반복 산란한 결과라고 생각하기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다. 이 당시의 상황을 러더퍼드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내 생애에서 일어난 일 중에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15인치 포탄(38센티미터)을 화장지에다 대고 쐈더니 되튀어 나와 포탄을 쏜 사람을 맞힌 것과 같다.’
그는 실험 결과를 설명할 방법을 드디어 찾아냈다. 원자의 대부분의 질량은 아주 작은 부피에 모여 양전하를 띠고 있고, 그 주위를 음전하를 띤 전자들이 둘러싸고 있다면, 금박을 이루고 있는 원자들이 알파 입자를 산란시킬 만큼 충분히 단단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리고 8,000개의 입자 가운데 약 한 개만이 도로 튀어 나왔기 때문에 이 ‘핵’은 원자 전체보다 약 8,000배는 작은 것이 틀림없다. 원자의 나머지는 빈공간이어서 다른 입자들이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러더퍼드는 1911년 일본의 물리학자 한타로에게 자신이 생각한 원자모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저는 이런 원자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중심에는 전하량이 ‘ne’ 즉 전자 ‘e'에 정수 ’n'을 곱한 것이 있고, 그 주위를 반대 전하가 둥그렇게 감싸고 있습니다. 원자반경에 해당하는 두께만큼 감싸여 있는 것입니다.‘
러더퍼드는 한타로가 1903년에 주장한 ‘토성’ 모양의 원자설을 인정하는 의미로 보낸 것이다. 러더퍼드가 생각하는 원자모형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한타로는 한가운데 양성을 띠는 핵이 있으며 그 주위를 전자들이 토성 고리처럼 궤도를 따라 돌고 있다. 한타로와 러더퍼드가 다른 것은 러더퍼드는 핵이 매우 작다고 생각한 반면 한타로는 상당히 크다고 생각했다. 러더퍼드는 알파입자가 산란하는 실험을 통해 핵의 크기가 텅 빈 원자의 한가운데 찍힌 ‘점’만하다고 확신했다.
추후의 실험에서 원자핵은 원자 지름의 약 10만 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보다 정확한 표현은 지름 10-15미터인 핵이 지름 10-10미터의 전자구름 속에 박혀 있어서 마치 종합운동장 가운데 모래 한 알이 있는 것과 같다. 여하튼 러더퍼드는 이런 결론을 토대로 원자 전체에 비해 아주 작은 크기를 가진 핵에 원자의 질량 대부분이 몰려 있고 나머지 부분은 거의 진공으로 되어 있으며, 이곳에서 전자가 원자핵을 돌고 있는, 태양계를 축소한 것과 같은 새로운 원자모형을 제시했다.
러더퍼드의 원자모형은 엄밀한 의미에서 한타로의 토성 원자모형을 다시 부활시킨 것이다. 그의 원자모형은 원자핵의 존재를 최초로 제시한 것으로 그는 원자핵이 가지고 있는 전하량이 그 원소의 원자번호의 수와 비례한다는 것도 밝혔다. 그러나 그의 모형도 전자기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중대한 결함을 갖고 있었다. 전하를 띤 입자가 가속도운동을 하면 전자기파를 발생시킨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핵의 주위를 돌고 있는 전자들의 운동은 가속도운동이므로 끊임없이 전자기파를 방출해서 점점 에너지를 잃고 원자핵으로 떨어져야 했다. 더구나 실험에 의해 결정된 원자량은 양성자의 질량에다 원자번호를 곱한 값보다 훨씬 큰 값이었다. 반면에 원자핵의 전하량은 양성자 하나의 전하량에 양성자의 수를 곱한 값과 같았다. 이것은 원자핵에 양성자 외에 다른 입자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지만 학자들은 이를 납득하지 않았다.
러더퍼드는 라듐으로부터 방사되는 방사선의 성질을 연구하여 이것이 알파, 베타, 감마 세 종류의 방사선을 포함하고 있음도 밝혔다. 러더퍼드는 알파선은 자기장에서 음극 쪽으로 휘므로 양전하를 띠고 베타선은 음전하를 띠는 입자이며 감마선은 자기장에 휘어지지 않아 전자기파라는 것을 확인했다.
러더퍼드의 이 분야 연구는 마리 퀴리보다 앞선다. 1897년 러더퍼드는 우라늄화합물에서 나오는 신비한 방사 효과를 연구 주제로 삼는다. 피에르 퀴리처럼 그도 전기방전 장비로 방사능을 측정했는데 우라늄 시료를 알루미늄 박막으로 덮고 방사능을 측정하자 우라늄의 방사 세기가 약해지는 현상을 발견했다. 계속해서 알루미늄 박막을 덧씌웠더니 방사능도 계속해서 감소했는데 박막 층이 일정 개수에 도달하면 더 이상 차이가 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 이상에서는 방사능이 일정했다. 러더퍼드는 박막이 어느 한 유형의 방사능은 흡수하며 또 다른 유형의 방사능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1899년 러더퍼드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 실험결과로부터 우라늄의 방사현상이 복합적임을 알 수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적어도 두 종류의 방사현상이 존재한다. 하나는 즉시 흡수되는 방사능으로 ’알파방사‘라 부르며 다른 하나는 투과성이 있는 방사능으로 ’베타방사‘라고 부른다.’
러더퍼드는 세 번째 유형의 방사현상이 감지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뚜렷이 알지 못한다고 적었다. 제3의 방사선이 바로 감마선이다.
그가 이들을 발견한 것은 X선과 마찬가지로 방사능도 공기를 통과할 때 이온을 생성한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X선과는 달리 두 가지 즉 알파, 베타로 명명된 서로 다른 선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알파선은 많은 양의 이온을 만들어 냈지만 표면에 쉽게 흡수되었다. 베타선은 이온을 적게 만들었지만 투과력이 뛰어나 50분의 1밀리미터 두께의 알루미늄 포일을 통과할 수 있었다. 러더퍼드는 이 선들이 사실은 미세한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추측했고 이것이 추후에 방사능 연구에 획기적인 선을 긋게 만든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설명한다.
러더퍼드의 중요성은 방사능 물질의 변환이라는 개념을 정립하였다는 점이다. 토륨에서 나오는 기체의 방사성 물질을 연구해서 우라늄 및 토륨 따위의 원소들은 방사성 붕괴 시에 자발적으로 다른 중간 원소로 전환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각 중간 원소들은 일정한 속도로 붕괴되는데, 일정 양의 절반이 붕괴될 때까지를 원소의 ‘반감기’라고 한다. 한편 러더퍼드는 원자질량이 원자번호보다 왜 더 빠르게 증가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중성자의 존재를 제안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내용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실험 때문에 방위 훈련에 참석하지 못하자 영국 당국에 용서를 구하며 이렇게 써 보냈다.
“제가 믿고 있는 대로 원자의 핵을 붕괴시키는 데 성공한다면 이는 이 전쟁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될 겁니다.”
이것이 최초의 원자핵 분열의 사례이다. 그의 발견은 대단한 파문을 일으켰지만 일부 학자들은 원소가 변한다는 그의 이론을 중세의 연금술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곧 전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다.
https://play.google.com/store/apps/details?id=com.geulmoe.quesais
<현대과학의 한 축 러더퍼드>
러더퍼드는 뉴질란드에서 태어나 19살에 크라이스트처치에 있는 캔터베리 칼리지에서 공부했다. 1892년 졸업한 뒤 다음 해 수학과 물리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실험기기 제작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는데 1893년 10만분의 1초 단위로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기구를 만들었다. 이 연구로 ‘1851년 세계박람회’ 장학금을 받았고 영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재원을 확보했다. 1895년 24살의 러더퍼드는 뉴질랜드를 떠나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향했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캐번디시 연구소의 J. J, 톰슨 교수와 연구하기를 원했다. 그는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몇 미터 거리에서 심지어 벽돌담까지도 통과해 전자기파를 탐지하는 기계를 만들었고 1896년에는 당시로 세계기록인 수백 미터 거리에서 전자기파를 감지해 내어 동료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러더퍼드에 남다른 연구 재능이 있는 것을 발견한 톰슨 교수는 1896년 독일의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하자 엑스선의 기체 통과 효과를 조사하자고 요청했다. 그들은 X선이 엄청난 양의 이온을 만들어 내며 이들 이온은 다시 합쳐져 중성의 분자를 형성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때도 그의 재능은 발휘되어 이온이 재결합하는 속도를 측정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사실상 러더퍼드와 같이 물리와 화학 두 분야에 걸쳐 두각을 나타낸 학자는 많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원자의 모형을 만든 공헌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1908년에 원소의 분해와 방사성 물질의 화학 연구에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1937년에 그가 사망하자 그의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있는 위대한 과학자 뉴턴의 무덤 가까이 안치되었지만 그는 자신이 노벨물리학상이 아니라 화학상을 받았다는데 매우 기분나빠했다는 후문도 있다.
러더퍼드의 성실성과 인간성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그의 연구에는 당연히 방사선 물질이 필요했다. 재료로는 라듐이 가장 적합한데 그에게는 실험용 라듐이 거의 없었다. 당시 유럽에서 라듐을 생산하는 곳은 현재는 체코에 속해 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요아힘슈타르 광산뿐이었다. 그래서 빈의 과학아카데미는 350밀리그램의 브롬화라듐을 영국에 빌려주었는데, 러더퍼드와 1904년에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램지(William Ramsey)가 함께 사용하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과학자간의 경쟁심과 공명심으로 인해 램지는 라듐을 독차지하고 러더퍼드에게는 주지 않았다. 본래부터 두 노벨상 수상자는 사이가 나빴으므로 러더퍼드는 가까스로 다시 빈 과학아카데미를 설득하여 라듐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영국은 이 비싼 라듐을 적국의 재산이라 하여 몰수하려고 했다. 이를 반대한 러더퍼드는 정부를 설득하여 당시의 합당한 값으로 구입하였다. 패전국인 오스트리아의 빈 연구소는 한때 파산 상태에 빠졌는데 이 돈으로 재기할 수 있었다. 러더퍼드가 1937년 10월 19일 66세의 나이로 케임브리지에서 사망하자 웨스트민스터의 뉴턴 옆에 묻힌 것도 우연은 아닌 셈이다.
그런데 러더퍼드가 어려서 매우 가난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러더퍼드는 1871년 뉴질랜드의 시골 넬슨의 스프링그로브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임스 러더퍼드와 마사 러더퍼드의 열두 명의 아이 중 넷째였다. 형제자매가 12명이나 되어 어려서부터 집안을 돕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마을 입구마다 어떤 일이라도 수업 시간이 끝나면 일을 할 수 있다고 광고를 부쳐놓고 틈이 나면 책을 보려고 항상 호주머니에 책을 넣고 다녔다. 다행하게도 성실한 그에게 많은 일감이 들어와 집에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어느 날 선생님이 그를 사무실로 불렀다.
“네가 학비를 마련하려고 많은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것을 선생님은 잘 알고 있으며 또한 너의 자립 정신에 탄복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것을 생각해 보았느냐? 네가 학비를 버는 것은 바로 지식을 배우려고 하는 것인데 지금처럼 온종일 일감을 맡을 생각을 하지 말고 공부를 열심히 하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지 않겠니. 너는 어째서 공부할 생각을 하지 않느냐?”
사실 러더퍼드가 학교를 끝내자마자 일을 해야 했으므로 수업 시간에 졸기 일수였다. 당연히 성적도 좋지 않았는데 선생님의 말은 그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그는 학기말 시험에서 1등을 하고 장학금을 받았다. 그때 그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그후 그는 계속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결국 과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봉에 오른 것이다. 그의 초등학교 시절은 1870년대 말이지만 현대에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일을 하여 학비를 보탤 수는 있었지만 성적이 나쁘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 아닌가? 그는 추후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자기 코 끝 아래의 작은 일만 챙기는 사람보다 더 슬픈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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