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 노벨상이 만든 세상/원자력

원자력의 파괴력, E=mc2 증명(1)

Que sais 2020. 10. 14.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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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세상이 되다>

유인원에서 갈라진 인류의 선조는 몇 백 만년 동안 수렵활동을 통해 얻은 동식물을 요리하지 않은 채 먹었다. 그런데 근래의 연구에 의하면 대체로 100만 년 전부터 인간이 불 을 사용하게 되었다. 인간이 불을 사용할 수 있게 되자 그 전에 먹을 수 없었던 것을 익혀 먹을 수 있게 되었고 밤에는 어둠을 밝혀주었으며 추운 날엔 몸을 덥혀 주었다.

이를 에너지 차원으로 말한다면 당시 불을 피우는 데 사용된 나무야말로 인간 역사상 최초의 에너지원이라 볼 수 있다. 불 에너지 다음으로 인류가 손에 넣은 에너지는 가축 에너지이다. 1만 년 전, 농경 시대로 들어서자 사람들은 소, 말 등의 가축을 이용하여 무거운 물건을 운반하거나 논밭을 경작했다. 이때부터 인간은 조금씩 문명을 만들어가면서 다른 형태의 에너지를 찾기 시작했다.

 

물을 끌어올리거나 물레방아를 돌리는 힘을 발견했고 집을 짓는 데 필요한 나무를 운반하기 위해 강물의 힘을 이용하기도 했다. 이렇게 사람들은 물의 낙하, 바람 등의 자연 에너지를 이용하는 지혜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인간이 사용하는 에너지원은 17세기부터 현대로 넘어오게 되는 획기적인 진전이 이루어진다. 인간이 석탄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석탄을 이용할 수 있게 되자 비로소 인간의 생활은 비약적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석탄을 이용한 증기기관이 발명되자 곧바로 산업혁명이 일어난다. 각지에서 근대 문명을 이루는 생산물의 수요처가 늘어나자 이들 기관을 이용한 대량생산 공정이 발달하고 물자를 수요처에 곧바로 공급할 수 있는 고속도로, 증기선, 증기기관차 등이 등장한다.

20세기에 들어서자 에너지원은 또 한 번 업그레이드된다.

석탄과 같은 화석연료이지만 보다 경쟁력이 있는 석유가 가장 강력한 에너지로 등장한 것이다. 석유로 만드는 획기적인 에너지 연료가 개발되자 자동차, 비행기, 우주선 등이 모습을 보이는 등 인류는 산업과 기술, 경제, 문화의 각 부분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위의 설명은 구석기시대부터 인간이 현대 문명을 이룰 수 있는 계단을 단계적으로 밟아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현대 문명을 본격적으로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19세기 말에 등장한 밤을 낮으로 만들어 준 전기이다. 물론 불은 100만 년 전부터 인간에게 활용되어 밤을 밝혀주었고 인간의 생활 영역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주었지만 전기는 과거의 불과 차원을 달리한다.

전기가 없었던 시대에 살았던 과거 사람들은 해가 진 후 장작불, 횃불, 기름등잔 또는 촛불로 어둠을 극복했다. 이런 방식으로 불을 켜면 불편한 일이 많다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화재의 위험성이 항상 따랐다.

여기에서 인류 사상 최고의 발명가라는 에디슨(Thomas Alva Edison)이 등장한다. 그가 백열전등을 발명하여 태양이 아닌 새로운 빛으로 밤을 낮으로 바꾸어 주었다. 전등의 탄생으로 비로소 인간의 눈은 보다 새로운 환경 즉 24시간을 모두 낮과 같이 사용하는 환경에 적응하게 된다. 전기가 없는 생활은 상상할 수 없는 악몽이 된 것이다.

에디슨에게 발명왕이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것도 인류가 그에게 큰 빛을 지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그의 역작인 전등도 전기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발전소가 없었다면 조그마한 아이디어에 그쳤을 것이다. 에디슨의 중요성은 전등을 발명하면서 전기의 공급 즉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소와 송전까지 한 번에 이루어지는 전기 시스템 전체를 구상했다는데 있다. 한마디로 에디슨은 전등이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이지만 이들 전등을 모든 가정에서 쓸 수 있는 발전소가 준비되지 않으면 전기 시대는 결코 올 수 없다고 파악했다는 점이다. 에디슨은 이를 위해 직류 송전을 주장했고 에디슨의 직원이었던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 18561943)는 교류를 주장했다. 결론은 현재 전세계를 누비는 송전방식은 교류이다.

여하튼 전기가 인간의 생활로 들어오기 시작해서부터 비로소 인간이 보다 인간다운 생활 즉 현대문명을 영위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문제는 일단 문명의 이기로 인간에게 들어온 전기에너지 없이는 이제 인간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전기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전기를 만들어주는 시설이 제공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기를 만드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태양에너지를 이용하여 직접 전기를 만드는 것과 열이나 동력원을 이용하여 이를 전기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전자는 태양전지 모듈을 이용하는 것이고 후자는 각종 발전기를 이용하는 것으로 발전기를 대형으로 만든 것이 발전소이다. 바로 화력발전과 원자력 발전시대 등이 열리는 계기이다.

원자력발전의 기본이 되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의 근간이 되는 E=mc2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E=mc2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직결되어 있고 특히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이 그의 원리에 의해 개발되었고 이 원리를 이용한 원자력발전소에서 만드는 전기를 한국을 비롯한 수많은 국가에서 가동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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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성자의 충돌>

학자들이 만물이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원자라는 알갱이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을 도출하자 원자의 성질이 무엇인가에 도전했고 어느 정도 이론을 정립했다.

그러자 이에 그치지 않고 미소세계에 대해 더욱 궁금해 했고 원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원자의 모형은 어떤 것인지를 알아내는 데 열중했다. 어느 원자도 원자핵과 그 주위에 존재하는 전자군(電子群)에 의하여 구성되어 있다. 원자핵은 지름이 원자 전체의 약 10만분의 1이며 그 속에 양전하(陽電荷)를 가지는 양성자(陽性子)와 전기적으로 중성인 중성자(中性子)가 몇 개씩 결합하고, 주위를 양성자와 같은 수의 전자가 둘러싸고 원자핵의 양전하를 중화하여 전기적으로 중성인 원자를 형성한다.

중성자에는 전하가 없기 때문에 전하를 띤 원자핵에 중성자로 충격을 가하면 그 성질을 인공적으로 변화시켜 방사능을 가진 물질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방법에 가장 열성적인 사람이 3의 불이라 불리는 원자력을 발견하여 원자력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이탈리아의 페르미(Enrico Fermi, 19011954)이다.

페르미는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철도청 직원인 아버지와 초등학교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3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수학과 과학에 천재성을 보여 10살 때 혼자서 원의 방정식을 만들 정도였다. 아버지 친구의 권유에 따라 1918년에 피사대학에 지원했다. 당시 입학시험에서는 논문을 쓰게 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그의 입학시험 답안을 본 교수들은 그의 뛰어난 실력에 감탄하여 곧바로 장학금을 주었고 스물 한 살이던 1922년에 최연소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를 취득하고 곧바로 이탈리아 정부의 특별장학생으로 독일의 괴팅겐 대학과 네덜란드의 라이덴 대학 등으로 파견되었다. 이 당시 그가 발표한 논문은 소위 페르미 통계라고 불리는 스핀 양자수가 2분의 1일 입자들의 통계에 관한 것으로 이들 논문으로 그가 동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학자로 꼽히자 이탈리아는 페르미에게 스물여섯 살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로마 대학의 이론물리학 교수이자 물리학과 과장으로 영입했다.

그는 곧바로 당시 첨단 분야였던 핵물리학에 초점을 두었다. 그는 중성자를 수많은 원자에 충돌시키는 실험을 진행했고 새로운 37가지 원소의 방사성 동위원소를 찾아냈다. 그런데 대부분의 중성자들이 원소와 반응하지 않고 원자핵에 흡수되는 것이 문제였다. 그 이유는 알파입자는 양전하를 띠고 있으므로 원자핵과 반발하지만 전하가 없는 중성자는 원자핵과 쉽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페르미는 퀴리의 사위와 딸인 졸리오 퀴리 부부가 폴로늄 시료 위에 알루미늄 판막을 갖다 놓아도 베타선(양전자) 방출이 급속히 감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것에 주목했다. 그들은 알루미늄 원자핵에 알파입자를 충돌시키면 알루미늄 판막이 방사성을 띠면서 다른 방사성 물질처럼 방사선을 방출하는데, 이것이 인공 방사성 원소를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다.

그런데 페르미는 새로운 동위원소를 만드는데 알파입자보다 느린 중성자를 충돌시키는 것이 보다 효율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페르미는 수많은 원소에 중성자를 흡수시켜 거의 모든 경우에 방사성동위원소가 만들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페르미의 중요성은 중성자와 충돌할 원자핵 사이에 어떤 물질 즉 흑연을 두면 중성자의 충돌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속도가 감속된 중성자가 원자핵을 지날 때 원자핵은 그 중성자를 잡아당겨 충돌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우라늄에 중성자를 흡수시켜 우라늄보다 무거운 초()우라늄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추후에 알려졌지만 그것은 새로운 원자핵이 아니라 우라늄 원자핵의 절반 정도인 바륨과 요오드 원자핵이 뭉쳐진 것이다.

또한 페르미는 속도를 늦춘 중성자를 충돌시키면 인공 방사성 물질의 방사능이 더욱 커진다는 점을 발견했다. 오늘날 핵물리학에서 원자핵의 크기를 나타내는 페르(10-13센티미터)’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으며 주기율표의 100번째 원소도 그가 사망한 후에 페르미움으로 명명되었다.

페르미는 철저한 연구자로서 그야말로 꼼꼼한데다 또한 경건하게 살았다.

그의 단적인 생활을 알려주는 에피소드는 스페인의 한 학자가 로마의 물리연구소로 그를 찾았을 때이다. 그가 페르미 박사를 만나러 왔다고 하니까 안내원은 그에게 교황은 위층에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는 자신이 찾아 온 사람이 교황이 아니라 페르미 박사라고 하자 안내원은 자신이 말한 교황이 바로 페르미 박사라고 말했다. 페르미의 일관된 연구 방식과 그의 경건한 생활에 존경하는 연구소 직원들은 그를 교황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는 평소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학생이라면 문제를 풀 줄 알아야 하고 연구원이라면 문제를 만들 줄 알아야 한다.”

 

페르미가 꼼꼼하고 철저한 사람이지만 유머도 만만치 않았다.

한 번은 페르미가 궁전에서 개최된 어느 과학 아카데미의 회합에 초대를 받았다. 그 모임에서는 무소리니가 직접 축사를 읽기로 되어 있었는데 당대의 무소리니는 페르미의 업적을 감안하여 각하라는 칭호를 붙여주었다. 무소리니가 참석하므로 궁전 주변에 경비가 삼엄했는데 회합에 참석하는 대부분의 인사들은 운전수가 있는 고급자동차로 궁전에 도착했다. 그렇지만 가난한 로마대학의 교수인 페르미는 초라한 피아트차를 자신이 직접 몰고 갈 수밖에 없었다.

궁전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삼업한 검문을 받았는데 자신이 페르미 각하라고 대답해보았자 경비원들이 결코 믿어주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저는 엔리코 페르미 각하의 운전수입니다.”라고 대답하여 정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정도 유머가 있는 사람이 과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핵분열현상 발견>

원자핵은 분열해서 안정한 원소가 되려고 할 뿐만 아니라 두 원자핵이 결합해서 안정된 핵이 되려는 경향도 있다. 작은 원자핵이 결합해서 더 안정된 큰 원자핵으로 변해 가는 것을 핵융합이라 하고, 큰 원자핵이 분열해서 작고 안정된 원자핵으로 변환되는 것을 핵분열이라고 한다. 이때는 대개 반응에 참가하는 물질과 생성물질의 질량 사이에 차이가 나게 되는데 이 차이에 해당하는 질량이 에너지로 변환되어 방출된다.

두 명의 독일 과학자가 페르미의 연구에 주목했다. 독일인 오토 한(Otto Han, 18791968)과 유대인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 18781968)이다. 리제 마이트너에 대해 먼저 설명한다.

1878년 비엔나에서 태어난 리제 마이트너는 물리학에서 천재성을 보였지만 여성인데다 유대인이라는 불리함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제 마이트너는 1905년 비엔나 대학의 루트비히 볼츠만 교수 밑에서 물리학 박사를 받았다. 그녀는 당시 가장 유명한 물리학자 중에 한 명인 막스 플랑크의 이론물리학 수업을 듣기 위해 베를린으로 갔다. 마이트너를 본 플랑크는 처음에는 다소 시큰둥했으나 그녀가 재목임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오토 한과 공동 작업을 하도록 허락했다. 이때 마이트너는 연구소를 출입할 때 뒷문을 이용해야 했다고 술회했다.

1차 세계대전 직전 오토 한은 새로이 설립된 빌헬름황제화학연구소(후에 막스플랑크 연구소)의 교수로 초빙되자 마이트너도 그를 따라가 조교가 되었고 몇 년 지나지 않아 그녀도 한 분과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후 두 사람은 매우 성공적으로 공동 작업을 수행했고 마이트너는 교수 자격도 얻었다. 오토 한은 화학자로서 실험을 계획하고 실행하는데 특히 뛰어났고 마이트너는 물리학자로 이에 대한 이론적 바탕들을 제공했다.

1930년대에 중성자가 발견되자 전 세계적으로 중성자 충격을 통해 우라늄에서 초우라늄을 만들어내려는 실험들이 시작되었고 프리츠 슈트라스만(Fritz Strassmann, 19021980)도 이 작업에 뛰어 들었다. 그러나 세계 정황은 마이트너로 하여금 독일을 탈출하여 스웨덴으로 가도록 만들었다. 그녀가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1938년 말이 되어 마이트너가 빠진 베를린팀은 예상외의 사실을 발견했다. 우라늄의 방사화에 의하여 생긴 '3종류의 라듐동위체'를 바륨으로부터 분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과 슈트라스만은 다음과 같이 이 사실을 정리했다.

 

라듐228을 첨가하여 라듐과 바륨의 분류를 실시하였더니 ‘3종의 라듐동위체는 라듐228로부터 분리되어 바륨과 행동을 같이 했다.

 

‘3종의 라듐동위체의 붕괴생성물에 악티늄228을 첨가해서 란탄(원자번호 57)과 악티늄의 분리조작을 하였더니 붕괴생성물도 또한 악티늄228로부터 분리되어 란탄과 행동을 같이 했다.

 

여러 가지의 다른 바륨화합물의 결정을 생성시켰으나 '3종의 라듐동위체'가 바륨으로부터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들은 ‘3종의 라듐동위체는 바륨 그 자체인 것을 알게 되었다. 즉 우라늄을 중성자로 조사하면 적어도 3종류의 바륨동위체가 생겨나며, 이것들은 붕괴해서 란탄으로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핵이 쪼개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바로 많은 물리학자들이 한의 이론을 규명하기 위한 연구에 들어갔고 핵이 쪼개질 수 있는 증거가 수없이 발견되었다. 이것이 바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원자폭탄과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기본 이론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이것은 페르미가 앞에 설명한 것처럼 초우라늄 원자핵을 만들었다고 생각한 바로 그것이다. 여하튼 오토 한에 의해 중세 유럽의 연금술사들이 꿈에 그리던 원소를 변환시킬 모든 준비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학자들은 엄밀함을 중요시한다.

핵분열이 오토 한과 스트라스만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설명되자 추후에 진정한 핵분열의 발견자가 누구인가에 대해 많은 논쟁이 일어났다. 1938년에 이렌느 퀴리는 우라늄의 중성자 포격에서 우라늄보다 훨씬 가벼운 란탄계 원소가 생기는 것으로 보인다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매우 새로운 현상이 발견된다고 발표했다. 이 사실에 주목한 베를린의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은 193812월에 우라늄을 중성자로 포격한 후 나오는 반응 생성물에 대해 정밀한 화학 분석을 해보았다. 그 결과 그들은 우라늄의 중성자 포격에서 원자번호 56인 바륨(Ba)36번인 크립톤(Kr)이 생성된다는 믿을 수 없는 결과를 얻은 것이다.

이는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였다. 200개가 넘는 양자와 중성자가 모여 만든 우라늄의 거대한 원자핵이 중성자 한 개에 의해 거의 반으로 쪼개진다는 것은 마치 유리창을 뚫고 들어온 야구공이 집을 반으로 갈라놓는 것만큼이나 일어날 법하지 않은 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한과 슈트라스만은 연구팀의 일원이었던 마이트너에게 자신의 실험 결과가 매우 이상하다는 것을 편지로 보낸 후 논문을 투고했다. 그는 중성자 충격을 통해 발생한 원소는 라듐 같지 않았고 우라늄의 원자번호 92보다 훨씬 낮은 바륨(원자번호 56)처럼 보였다며 다음과 같이 적었다.

 

먼저 당신에게만 말하는 것이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라듐 동위체들에서 나타나는 어떤 것입니다. 주목할 만한 우연한 현상이 또 우리 앞에 나타날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점점 더 두려운 결론에 도달합니다. 우리의 라듐 동위체가 라듐 같은 모습이 아니라 바륨 같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혹시 당신이 어떤 기막힌 설명을 해줄 수 있지 않을까요?’

 

한이 마이트너에게 자신의 발견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을 요청한 것이다. 마이트너는 보어의 공동 연구원으로 조카인 오토 프리쉬(Otto R.Frish, 19041979)와 함께 이 문제를 검토한 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지금까지 발견된 핵반응에서는 핵으로부터 큰 전하를 한꺼번에 잃어버리는 일은 없었다. 이것은 쿨롱 장벽이 핵으로부터 큰 전하를 가지고 있는 입자의 방출을 저지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핵 내에서는 입자끼리 핵력에 의해 결합하고 있으며, 이것에 의해 핵의 표면에는 표면장력이 생긴다. 무거운 핵에서는 핵 내의 전하에 의하여 생기는 핵자끼리의 반발력 때문에 상기의 표면장력은 약해지고, 원자번호가 100정도까지 증가하면 0으로 되어, 핵자끼리 하나의 핵으로 뭉치는 일은 될 수 없게 된다.

 

우라늄과 같은 무거운 핵에서는 밖으로부터 중성자가 들어왔기 때문에 핵 내에 에너지가 반입되어 핵 내에서의 핵자의 집단운동이 일어나 핵이 변형하고, 변형이 어느 한도를 초과하면 쿨롱 힘에 의한 반발이 핵력에 의해 뭉치고자하는 힘을 웃돌게 되어, 액체 방울이 분열하는 것과 흡사한 모양으로 핵이 둘로 분열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우라늄이 상기 과정에 의해 분열하면, 분열 편은 쿨롱 반발력에 의하여 서로 가속되므로 대략 두 개의 분열편의 합계가 약 200Mev의 운동에너지를 얻게 된다. 200 MeV의 에너지는 우라늄, 중성자, 핵분열편의 질량을 이용하는 경우, 아인슈타인의 식 E=mc2에 의해 계산한 값과도 일치한다.

알기 쉽게 설명한다면 우라늄 원자핵 하나가 깨질 때 나오는 에너지는 모래알 하나가 튀어 오르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라늄 1그램에는 대략 2.5×10^21개의 원자핵이 있음을 이해한다면 이들이 생산하는 에너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을 먼저 말한다면 한과 슈트라스만은 이렌느 퀴리가 기초적으로 연구한 것을 재현하는 후발 주자답게 좀 더 정밀하게 실험을 수행했고, 이 과정에서 우라늄이 쪼개져서 바륨과 크립톤이 생성되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한 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핵분열 발견자는 공식적으로 처음 실험을 수행한 이렌느 퀴리에게로 돌아가야 하지만 핵분열 현상을 보다 정확하게 수행한 한과 슈트라스만에게만 노벨상의 영광이 돌아갔고 마이트너는 제외되었다.

마이트너가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한 것은 다소 의외의 일로 그후 계속 구설수가 따라다녔다. 그녀가 여자인데다 유대인이라는 점이 탈락의 요인이었다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1965년 한, 슈트라스만과 함께 페르미상을 공동수상하여 노벨상 탈락의 아쉬움을 벗을 수 있었다. 반면에 이렌느 퀴리는 이미 1935년에 노벨상을 수상했으므로 크게 개의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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