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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의 코는 정말로 컸나요?(III)

Que sais 2020. 8. 29.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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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의 이야기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하자 안토니우스의 자살에 이어 독사로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하게 된 근거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한마디로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와 연합했지만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했는데 클레오파트라는 곧바로 승리자인 옥타비아누스와 만난다.

로마의 역사학자 디오 카시우스는 안토니우스가 자살한 후의 일로 그들이 만난 곳은 클레오파트라가 평소에 자신이 죽으면 묻히겠다고 건설한 영묘(靈廟)라고 적었다. 영묘 안에는 시저의 조상이 둘러싸여 있었는데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이 시저의 부인이었고 아이도 낳았음을 강조하고 시저의 편지도 공개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시저와의 관계를 생각해서라도 자신을 박해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런데 옥타비아누스가 그녀의 접근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자 클레오파트라는 방향을 바꾼다. 그녀가 무릎 꿇고 자신이 안토니우스 곁에 묻히고 싶다고 애원했는데 옥타비우스가 그녀의 말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옥타비우스의 마음을 돌려놓는 데 실패한 클레오파트라는 명철한 판단을 내린다. 자신이 사전에 만든 영묘에서 스스로 독사에게 물려 죽음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최후의 자존심을 지켰다는 것이다.

이 당시 벌어진 내용은 클레오파트라를 깎아내리는데 공헌하여, 후대에 그려진 그림을 보면 옥타비아누스가 도도하게 앉아있거나 서있는 자세에 클레오파트라가 애원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마디로 클레오파트라가 옥타비우스에게 접근하다가 딱지 맞았다는 뜻이다.

이런 내용이 옳고 그른 것은 제외하더라도 여기에는 상당한 배경이 있다. 그것은 옥타비아누스와의 악티움 해전에서 클레오파트라가 보인 이상한 행동 때문이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이 로마제국의 패자를 놓고 혈투를 벌인 악티움 해전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매우 의아한 장면이 발견된다.

우선 학자들이 가장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압도적인 전력을 갖고 있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이 악티움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했다는 점이다.

클레오파트라 시선으로 보면 이집트는 전통적으로 파라오가 군사령관으로 전장에서 선두에 서서 전투를 독려했다. 클레오파트라악티움 해전에서도 직접 이집트군을 지휘했는데 이는 클레오파트라가 여자 파라오임에도 이집트를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클레오파트라가 이와 같이 악티움 해전에 직접 참여한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사실 이집트에서 단 3명의 여왕 중 한 명인 클레오파트라가 직접 전투 현장에서 이집트 함대를 지휘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녀가 해전에 참여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당시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준 선물은 클레오파트라보다 200여 년 전 이집트 전성기 때의 이집트 영토를 거의 모두 확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의 파라오 즉 자신의 힘으로 이집트의 영토를 찾았으므로 악티움 해전에서도 선단에서 진두지휘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악티움 해전이 한창 진행되면서 누가 승리할 수 있는지 장담하기 어려운 판에 안토니우스의 막강한 우군인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 군을 공격하지 않고 방향을 돌려 이집트로 회항한다. 이것이 아직도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 중 미스터리이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의 눈은 예리하다.

당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동부 지중해의 상당 지역을 통치했기 때문에, 안토니우스 연합함대의 규모는 대단했다. 구역마다 노잡이 810명이 배치된 거대한 8단선과 10단선을 포함해 전함 520척 규모였으며 거대한 10단선은 병력만 1,000명이 될 정도이다.

전함들은 소함대 8개로 편제되었고, 각각의 소함대는 중전함 60척과 정찰을 맡은 경전함 5척으로 구성되었다. 함대에는 수송선 300척도 포함되었는데, 여기에 보병 10만 명과 기병 12,000명이 탑승했다.

특히 안토니우스의 전함들은 공성포가 증대된데다 전면이 갑판으로 둘러쳐진 캐터프랙트 전함이다. 이 전함들은 옥타비아누스 전함들보다 큰 규모로 대포가 작은 갑판 망루 위에 위치해 있어서 수병들 머리 위로 포를 발사할 수 있었다. 더구나 안토니우스가 지휘하는 수군은 막강한 카르타고를 격파한 전통을 이어받은 백전 용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반면에 옥타비아누스는 전함 약 250, 수송선 150, 8만 명의 보병과 12,000명의 기병에 불과했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보다 훨씬 대규모 함대를 보유하고 있으므로 4개의 지휘권으로 편제했는데 4개의 소함대 각각은 마주한 옥타비아누스 함대보다 더 대규모였다. 전장에서 4배나 월등한 전력을 갖고 있다면 승리를 장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옥타비아누스에게도 약간의 장점은 있었다. 그에게는 안토니우스가 갖고 있는 대형 전함은 많지 않았지만, 그가 갖고 있는 갤리선 대부분은 안토니우스 전함들보다 가벼워 기동성이 훨씬 뛰어났다는 점이다. 해전에서도 기동력이 중요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에 비해 전력이 뒤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정면 대결보다는 안토니우스의 보급로를 차단하는데 집중했다. 그의 작전은 성공하여 마침내 160킬로미터에 이르는 코린트 만을 기습해 상당부분을 손에 넣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래도 안토니우스는 자신만만했다. 옥타비아누스에게 일부 보급로를 차단당했지만 클레오파트라라는 막강한 병참 지원부대가 합류했다는 점이다. 또한 육해군 모두 합하여 옥타비아누스군보다 월등한 전력을 갖고 있는데다 장병들 모두 잘 훈련되었고 좋은 장비까지 갖추고 있었으므로 옥타비아누스군과 정면대결하면 격파하는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악티움 해전은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로선 절대로 패배해선 안 되는 승부처로 기원전 319, 두 진영은 악티움 만 앞에서 격돌했다.

옥타비아누스 함대의 총사령관 아그리파의 지휘하에 빠른 전함으로 안토니우스의 노를 쳐부수거나, 보다 규모가 큰 적의 강화된 측면을 들이받고 로마의 장기라 할 수 있는 배에 올라 전투하는 보딩 전법으로 전투를 벌리면서 위장 후퇴 후 다시 돌격하는 게릴라전법을 고수했다.

반면에 역전의 용사인 안토니우스의 대형 전함들은 보다 작은 4단선이나 5단선 34척으로부터 맹렬한 공격을 받았지만 전투는 결코 밀리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에서 세계사를 놀라게 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집트 함대 사령관은 클레오파트라에게 악티움 만에서는 바람이 오후 늦게 서쪽에서 생겼다가, 방향을 바꿔 북쪽에서부터 강하게 부는 경우가 많으므로 이를 이용하면 옥타비아누스를 사로잡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함대사령관의 조언을 듣고 클레오파트라는 곧바로 진군을 명했다. 클레오파트라의 60척 함대가 진군하기 시작하더니 옥타비아누스의 소함대와 중앙 소함대 사이에 생겨난 틈으로 밀고 들어왔다. 옥타비아누스로서는 절대 절명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그런데 클레오파트라옥타비아누스의 소집단에 접근하면서도 아무런 지시를 내리지 않고 그대로 함대를 진행하도록 명령했다. 클레오파트라의 대함대는 한창 전투 중임에도 불구하고 옥타비아누스를 공격하지 않고 전장의 중앙을 유유히 통과한 후 이집트로 향한 것이다. 학자들은 안토니우스의 동맹군인 클레오파트라의 전함들이 옥타비아누스 함선들을 공격했다면 결정적으로 전투의 흐름을 바꾸어놓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악티움 해전에서 클레오파트라의 행동은 그야말로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는데 상황을 보다 악화시킨 것은 안토니우스의 악수이다. 클레오파트라가 전장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파악한 안토니우스는 더 이상 전투를 하지 않고 남은 전투선단을 이끌고 그녀의 뒤를 따라 이동했다.

학자들은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와의 전투에서 큰 피해를 보지 않았으므로 다음 결정적인 기회를 예상하며 철수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두 사람은 곧바로 만났으며 옥타비아누스와의 1차 전투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런데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보다 한 수 위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철수하자 안토니우스가 패배를 예감하고 철수했다는 주장 즉 자신이 승기를 잡았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와 맞대결하면 불리하므로 안토니우스를 직접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들을 공격하여 주변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안토니우스로서는 막강한 함대가 온전하므로 이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는데 옥타비아누스군이 클레오파트라의 근거지인 알렉산드리아 근처까지 진격해 들어왔다.

그제서야 안토니우스가 그동안 보류한 최후의 일전으로 기원전 308, 1차 전투가 벌어진 지 거의 1년 후에 자신의 남은 군대와 이집트의 잔여 함선들을 이끌고, 옥타비아누스 함대를 향해 돌격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는 안토니우스의 참패였고 이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자살로 이어진다는 설명이다.

클레오파트라가 악티움 해전에서 이상한 행동을 한 이유를 학자들은 두 가지 시각으로 설명한다.

첫째는 클레오파트라가 악티움 해전을 낙관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집트 군이 빠지더라도 안토니우스가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클레오파트라의 판단 착오 즉 변명의 여지도 있다. 그녀는 우선 전력상에서 안토니우스가 압도적으로 우세하므로 그녀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아도 승리할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구나 클레오파트라 선단은 기본적으로 공격군이 아니라 병참군이었다. 그러므로 그녀가 일부 공격 함선을 투입했다고 해서 반드시 승리한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한마디로 그녀가 빠져도 안토니우스가 승리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와는 전혀 다른 각도의 시각으로 클레오파트라가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보험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전투는 항상 변수가 있기 마련이다. 절대 열세인데도 승리할 수 있는 것이 전쟁인데 악티움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전투에서 만약 안토니우스가 패배한다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이집트와 안토니우스가 승리하면 문제가 없지만 만약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면 이집트 자체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클레오파트라가 옥타비아누스를 공격하지 않은 것을 일종의 보험으로 생각한다. 한마디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할 때를 대비하여 보험을 들었다는 뜻이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악티움 해전은 로마의 패권을 다투는 것이지만 그녀로서는 이집트를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악티움 해전이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로 끝나자 클레오파트라는 점령자인 옥타비우스에게 접근한 것은 악티움 해전이 결정적인 순간일 때 자신이 공격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추정한다.

여하튼 클레오파트라와 옥타비아누스가 만난 것은 사실로 보이는데 이 만남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승자인 옥타비아누스에게 자신이 악티움 해전에서 보인 보험을 생각해서 이집트를 살려달라고 청탁했는데 거절당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클레오파트라가 옥타비아누스에게 접근하려다 실패한 것으로 설명한다. 시저, 안토니우스를 막대한 재산으로 유혹했으므로 옥타비아누스도 그녀 편으로 넘어올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혀 달랐다. 옥타비우스는 그녀의 접근을 한 마디로 거절해 버렸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녀를 로마로 보내 길거리에서 쇠사슬로 묶어 끌고 다니겠다는 말로 증오심마저 드러냈다고도 알려진다.

두 번째 시각에 대해서는 상당한 자료들이 있는데 그것은 옥타비우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보인 냉정한 행동은 상당히 고차원적인 면을 생각하여 내린 결단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우선 당대의 로마인들은 패배한 자는 승리자에게 이미 목숨을 빼앗긴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므로 생포된 적을 일단 살려주는 것은 그만큼 생명을 연장시켜 준 자비이므로 승리자는 패배자를 언제, 어떻게 다루어도 좋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로마가 카르타고와 혈투를 벌인 후 최종적으로 승리하자 로마는 카르타고인 수십만 명을 단 한 명도 예외없이 노예로 팔았다. 카르타고의 고관이나 명문 모두 열외없이 모두 노예가 되었는데 당시에 패배자왕이나 왕비일지라도 벌거벗겨 쇠사슬에 묶은 후 로마 거리를 행진하게 하는 것이 관례였다.

클레오파트라가 정통 로마인 시저와 안토니우스를 배경으로 갖고 있지만 최종적으로 그녀는 로마인 옥타비아누스와 대결하여 패배한 것이다. 과거가 어떠하든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학자들은 이 사건을 매우 예리하게 분석한다. 옥타비아누스가 클레오파트라를 단숨에 거절할 수 있었던 근거다.

클레오파트라가 천하의 시저와 안토니우스를 공략하여 성공한데는 그녀의 재산 즉 이집트의 부가 큰 역할을 했다. 사실 옥타비아누스로도 이집트의 부가 절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클레오파트라가 시저와 안토니우스를 우군으로 만드는데 성공하였지만 옥타비아누스에게는 이것이 먹히지 않은 것은 절대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격파하면서 세계의 구심점이 로마제국의 옥타비아누스라는 것을 확실하게 정리했기 때문에 클레오파트라의 요구를 들어줄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다.

옥타비아누스가 클레오파트라를 냉대한 것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집트가 로마의 가장 중요한 병참기지가 될 수 있으므로 이를 로마의 속주로 병합하면 시저나 안토니우스처럼 이집트에 구걸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경우 패배한 적장을 로마로 끌고 와 로마인들에게 이집트의 멸망을 직접 보여주고 병합하는 것이 중요했다는 내용이다. 이는 옥타비아누스가 클레오파트라를 굳이 우대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뜻과 다름없다. 한마디로 클레오파트라가 자신에 보험을 들었다고 하지만 클레오파트라의 주장에 동조할 이유가 없었다는 뜻이다.

결론은 이집트는 클레오파트라가 사망한 후 로마의 속주가 되어 완전히 역사에서 사라진다. 클레오파트라가 가장 우려한 일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