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클레오파트라

클레오파트라의 코는 정말로 컸나요? (II)

Que sais 2020. 8. 29.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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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저가 총애하던 부르투스에게 살해되자 로마는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삼두체제(三頭體制)에 의해 통치된다. 원래 안토니우스는 시저가 죽자 자신이 후계자가 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시저가 살해된 지 2일 후에 공개된 유언장에 시저는 자신의 조카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안토니우스는 시저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를 제압할 힘이 부족하자 결국 화해하고 최대의 부호인 레피두스를 포섭하여 세 사람이 로마의 통치지역을 분할했다. 안토니우스는 갈리아(프랑스 지역), 레피두스는 에스파냐, 옥타비아누스는 아프리카와 사르데냐, 시칠리아를 관할하였다.

처음에는 안토니우스가 잘 나갔다. 안토니우스는 상당한 언변력이 있었다.

부르투스가 시저를 살해한 후 곧바로 원로원 앞에서 시저를 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시저가 황제가 되려는 야욕을 갖고 있으므로 이를 막기 위해 자신들이 일어섰다는 것이다. 연설에 탁월한 재주를 갖고 있던 부르투스의 말에 로마인들은 시저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르투스 이어 안토니우스가 나섰다.

안토니우스는 우선 시저가 황제가 되려는 생각을 했다는 것에 증거를 대라고 말했다. 그는 시저가 로마의 공화정을 위해 헌신한 내용을 구구절절 설명한 후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했는데 시저가 로마인들을 위해 엄청난 선물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시저가 로마인들로부터 인기를 끄는 것을 시기하여 살해했다는 것이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로마인들의 심중을 울리자 부르투스는 동조자들과 함께 총알같이 도망친다. 두 사람의 연설은 로마 제국공화정에서 황제권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으로 로마의 역사를 설명할 때 가장 먼저 나온다.

이때 세계사에 매우 중요한 장면이 나온다. 바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시저의 죽음을 함께 조문한 것이다. 이는 클레오파트라가 옥타비아누스 대신 안토니우스와 손을 잡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하튼 곧바로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로 돌아가고 안토니우스는 총알 같이 도망간 부르투스를 추적한다. 안토니우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기원전 4210월 시저를 암살한 브루투스 일당필리피 전투에서 격파하고 자살케 하여 로마인들로부터 큰 눈도장을 받았다. 안토니우스가 로마제국의 완벽한 실세가 된 것이다.

그에 대해서는 상반된 의견이 있는데 우선 안토니우스화려한 외모를 갖고 있어 당대에 그리스의 영웅인 헤라클레스에 비견되곤 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전쟁터에서는 언제나 용감하고 대담했으며 사령관으로서의 신중함도 잃지 않았다는 칭찬의 말도 있다. 더불어 그는 언변이 좋아 부하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며 같은 자리에 앉아 함께 술을 마시고 선물도 듬뿍 주었기 때문에 군인들이 그를 좋아했다고 한다.

반면에 거칠고 난폭하며 곧잘 우쭐대며 남을 비꼬는 것을 좋아한 천하의 망나니로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쓴다는 단점을 갖고 있다고 비판받았다.

여러 가지 정황을 볼 때 안토니우스는 권모술수가 난무하여 한 치도 알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던 로마의 집정자로서는 무난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복병은 자신의 상관 부인이었던 클레오파트라였다.

그것은 자신의 우군이라고 생각한 클레오파트라가 시저 암살의 주동자 중 한 명인 카시우스재정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클레오파트라가 로마의 반대자들을 지원한 것인데 안토니우스는 막강한 자금을 갖고 있는 클레오파트라가 로마에 반대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안토니우스는 곧바로 지금의 터키 남부 지역에 있는 타르수스에서 클레오파트라를 불렀다.

안토니우스가 그녀를 부른 것은 간단하다. 그녀가 로마에 거역한 실수를 따끔하게 혼을 내주되 그녀가 반성하여 군사 원정에 필요한 막대한 군자금들을 제공한다면 눈감아 주겠다는 것이다.

바보가 아닌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가 군자금 확보를 위해 그를 불렀다는 것을 알고, 클레오파트라는 이 기회를 오히려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려놓을 자신이 있었다.

이미 시저의 마음을 사로잡고 아들까지 낳은 전력이 있었던 그녀는 안토니우스가 지명한 타르수스에 도착한 후에도 안토니우스를 줄기차게 기다리게 함으로써 조바심을 내게 만든 후 호화로운 장식의 이집트 파라오의 왕실 선박으로 그를 초청했다.

이때 세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건이 벌어진다.

클레오파트라안토니우스의 마음을 사로잡은 방법은 그녀답게 그야말로 기상천외했다. 그녀는 자신이 당대 세계 최고의 부호임을 알리기 위해 안토니우스를 위해 벌이는 단 한 번의 연회에 1만 세스테르티우스라는 막대한 거금을 쓰겠다고 공언했다.

아무리 클레오파트라가 부자라 하더라도 한 번의 연회에 그렇게 많은 돈을 쓸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안토니우스는 내기를 걸었다. 또한 부하 장군을 지명하여 정말로 1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쓰는지 판정을 하도록 했다.

로마의 화폐인 세스테르티우스디나르1/4정도 은화1만 세스테르티우스는 10킬로그램 정도가 된다. 당시에는 은화가 금화보다 비싼 경우도 있으므로 현재 금값 시세만으로 따지면 약 5억 원 정도가 되지만 현재의 시세로는 이보다 10배는 물론 그 이상 될지도 모르므로 안토니우스가 놀라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왕실 선박에서 베풀어진 연회는 처음 얼마 동안 여느 평범한 연회와 전혀 다를 바 없었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이 내기에서 이겼다고 의기양양하게 코웃음을 치며 자리를 뜨려고 했는데 바로 그때 클레오파트라술잔에 식초를 담아오도록 시종에게 명령했다.

그녀는 온몸을 보석으로 장식한 차림이었는데, 특히 양쪽 귀에는 거대한 진주가 매달려 있었다. 식초가 담긴 잔을 가져오자 그녀는 재빨리 한쪽 귀에서 진주를 떼어내 그 속에 떨어뜨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로 모두들 뜻밖의 상황에 숨 죽이며 지켜보는 가운데 클레오파트라는 잔을 쭉 들이켜 마셨다. 그리고는 잇달아 다른 귀에서 진주를 떼어내려고 하자 클레오파트라의 행동을 보고 당황한 내기의 심판은 그녀를 가로막으며 여왕이 내기에서 이겼다고 선언했다.

여기에서 과학 상식 한 가지.

진주의 주성분석회석이기 때문에 식초를 포함한 모든 ()에 잘 녹는다.

식초는 초산을 포함하고 있으며 초산은 석회석을 녹여서 초산 칼슘이라는 을 만든다. 클레오파트라의 진주 역시 석회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산을 이용해 진주를 녹였다는 사실 자체는 과학적으로 충분한 근거가 있는 셈이다.

물론 낟알 그대로의 진주는 표피에 싸여 있고 이 표피는 마셔도 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산성이 약한 식초에서는 금방 녹지 않는다. 그러므로 클레오파트라진주를 마셨다는 설세 가지의 추측이 가능하다.

첫째는 클레오파트라가 식초에 잘 녹는 것을 진주처럼 만들어 귀에 걸고 있다가 식초에 녹여 마셨으리라는 추측이다. 그러나 당시 세계 최대의 부호로 알려졌던 그녀가 그런 편법을 쓰지는 않았으리라는 반론이 지배적이다.

둘째는 신하가 클레오파트라에게 건네준 잔에는 식초 대신 진주를 잘 녹이는 어떤 물질이 들어 있었다는 추측인데 물론 그 물질이 무엇인지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셋째진주가 녹지 않았음에도 통째로 마셔 버렸으리라는 추측이다.

세 가지 추측 가운데 어떤 경우도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클레오파트라가 식초에 거대한 진주 귀걸이를 넣었을 경우 시간이 지나면 진주가 녹을 수 있기 때문에 그녀가 진주를 녹여 마셨다는 이야기 자체는 가능하다 볼 수 있다. 물론 세 번째 그냥 마셨다는 것도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데 여하튼 클레오파트라가 그대로 마시든 녹여 마시든 과학적인 지식이 풍부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진주 사건이 사실로 알려지는 것은 꼼꼼한 역사학자 플리니우스가 기록으로 남겼기 때문이다. 또한 클레오파트라가 식초 속에 넣으려던 나머지 진주에 대해서도 기록되어 있다. 이 진주는 로마로 가져가 두 개로 잘려진 다음 비너스상의 귀걸이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클레오파트라가 귀에 걸었던 진주가 대단히 컸던 것만은 사실인 모양이다.

또한 수많은 예술가들이 클레오파트라가 진주목걸이를 걸고 있는 장면을 그렸는데 한마디로 진주 이야기는 클레오파트라의 기지가 남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안토니우스를 사로잡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천하의 바람둥이 안토니우스가 언젠가는 자신과의 생활에 염증을 낼 것으로 생각하여 플러스 알파를 항상 준비했다.

어느 날 두 명이 낚시를 하는데 안토니우스는 물고기가 걸리지 않자 짜증을 내면서 노예를 물 속으로 들여보내 낚시 바늘에 물고기를 끼게 했다.

그런데 다음 날 클레오파트라도 노예를 물 속에 보냈는데 안토니우스의 낚시 바늘에 걸린 물고기는 말린 생선이었다. 이때 클레오파트라가 낚시는 노예들에게 맡기고 안토니우스는 세계를 어떻게 운영해야 할 지에 전념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클레오파트라의 기지에 안토니우스가 넘어가지 않았다면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안토니우스로서는 클레오파트라와 잘 지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녀로부터 막대한 군자금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다른 문제가 있었다. 로마의 옥타비아누스를 견제해야하기 때문이다.

안토니우스는 로마로 돌아와 옥타비아누스의 동생인 옥타비아와 정략적으로 결혼한다. 똑똑한 옥타비아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연합이 로마를 안정시킬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안토니우스를 다독거리며 내조에 앞장 섰다.

문제는 안토니우스가 성실한 남편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시저가 부인이 있는데도 클레오파트라와 아이를 낳았으므로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를 부정하지 않았으며 시저처럼 결혼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런데 안토니우스와 옥타바아누스의 경쟁은 매우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로마를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가 분할 통치하지만 레피두스는 두 사람에 비해 힘이 못 미치므로 두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 되고 있었는데 전략적으로는 안토니우스가 절대적으로 유리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시라는 로마 근거지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로마에는 원로원이 있으므로 여론을 조성하는데는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보다 유리했다.

안토니우스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명문 귀족이자 거물인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담판하여 그의 부인인 리비아를 양보받아 결혼했다는 점이다. 로마에서 옥타비아누스의 입지가 한층 높아진 것이다.

옥타비아누스가 세력을 착착 쌓아나가자 초조해진 것은 안토니우스. 당시 안토니우스가 로마의 알짜 지역인 동부를 호령하면서 선전하였지만 로마시를 옥타비아누스가 관장하므로 로마인들에게 그의 존재를 인식시키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므로 옥타비아누스의 인기를 떨어뜨릴 묘수가 필요했는데 그것은 바로 파르티아의 원정이다. 로마로 보아 파르티아의 원정은 큰 의미가 있었는데 파르티아를 제압하면 유프라테스 강이 로마의 방어선이 되므로 로마 세계의 동부 지역은 완전히 평정된다고 볼 수 있다.

파르티아한국과도 약간 관련이 있는데 바로 한국인의 자랑 활쏘기이다.

한국의 무사라면 기본적으로 말을 탄 채 뒤돌려 활을 쏘는 실력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이를 배사기사법 또는 파르티안활쏘기라고도 한다.

고구려의 각저총 벽화의 수렵도에 나오는 바로 그 장면이다. 고구려가 사상 최고의 전력으로 중국과 한 치도 양보없이 싸울 수 있었던 것은 당대 최고의 과학기술로 만든 개마무사, 강력한 기마술, 여기에 산성전투, 청야전투 등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추후에 한국인과 친연성이 있다고 알려지는 훈족의 아틸라(Atilla, 395453)가 유럽을 제패하는 이유도 바로 강력한 배사기사법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파르티안은 파르티안 활쏘기 등으로 알려질 정도로 전투에 능해 로마가 함부로 넘볼 수 없는 곳이다. 더구나 파르티아 지역은 시저도 점령하지 못한 곳이므로 안토니우스가 원정에 성공한다면 옥타비아누스를 단숨에 제압할 수 있었다.

기원전 37, 엉덩이가 무거운 안토니우스 즉 승리가 반드시 담보되어야만 출정하는 안토니우스가 파르티아 원정을 결정했지만 문제는 막대한 군자금이다.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에게 편지를 보내어 안티오카에서 만나자고 했다. 클레오파트라는 곧바로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 태어난 남매 쌍둥이를 데리고 약속된 안티오카로 달려왔다. 4년 만의 재회로 안토니우스는 아직 클레오파트라가 낳은 자기 자식의 얼굴도 보지 못한 상태였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가 자신을 부른 진정한 이유를 알고 원정에 필요한 물자와 자금을 듬뿍 갖고 왔다. 한마디로 클레오파트라가 파르티아 원정필요한 자금을 모두 제공하여 안토니우스의 걱정을 해결해주었다. 클레오파트라가 이쁘게 보이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때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에게 조건을 걸었다.

시저에게 막대한 군자금을 주고 시저의 아이를 낳았음에도 애인으로만 간주하여 어떤 이득도 찾지 못했다는 것을 잘 아는 클레오파트라는 한 번은 속지만 두 번은 속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만약 안토니우스가 자신과 결혼한다면 모든 자금을 대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비록 그들 사이에 아이가 있다하더라도 탈탈 털고 뒤돌아서겠다는 것이다.

당돌한 클레오파트라의 말에 결혼 지참금의 위력은 대단하여 그는 이를 받아들였고 옥타비아누스의 동생인 옥타비아에게 이혼을 통보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성대한 그리스식 결혼식을 올렸다. 로마의 실권자 안토니우스와 이집트의 파라오인 클레오파트라와 정식적으로 결혼했으므로 이를 세기의 사랑으로 표현한다.

클레오파트라와 정식 결혼 후 안토니우스는 비로소 클레오파트라가 낳은 쌍둥이 아이와 아들을 자신의 적자로 인정했다. 더불어 클레오파트라를 감격하게 만든 것은 안토니우스가 결혼 기념으로 헬레니즘 왕국의 전통에 따라 두 사람의 옆 얼굴을 새긴 기념 금화를 발행했다는 점이다.

그리스식 금화에 안토니우스의 얼굴은 디오니소스의 신을 본떴고 클레오파트라아프로디테(비너스)를 본떴다. 반면에 이집트인용 금화에서 안토니우스는 오시리스 신이 되었고 클레오파트라의 얼굴은 이시스 여신으로 분장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여기에 추가하여 결혼 선물로 오리엔트 지방의 통치권을 클레오파트라에게 주었다. 문제는 그가 클레오파트라에게 할애한 대부분 지역이 로마의 속주 또는 로마가 동맹자로 인정한 제후의 영토라는 점이다. 사실 클레오파트라에게 그가 전쟁에서 승리한 지역을 준 것은 승패를 좌우하는 전쟁의 순간순간에 클레오파트라의 합류가 결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안토니우스의 이런 행동은 로마의 대외 정책 방향과도 어긋난다는데 커다란 문제점이 있었다. 로마는 전통적으로 로마에 동맹관계를 유지하겠다고 서약하면 그들에게 독립을 주면서 이들의 내정에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 로마에 충성하고 속주세를 부담하기만 하면 독립국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선물로 준 지역은 과거처럼 독립국이 아니라 클레오파트라 즉 이집트에 합병되는 것을 의미했다. 안토니우스에게 점령되어 이집트에 주어지면 독립국이 아니라 이집트에 병합되는 것을 뜻하므로 집권자로서는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반발하여 안토니우스가 파르티아를 정복하겠다고 하자 파르티아는 인근 동맹국들과 꽁꽁 뭉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은 처음부터 실패할 가능성이 많았다는 점이다. 결국 파르티아의 대응이 예상보다 강하여 파르티아 점령은 실패로 돌아간다.

이에 클레오파트라는 직접 전투현장에 있는 안토니우스를 찾아와 위로하면서 파르티아 원정에는 실패했지만 이보다 점령이 쉬운 아르메니아 공격을 주문했다. 한마디로 아르메니아를 점령한 후 다시 파르티아 원정을 재개하면 된다는 것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조언대로 안토니우스가 아르메니아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선식을 치루면서 예상대로 이들 점령지를 클레오파트라와 자식에게 주었다.

그런데 이때 클레오파트라와 시저의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케사리온왕 중의 왕으로 선포했다는 점이 문제로 떠올랐다. 케사리온이 카이사르의 적출자라고 선언했는데 이는 그동안 시저의 유언장을 근거로 옥타비아누스가 시저의 적자라고 선전했던 것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 사실에 대해 옥타비아누스가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사건이야말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여 정략적으로 이용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안토니우스의 약점을 꼬치꼬치 물고 늘어졌다.

우선 안토니우스가 치정에 눈이 멀어 정숙하기 이를 데 없는 천하의 요조숙녀인 자신의 동생 옥타비아를 버리고 불법적으로 이혼을 강요했다고 강조했다. 로마법은 일단 이중결혼을 허용하지 않으므로 많은 로마인들로부터 동정심을 얻었는데 사실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에게 이혼장을 보낸 것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또한 로마의 장병들이 힘들여 정복한 땅을 클레오파트라에게 주었는데 그곳에서 나오는 자원은 모두 로마인들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마인에게 가야할 재산이 외국인인 클레오파트라에게 돌아갔으니 이는 안토니우스의 매국 행동이라는 것이다.

특히 옥타비아누스는 교묘하게 안토니우스가 아르메니아에서 승리한 것도 악선전으로 깎아내리는데 사용했다. 안토니우스가 아르메니아에서 승리했지만 퇴각하는 과정에서 많은 병력을 잃었는데 옥타비우스는 가혹한 겨울을 지나갈 때까지 행군을 멈추고 휴식을 취했어야 했음에도 행군을 강행했기 때문이라고 악선전한 것이다. 안토니우스가 그의 사랑인 클레오파트라에게 하루라도 빨리 되돌아가려고 장병들을 희생시켰다는 주장이다.

물론 전략적인 면에서 이 부분은 안토니우스의 철수가 옳았다고 평가한다. 그가 아르메니아에서 곧바로 퇴각한 것은 아르메니아에서 머물다 공격을 받는 것보다 기회가 있을 때 빨리 군대를 퇴각시키는 것이 군사상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가 가장 반발하는 것은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시저의 아들인 케사리온왕 중의 왕즉 케사리온이 시저의 적출자라고 선언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옥타비아누스가 시저의 조카이자 양자로서 시저의 적법한 후계자라고 그동안 공언했는데 안토니우스가 일거에 이를 부정한 것으로 옥타비아누스의 위상에 결정적인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두 사람이 한 길로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므로 두 사람은 로마의 패권자가 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전쟁을 벌인다. 기원 전 31년에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과 옥타비아누스가 격돌한 악티움 전투로 당대 최대의 해전이었는데 결과는 안토니우스의 패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