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세계 고대사를 후꾼 달구고 있는 것은 클레오파트라의 궁전이 발견된 것은 물론 그녀의 무덤도 발견되었을지 모른다는 발표이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옥타비아누스, 즉 아우스구스투스 황제의 단 한 마디,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다’라는 말로 3000여 년에 걸친 국가의 위상을 잃어버리고 로마의 한 속주로 편입된다.
로마로서는 이집트의 풍부한 농산물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속국으로 만드는 것보다는 직접 통치하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후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로서 세계사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역사의 주무대에서 사라진다.
그런데 사실 이집트가 로마에 합병된 이후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게 된 이유는 기원후 약 300년부터 커다란 지진이 계속이집트를 강타했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로마시대에 이미 100만 명이나 되는 거대도시인 알렉산드리아가 당시의 흔적을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시대가 가면서 고대 도시 위에 새로운 건물들을 건설했기 때문에 과거의 유적들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알렉산드리아는 이것도 아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지중해의 신부(bride)’ 또는 ‘지중해의 진주’라고 불릴 만큼 30킬로미터의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아름다운 도시이다. 문제는 100만 명이나 살고 있던 거대 도시이지만 알렉산드리아가 천연 재해에 매우 취약하다는 점이다.
알렉산드리아는 지질학적으로 볼 때 지구 표면을 이루는 대륙 규모의 지각 판 두 개가 만나는 부위 근처에서 단층선이 지나가기 때문에 지진이 쉽게 일어나는데다 육지가 서서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있다.
그러므로 알렉산드리아 일대에는 기원후 320년부터 1303년까지 약 1000년 동안 연쇄적인 지진이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365년 여름의 지진 강도가 가장 큰 것으로 추정하는데 지진과 동반하여 엄청난 해일이 알렉산드리아를 강타했다. 이 해일이 알렉산드리아의 건물을 비롯하여 해안 토지 일대를 쓸어버렸는데 학자들은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20퍼센트 정도가 물 속에 잠겼다고 생각한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기원전 305년~기원전 30년) 즉 클레오파트라의 궁전도 이때 가라앉았고 유명한 필론의 세계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인 파로스 등대도 이때 수장되었다고 추정한다. 물론 일부학자들은 지진보다는 엄청난 홍수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거대한 알렉산드리아가 사라진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도 살아남은 것이 있기 마련이다.
알렉산드리아 남서쪽에 있는 높이 30여 미터나 되는 커다란 돌인데 폼페이우스 기둥이라 불린다. 엄밀하게 폼페이우스의 기념탑도 아니지만 이집트와 연계되는 폼페이우스, 시저, 안토니우스 중 폼페이우스가 가장 먼저 이집트와 연계되었으므로 그의 이름을 붙인 것으로 생각한다. 더구나 이집트는 나일강의 혜택을 듬뿍 받은 관계수로로 유명한데 바로 폼페이우스 기둥 옆에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된 관개수로의 흔적도 보인다.
거대한 알렉산드리아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연안 지역 거의 전부 바다 밑으로 잠기자 이후 알렉산드리아를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인류 역사에는 정말로 엉뚱한 사람들이 나오게 마련이다.
프랑스와 여러 국가의 경제고문으로 봉직하던 프랑크 고디오는 알렉산드리아의 역사와 해변 상황을 흥미삼아 조사하던 중 매우 특이한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알렉산드리아 주변의 수심이 얕아 해변 상황을 잘 모르는 선박들이 좌초하기 일 수라는 것이다.
당연히 선장의 부주의를 탓하기 마련인데 고디오 박사는 달랐다.
그는 이집트의 역사에 대해 조예가 있으므로 곧바로 역으로 생각했다. 알렉산드리아 앞바다의 수심이 얕다면 1600년 전에 수장되었다는 클레오파트라 궁전과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파로스 등대의 유적도 매우 얕은 곳에 수장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는 수입과 명예가 보장되는 경제고문 직을 포기하고 곧바로 아마추어 고고학자로 변신하여 알렉산드리아 해변에 수장된 유적들을 직접 발굴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이와 같은 변신은 약간 내력이 있다. 그의 할아버지 고디오가 수중 탐험을 할 정도로 바다에 조예가 있었으므로 선천적으로 바다는 그의 터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사라진 알렉산드리아를 찾아보겠다고하자 미국의 케이블 채널 <디스커버리>와 유럽의 힐티재단이 그의 인양 작업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만큼 그의 아이디어가 획기적이었던 것으로 클레오파트라의 궁전을 발견한다는 것이 얼마나 환상을 주는 아이디어인지 잘 알 것이다.
인류 역사상 자신이 생각한 아이디어가 정확히 맞아 들어가는 경우가 많지 않은데 추후에 밝혀졌지만 알렉산드리아 해변은 클레오파트라가 사망할 때보다 연해 지역은 약 6미터 정도 가라앉았고 해수면은 1.2~1.5미터 가량 높아졌다고 한다..
고디오는 서두르지 않았다.
클레오파트라 궁전이라는 대어를 낚기 위해서는 경험이 필요하므로 1987년 <유럽 수중고고학연구소(Institut Europeen d'Archeologie Sous-Marine)>를 설립하고 곳곳에 있는 난파선을 탐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다행하게도 그의 작업은 계속 순조로워 첫 번 발굴 작업에서 1600년에 필리핀 해안에서 난파한 스페인의 큰 돛단배 산디에고를 성공적으로 인양하여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어느 정도 수장된 유물의 발굴에 경험을 쌓았다고 생각한 고디오는 드디어 알렉산드리아에 수장되어 있는 클레오파트라 궁전 발굴에 도전했다.
그러나 막상 발굴을 시작하려니 발굴 대상이 넓은 것은 물론 발굴 지역이 군사지역이라는 여러 가지 제약이 따랐다. 다행하게도 이집트 정부에서는 군사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제한적인 발굴 즉 약속된 지점을 이탈하지 않는 한 발굴을 허가했다.
1996년 11월. 총 약 3,550번의 잠수 끝에 고대 부두, 각종 인물상의 파편, 상형문자 비문 등이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고대 알렉산드리아 즉 클레오파트라의 왕궁은 물론 파로스 등대의 잔해들도 발견했다는 것이다. 2001년에는 알렉산드리아 인근 해역에서 8세기 지진으로 사라진 도시 헤라클레이온도 찾아내었니다.
그의 발표는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데 부족하지 않았다. 그는 최소한 3,000개가 넘는 건축용 돌들이 카페트와 같이 깔려 있으며 원형기둥들의 파편들도 수 백 개가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다.
학자들을 환호케 한 것은 클레오파트라의 궁전 터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12세로 추정되는 스핑크스를 인양했는데 프톨레마이오스12세의 얼굴에 사자 몸통을 결합한 모양이다. 또한 클레오파트라와 시저의 아들인 케사리온의 조상도 발견되었다. 케사리온이 단시간이기는 하지만 클레오파트라와 공동 파라오였기 때문에 조상이 제작된 것이다.
한마디로 2천여 년 전 클레오파트라가 살아있을 당시의 클레오파트라의 왕궁은 물론 고대 알렉산드리아 항구 및 파로스 섬, 안티로도스 섬 등이 바다 속에 고스란히 가라앉아 있었다. 고디오는 전차가 달렸던 도로는 지금도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말끔하다고 강조했다.
클레오파트라의 궁전 발굴이 고고학사에서 중요성을 차지하는 것은 클레오파트라 궁전을 비롯한 알렉산드리아의 유적들이 수중에 있었으므로 다른 유산들과는 달리 보존상태가 비교적 좋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알렉산드리아 수중에서 발견된 유물들로 클레오파트라가 살아있을 당대의 로마 실권자인 시저, 폼페이우스, 안토니우스 등을 비롯하여 신비에 쌓인 고대 문명사의 상당부분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알렉산드리아의 수중 유적으로 세계인들을 놀라게 한 것은 근래 발표된 알렉산드리아의 수중 유물의 보존 방법이다.
보편적인 방법은 수중에 매몰된 유물들을 인양하여 보존처리한 후 특별한 장소에서 엄격한 관리 하에 전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 당국과 학자들은 알렉산드리아의 특이한 지형 등을 포함하여 제반 조건 등을 여러 각도로 검토한 결과 기상천외한 방법을 채택했다.
수중 유물을 모두 땅 위로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수중 박물관으로 이용하겠다는 것이다. 해저에 유리 터널을 만들어 사람들이 직접 폐허가 된 바다 밑을 걸어 다니면서 주변을 보게 한다는 구상이다. 수심이 4.5미터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문제없다는 것이 장점이다.
근간 클레오파트라의 궁전은 물론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인 파로스 섬의 등대의 유적도 수중에서 직접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파로스 등대는 필론의 세계 7대 불가사의 즉 불가사의 원전에 나올 정도로 인간에게 많은 꿈과 환상을 준 것으로 유명하므로 세계 7대 불가사의 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클레오파트라의 궁전이 발견되자 학자들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다고 알려진 클레오파트라의 무덤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록에는 클레오파트라가 영묘(靈廟)에서 왕관을 쓰고 화려한 의상과 보석으로 치장한 채 금으로 만든 침상에서 죽음을 맞았다고 적혀있다.
학자들은 안토니우스가 죽어가면서 업혀와 마지막 포도주 한 모금을 마신 후 클레오파트라의 팔에 안겨 숨을 거둔 곳이 바로 영묘 속이라고 추정하며 클레오파트라와 옥타비아누스가 만난 바로 그곳이다.
로마의 역사학자 디오 카시우스는 안토니우스와 마찬가지로 클레오파트라의 시신도 향유를 발라 방부 처리했다고 기록했다. 그리스의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시신이 옥타비아누스의 명령에 따라 안토니우스의 곁에 묻혔다고 적었다.
반면에 일부 고고학자들은 클레오파트라의 무덤은 애초에 존재하기 어렵다는 반론을 제기하며 굳이 클레오파트라의 무덤을 찾느라고 고생하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존 베인스(Baines) 옥스퍼드대 교수는 사망 당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적'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무덤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근래 매우 놀라운 발표가 있었다. 그들의 무덤은 알렉산드리아의 수중도시가 아니라 다른 곳에 있었는데 그 흔적이 정말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집트의 대표적인 고고학자인 자히 하와스 박사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서쪽으로 약 45㎞ 떨어진 아부시르의 타포시리스 마그나 사원 유적 지하에 두 사람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하와스 박사는 사원 지하에서 약 120m의 비밀 터널과 여러 개의 비밀 방들을 찾아냈는데 이곳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조각상, 두 사람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 등 다른 사원 유적에선 발견되지 않는 유물이 상당수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클레오파트라의 무덤에 고고학자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영묘 안에 수많은 보물과 함께 클레오파트라가 묻혀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무덤이 발견된다면 20세기 초 이집트의 투탄카몽 파라오의 무덤이 발견된 이래 사상 최고의 무덤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팁 한 가지.
클레오파트라의 실체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지만 클레오파트라의 이름을 가진 명물은 지금도 남아있다. 일명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고 알려진 오벨리스크로 모두 세 개다.
첫째는 런던 템즈 강변, 둘째는 프랑스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 그리고 뉴욕의 센트럴파크에 위치한다. 이중 많은 이야기를 갖고 있는 것은 21미터 높이의 런던의 오벨리스크이다. 기원전 1450년 경 투트모스 3세 때 제작된 것으로 이집트 총독이 19세기 초 조지 4세의 대관식을 기념하여 기증한 것이다.
영국의 오벨리스크가 유명한 것은 당시 천문학적 운반비와 이를 운반하는 6명의 선원이 희생되어 남다른 에피소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은 이집트가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란 오벨리스크를 기증한다고 하자 오벨리스크의 무게가 200여 톤이 되므로 일반 선박으로는 이송할 수 없다고 판단한 후 오벨리스크를 안전하게 운반할 수 있는 특수 선박인 ‘클레오파트라호’를 건설했다. 이 배는 길이 28.3미터, 폭 4.5미터의 기다란 원통형 선박으로 선체는 10개의 방수구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배를 당대의 기선 올가호가 예인하는 계획인데 사상 처음으로 시도되는 운반 작전이라 클레오파트라호가 폭풍을 만나 선원 6명이 사망했다. 언제 침몰할지 모르는 상황이 되자 예인로프를 끊었다.
그런데 다행하게도 5일 후 클레오파트라호가 침몰하지 않고 스페인 북쪽 해안 앞바다에 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곧바로 영국은 앵글리아호를 파견하여 클레오파트라호를 템스강까지 끌고 왔고 현재 템즈 강변에 우뚝 솟아있다.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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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밝혀내는 죽음의 과학적 진실」, 월간과학교육, 사이언스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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