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만들어라>
핵분열반응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 중성자로 핵을 때려야 하고, 핵융합반응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입자를 큰 속도로 가열하여 충돌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작업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역으로 말한다면 우라늄의 연속 반응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막대한 예산과 인원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지구에서는 이런 때에 항상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 해결책을 제시한다. 변수는 역시 전쟁이었다. 오토 한의 자신이 얻은 실험 결과의 의미를 몰랐지만 마이트너는 앞에 설명한 것처럼 그들의 실험 결과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프리시는 마침 미국으로 출발하려던 보어에게 독일인 한이 발견한 핵분열에 대한 실험을 설명했다.
중요한 것은 한이 독일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가 나치에 협조하여 핵폭탄 개발에 발 벗고 나선다면 세계는 온통 나치의 치하로 들어갈 것으로 과학자들은 예상했다. 추후에 알려진 사실은 한은 독일에서 원자폭탄이 개발되는 것을 반대하여 태업 아닌 태업으로 원자탄 개발을 지연시키려고 노력했음이 밝혀졌다.
여하튼 한의 의도를 모르는 과학자들은 나치에 의해 원자폭탄이 개발된다는 것을 가장 큰 악몽으로 생각했다. 결국 나치의 위협을 피해 미국에 망명 중이던 평화주의자 아인슈타인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우라늄의 붕괴가 지닌 잠재력을 지적하면서 나치에 앞서 핵무기를 개발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편지를 썼다.
아인슈타인의 편지는 1939년 8월 2일자인데 그 편지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달된 것은 10월 11일이었고 그 동안에 유럽에서는 우려하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마침내 미국은 아인슈타인의 편지가 요구하는 대로 원자폭탄 개발에 착수했고 실제로 원자폭탄이 개발되었다.
한편 그동안 수많은 학자들이 원자의 속성 등에 대해 연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내용이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비로소 알려진 것은 그 당시까지 어떤 에너지도 방출된 적이 없기 때문에 학자들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마치 엄청난 부자라도 돈을 한 푼도 쓰지 않는다면 누구도 그가 부자인지를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는 관찰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원자 분열의 중요성을 간과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바로 그 맹점을 아인슈타인은 정확하게 집어낸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인류 사상 가장 돋보이는 학자로 인식되는 이유이다.
이관수 박사는 일반적으로 아인슈타인의 편지가 미국이 원자폭탄을 개발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약간 다르다고 지적했다. 아인슈타인의 편지를 계기로 설치한 ‘우라늄위원회'는 딱 두 번 모임을 가졌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역으로 우라늄위원회보다 아인슈타인의 편지 자체가 큰 비중을 갖고 있었다는 설명도 된다. 아인슈타인이 서명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설명되기 때문이다.
사실 아인슈타인의 편지는 아인슈타인이 작성한 것이 아니라 아인슈타인의 제자로 헝가리 출신 물리학자인 레오 실라르드(Leo Szilard)가 작성한 것이다. 1898년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실라르드는 부다페스트 공과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다가 물리학에 흥미를 느끼고 베를린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열역학이 그의 전공이었는데 그의 천재성을 갈파한 아인슈타인은 1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적극 주선했다.
그러므로 과학사가들은 지구상의 원자폭탄은 실라르드에 의해 태동되었다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가 원자폭탄을 구상한 것은 전설적이다. 1933년 9월 어느 날 대영박물관이 있는 런던의 럿셀 광장 앞에서 신호가 바뀌는 것을 기다리고 있던 실라르드는 교통신호등이 청색으로 바뀌는 순간 하나의 생각을 번개와 같이 떠올렸다.
‘알파입자로 원자핵을 때려주면 이 핵이 깨져서 다른 원소의 핵으로 바뀐다. 이 반응 때 엄청난 에너지가 나온다. 이 반응을 천천히 인공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면 막대한 에너지를 얻는 하나의 새로운 방법이 나올 수 있다.’
그의 생각은 중성자가 발견되었으므로 알파입자 대신에 중성자를 사용한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가 6년 전에 생각했던 아이디어가 독일인 오토한에 의해 실용화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실라르드는 독일에서 핵폭탄이 먼저 개발된다면 최악의 상황이 될 수 있다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동료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을 듣고 경제학자인 알렉산더 삭스는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전할 때 루즈벨트 대통령이 존경하는 아인슈타인이 직접 편지를 작성했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이에 용기를 얻은 실라리드는 독일에서 원자폭탄을 만들 가능성과 히틀러가 그것을 먼저 만들었을 때 인류에게 미칠 해악을 설명하는 편지를 작성했고 아인슈타인에게 서명을 요청했다. 아인슈타인은 핵분열 반응의 발견이나 이용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그가 지닌 명성과 권위 때문에 편지에 서명을 요청받은 것이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실라르드의 설명을 듣고 다음 내용의 편지에 흔쾌히 서명했다.
‘지난 4개월 동안 프랑스의 졸리오와 미국의 페르미, 실라르드 등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일련의 연구는 한 번에 많은 에너지와 새로운 원소를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이것은 가까운 장래에 새로운 형태를 무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중략) 이 연구의 중요성을 각하에게 알리고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은 나의 의무라고 믿습니다. 만일 그것이 인정된다면 빠른 행동을 촉구합니다. (중략) 이 무기는 단순한 형태의 폭탄으로 투하지역을 단 번에 파괴시킬 수 있는 막대한 힘을 갖고 있으며 만일 원폭 1개를 선박으로 어떤 항구까지 운반하여 폭발시킨다면 항구 전체가 완전히 파괴되고 그 주위는 폐허가 될 겁니다. (중략) 독일은 그들이 장악한 체코슬로바키아 광산으로부터 우라늄 반출을 금지하고 있어 독일에서도 핵무기 개발이 진행되고 있을 수 있다고 이해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관계자들을 만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편지가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편지 중 하나로 거론하는 것은 미국이 핵무기를 개발토록 하는데 방아쇠 역할을 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라르드는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지만 맨해튼 프로젝트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특히 제1호 원자폭탄이 개발되어 1945년 7월 16일일 폭발에 성공하자 그 위용을 실감한 그는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원자폭탄을 실전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진정서를 제출했다. 연쇄반응에 의한 핵분열이라는 개념을 처음 생각해내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전력을 기우렸던 당사자로서 원폭의 파괴력이 가져올 무서운 핵무기 경쟁을 예견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진정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이 투하되었다. 그는 이후 보다 조직적으로 반핵운동을 벌이는데 이 입장은 아인슈타인과 비슷하다. 1949년 이후 실라르드는 시카고 대학에서 분자생물학을 연구했고 1964년 68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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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하튼 프로젝트 탄생>
미국에서 원자폭탄을 만을 수 있었던 것은 또 다른 행운이 따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핵분열에 있어 가장 중요한 권위자인 페르미와 양자론의 대가 보어가 마침 미국과 영국에 망명해 있었던 것이다.
페르미가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 것은 당시의 정황 때문이다. 페르미가 중성자 실험을 계속하는데 유럽의 정치 정세는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등이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원래 이탈리아는 독일과 적대적이었으나 이티오피아 문제를 계기로 독일과의 관계가 호전되었고 이어서 독일-이탈리아 체제가 성립되었다.
히틀러가 유대인 추방을 기본으로 한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영향이 이탈리아에까지 파급되었다. 당시 페르미에게는 히틀러를 피해 도망쳐 온 에르윈 슈뢰딩거가 있었다. 그는 유대인은 아니었지만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데 불만을 갖고 항의의 의사로 베를린 대학 교수직을 버리고 오스트리아의 그라츠 대학으로 옮겼다. 그런데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합병되자 그는 걸어서 그곳을 탈출하여 로마의 페르미에게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
문제는 이탈리아가 독일과 끈끈한 줄을 만들더니 이탈리아에서도 유대인을 외국인으로 취급하는 ‘라사의 선언(인종선언)’이 발표되었다는 점이다. 이어서 ‘반유대인법’이 통과되었다. 페르미의 부인이 유대인이므로 페르미도 신변에 위험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페르미가 1938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되자 스톡홀름의 노벨상 수상식에 가족이 함께 참석하는 것을 계기로 미국으로 망명을 결행했다. 미국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에서 물리학 교수 자리를 제의하고 있었으므로 안성맞춤이었다.
보어의 경우도 대동소이하다. 히틀러가 독일에서 유대인 배척운동을 주도하자 보어는 많은 유대계 과학자들을 코펜하겐의 연구소로 불러 안전한 피신처를 제공했다. 그러나 1940년 독일이 덴마크를 침공하자 유대계 혈통인 보어는 위험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자주 반나치 감정을 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과감하게 탈출을 시도했다. 레지스탕스에서 제공한 낚싯배를 타고 가족과 함께 스웨덴으로 피신한 후 영국의 모스키토 폭격기의 빈 폭탄 장착대에 숨어서 영국으로 갔다.
덴마크를 탈출하기 전 그는 금으로 제작된 자신의 노벨상 상패를 병에 넣고 산성 용액으로 녹여서 감추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귀국한 그는 병에 녹아 있던 금을 회수하여 상패를 다시 주조했다. 여하튼 안전한 영국에 도착하자 보어는 독일인보다 앞서 원자폭탄을 개발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고 1939년 1월 페르미가 미국에 온 2주일 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가서 본격적으로 원자폭탄 제조에 참여한다. 1975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는 그의 아들 오게 보어도 미국 로스알라모스에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미국에 도착한 페르미를 주축으로 실제로 핵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폭탄을 개발할 수 있는가를 본격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는 연쇄반응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물질로 우라늄235, 플루토늄239를 제시했다. 천연자원으로 많이 부존돼있는 우라늄238을 사용치 못한 것은 우라늄238과 우라늄235의 차이점 때문이다.
우라늄235는 중성자가 1eV 이하에서 매우 큰 핵분열 가능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중성자의 속도 즉 에너지를 이 이하로 낮추는 것이 효과적이다. 반면에 우라늄238은 수MeV 이상에서야 비로소 핵분열이 가능해진다. 이 이하의 에너지 영역에서는 상대적으로 큰 중성자 흡수단 면적을 가지고 있다. 중성자가 이 영역의 에너지를 가지는 경우 대부분이 우라늄238에 흡수되어 우라늄235에 의한 핵분열이 일어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중성자의 에너지를 낮은 에너지 영역으로 떨어뜨려 우라늄238에 흡수되지 않고 우라늄 235와 반응하도록 유도하면 핵분열이 효과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이때 우라늄235의 특성상 2개 이상의 중성자를 재생산하여 연쇄반응이 이루어진다. 이를 실현한 사람이 바로 페르미이다. 그러나 기초적인 원리가 증명되었다고 하지만 연쇄반응을 준비하려는 컬럼비아 대학 물리학자들에게는 두 가지 난관을 극복해야 했다.
첫째는 우라늄 분열 시 방출되는 중성자들이 너무 빨라서 우라늄의 분열을 유발시키는 핵 폭탄으로는 효율적이지 못한 데 따른 어려움이었고 둘째는 통상적인 조건 하에서 핵분열 시 방출되는 중성자들이 다른 우라늄 원자들을 쪼갤 새도 없이 공기 중으로 빠져나가거나 다른 물질에 흡수되는 데 기인한 중성자의 손실이었다. 다시 말해 연쇄반응을 촉발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극소수의 중성자만 핵분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연쇄반응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중성자들의 속력과 손실을 최대한 줄여야 했다. 페르미는 로마에서 이미 파라핀과 물의 중성자에 대한 특이한 효과를 알고 있으므로 우라늄의 핵분열에 대한 연구를 물 속에서 시작했다. 물리학자들의 용어로 말하면 물을 감속재로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여러 달에 걸친 연구를 수행한 결과 물이나 수소를 함유한 다른 물질들은 모두 감속재로 적당치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는 수소가 너무 많은 중성자를 흡수하여 연쇄반응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페르미는 탄소를 감속제로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순도가 높기만 하면 탄소는 중성자를 충분히 감속시킬 뿐만 아니라 물에 비해 중성자의 흡수도 적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연쇄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기발한 장치를 고안했다. 이 장치는 우라늄과 매우 순도가 높은 그라파이트를 겹겹으로 쌓았다. 즉 순수한 그라파이트 층과 우라늄 덩어리를 포함한 그라파이트 층을 교대로 배열하여 만든 것이다. 이 장치가 바로 원자로이다.
처음에는 시카고 근교 숲 속에서 원자로를 건설하려고 계획했지만 마침 노동자들의 파업이 일어나 곧바로 착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시카고 대학 축구장인 스태그필드의 서쪽 관람석 아래에 있는 스쿼시 코트에 건설했다. 원자로는 극반경 309센티미터, 적도반경 388센티미터의 타원형으로 제작되었다. 우라늄의 총량은 6톤이었고 감속재로는 흑연이 사용되었다. 중성자 흡수재로는 카드뮴 막대기가 사용되었다. 따라서 우라늄235와 흑연 그리고 카드뮴을 적절히 이용하여 연쇄반응을 조절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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