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A는 이중나선 구조>
핵산 구조를 밝히는데 도전장을 던진 사람은 1954년에 이미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라이너스 폴링(Linus pauling)이다. 그는 우선 자신이 노벨상을 수상하게 한 분야인 X선 회절 연구를 참조하여 분자의 축소 모형을 만들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커다란 분자는 여러 번의 연결로 다양한 대칭을 이룰 것이라는 기존 학자들의 일반적인 관념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다. 폴링은 나선형이 ‘당량(當量)이지만 비대칭인 두 물체의 일반적 관계’를 표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 하나의 세포 속에 들어 있는 DNA를 풀어서 직선으로 펼치면 그 길이가 무려 2.4미터에 이른다. 특히 살아 있는 모든 세포의 생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어떤 단백질 물질이 나선형 가닥처럼 생겼음을 볼 때 DNA구조는 나선형이 틀림없다고 추측했다.
그의 예측은 정확했지만 그에게 노벨상이라는 두 번째의 과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DNA는 3중 나선형을 취한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의 모형은 2중 나선형이라는 정답에서 약간 벗어난 것이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왓슨(James Dewey Watson)과 크릭(Francis Harry Compton Crick)은 DNA가 3중 나선형 구조일 것이라고 주장한 폴링의 견해를 검토하고 있었지만 확신을 할 수 없었다. 이때 영국의 윌킨스(Maurice Huge Frederick Wilkins)는 핵산 분자가 규칙성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뉴클레오티드와 뉴클레오티드 사이의 거리보다 훨씬 더 큰 간격으로 반복된다고 발표했다. 그 역시 핵산 분자가 어떤 특정적인 반복 형태가 나타나는 나선의 형태를 갖고 있다고 했다.
이 사실에 흥미를 느낀 왓슨과 크릭은 윌킨스를 찾아갔다. 윌킨스는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의 연구원인 로잘린 프랭클린(Rosalind E. Franklin, 1920~1958)이 찍은 한 장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DNA분자를 세로로 내다본 사진으로 꼬여있는 두 갈래의 DNA 줄기와 그것의 중심을 수직으로 싸고 있는 염기의 그림자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 지름은 20Å, 염기와 염기의 간격은 3.4Å 정도였다. 이 사진이야말로 왓슨과 크릭이 찾고자 한 것이었다. 제임스 왓슨은 당시의 순간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사진을 본 순간 입이 쩍 벌어지고 맥박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그 패턴은 전에 찍었던 것들보다 더 단순했다. 더구나 사진에 뚜렷이 드러난 검은 X 모양은 나선형 구조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프랭클린의 사진을 기초로 마치 회전 계단과 같은 모형에 당-인산의 두 뼈대는 분자의 바깥쪽에서 서로 꼬여 있고, 그 속에 수소 결합으로 연결된 염기쌍이 들어있는 2중 나선의 구조 모형을 폴링보다 2개월 후에 발표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폴링이 이미 발표한 3중 나선 구조를 2중 나선 구조로 바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이래 과학 분야 중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라고 칭하는 2중 나선 구조의 발견이다. 그들의 발견은 생물학 전반에 혁명을 가져왔고, 유전 연구 부분을 완전히 뒤바꾸었으며 의학에서도 광범위한 발전을 일으키게 했다. 왓슨과 크릭이 제시한 DNA 모형은 다음과 같다.
첫째, DNA는 2중 나선 형태를 갖고 있다.
둘째, DNA분자는 두 줄기로 당과 인산기를 골격으로 해서 만들어진다.
DNA를 이루는 기본단위, 즉 당, 염기, 인산으로 이루어진 구조를 뉴클레오티드라고 부르므로 결국 DNA분자는 뉴클레오티드가 연속적으로 결합된 고분자화합물로 볼 수 있다. 각각의 뉴클레오티드는 매우 강한 공유결합으로 결합되어 있어 특정한 효소의 작용이 없으면 끊어지지 않는다.
셋째, 두 줄기의 DNA의 염기들은 반드시 아데닌(A)은 티민(T)과, 시토신(C)은 구아닌(G)과 짝을 짓고 수소결합을 한다.
DNA의 결합은 특별한 규칙에 의해 이루어진다. 즉 아데닌(A)은 티민(T)과 결합하고 시토신(C)은 구아닌(G)과 결합하며, 결코 다른 경우의 결합은 생기지 않는다. 상대편 DNA 골격에 매달린 염기의 순서는 반대쪽 염기순서의 음화와 같은 관계가 있는 것이다.
나선 구조를 지퍼로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염기는 지퍼의 이빨에 해당하고 당의 사슬은 이빨을 붙인 헝겊에 해당한다. 이 두 가닥이 서로 상호보완적이며 수소로 연결되어 있는데 두 가닥이 풀렸다가 각 염기의 수소 결합에 의한 친화력으로 원래 구조와 재결합하기도 한다. 이것은 DNA가 자기 복제에 안성맞춤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이중 나선에서 풀려진 한쪽 염기의 배열법이 결정되면 자동적으로 다른 쪽 염기의 배열법이 정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나선구조가 풀리면서 각각의 기둥에 새로운 뉴클레오티드가 차례로 붙어 새로운 DNA를 만들면서 새로 생겨난 DNA는 원래 DNA를 정확하게 복제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생물체에서 분리되는 DNA의 구조는 X선 회절 및 화학적 구성으로 보아 서로 비슷하며 생물체 전반에 걸쳐 보편적인 유전물질임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같은 종의 개체들 사이에 있는 차이점과 다른 생물들의 개체 사이의 차이도 모두 DNA분자 안에 연결된 4개의 염기 총 수와 다양한 조합에 의해 결정된다.
<남자와 같이 자란 프랭클린>
DNA 구조의 해명은 20세기 생물학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꼽힌다. DNA가 이중나선형 구조를 가진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우리는 DNA가 어떤 방식을 통해 복제되고 후손에게 전달되는지 파악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왓슨과 크릭, 그리고 윌킨스는 DNA의 구조를 밝힌 공로로 196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는데 학자들은 이들의 수상을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정작 노벨상을 받아야 할 당사자 두 명이 빠져있다는 것이다. 한 명은 로잘린 프랭클린(Rosalind E. Franklin, 1920〜1958)이고 다른 한 명은 샤가프다.
프랭클린은 1920년에 영국 런던의 유복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근로자 대학(Working Men's College)의 선생으로 일했는데 평등과 봉사를 신념으로 삼아 프랭클린을 그녀의 남자 형제들과 똑같이 대했고, 심지어 그녀에게 남자아이들의 장난감을 주어 놀게끔 했다.
프랭클린은 런던 시내에 있는 세인트 폴 여학교(St Paul's Girls' School)를 다녔는데 물리와 화학을 좋아했다. 세인트 폴 여학교는 과학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는데 그곳의 과학 수업은 웬만한 대학 수준이었다고 한다. 1938년에 프랭클린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거튼 칼리지에 입학했다. 뉴턴이 다녔던 트리니티 칼리지는 수학과 과학으로 유명했지만 여학생을 받지 않았으므로 남녀공학인 거튼 칼리지를 택한 것이다. 당시 프랭클린의 주임교수인 노리시(Ronald Norrish)는 프랭클린이 ‘실력은 있지만 완고하고 고집이 세서 가르치기 힘든 학생’이라고 평가했다. 보통 여학생들과 달리 프랭클린은 자기 생각이 분명하고 열성적으로 공부했기 때문에 유별나게 보였던 것이다.
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프랭클린은 1942년 영국 석탄활용연구협회(British Coal Utilisation Research Association)에서 직장을 잡았다. 그때 프랭클린의 나이는 22살이었다. 그 연구소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최신 연구에 밝은 젊은이들을 연구원으로 뽑았다. 그곳에서 프랭클린은 자신이 사용할 장치를 직접 만든 후 석탄을 연구하는 새로운 실험 방법을 고안해 냈다. 그녀는 석탄 결정의 구조를 해명하는 연구로 1945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1947년 프랭클린은 프랑스 파리의 국립중앙화학연구소로 자리를 옮겨 3년 동안 근무했다. 여기서 그녀는 메링(Jacques Mering) 박사의 도움으로 X선 회절을 통한 결정학의 전문가로 성장했고 1951년에 영국으로 돌아와 런던 대학교의 킹스 칼리지(King's College)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가 킹스 칼리지로 옮긴 것은 랜달 경(Sir John Randall)이 의학에 X선 결정학 연구가 필요하다며, 프랭클린에게 X선 결정학 연구에 필요한 기구들을 설치하고 조정하는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3년 동안 일하기로 했지만, 불과 8개월 만에 주어진 임무를 완벽하게 끝냈다. 덕분에 프랭클린은 3년 계약에서 남은 2년 4개월을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었으므로 그녀가 킹스 칼리지의 윌킨스 교수와 함께 DNA의 X선 사진을 찍는 실험을 시작할 수 있었던 연유다. 그런데 프랭클린은 윌킨스가 없는 동안에 고용되었고 윌킨스는 프랭클린을 연구원으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조수로 간주했다는 것이 불씨였다.
모든 종류의 파동은 회절이라는 독특한 특징을 나타낸다. 파동이 장애물 근처를 지날 때 일어나는 파동의 굴절(방향 전환)을 암시한다. 파장이 긴 파동은 파장이 짧은 파동보다 더 큰 각도로 회절한다. 회절과 굴절은 다른 이야기다. 기본적으로 회절은 ‘빛이 직선으로 이동한다’는 규칙과 반대로 직선 전달 너머 소규모 빛의 확산과 관련된다. 전파가 지구 곳곳을 이동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전리층 때문이지만 어느 정도는 회절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회절 효과의 관찰로 인해 파동 같은 빛의 성질이 입증될 수 있었다. 폰 라우에는 황화아연 결정을 X선으로 실험한 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짧은 파장 때문에 이 파동은 시각적으로 원자 사이의 거리를 드러낼 수 있지만 빛처럼 더 긴 파장의 복사는 빠져 나간다. 이 실험은 X선의 파동 속성에 대한 최초의 결정적 증거를 제시했다.’
다소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X선은 연구에 사용할 수 있는 충분히 짧은 파장을 갖고 있다. 파장이 알려지면 회절 패턴은 결정 원소의 구조와 간격을 드러나며 간격이 알려지면 파장을 측정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아들 윌리엄 로렌스 브래그(William Lawrence Bragg, 1890〜1971)와 함께 1915년 노벨물리학상을 공동으로 수상하는 윌리엄 헨리 브래그(William Henry Bragg, 1862〜1942)는 X선이 중요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현미경은 특정 거리까지만 갈 수 있다. 원자가 여러 물체에 독특한 성질을 주도록 작용하는 법을 이해한다면 도달해야 할 지점에 훨씬 못 미친다. 이는 금속 속 개별적인 결정의 존재를 증명하지만 결정 속 원자의 배열은 증명하지 못한다. X선은 새로운 희망이 있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과학자들은 유전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아내는 관건으로 X선 회절 사진을 주목했다. DNA의 X선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보면 DNA가 어떤 모양인지 알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투명한 실 같은 DNA는 아주 가늘고 잘 부서지기 때문에 X선 사진을 선명하게 찍기가 쉽지 않았다. 프랑스에서 X선 결정학의 전문가로 근무했던 프랭클린은 자신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선명한 X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고안했고, 덕분에 점점 더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점에 관한 한 프랭클린은 윌킨스에게 고마움을 표시해야 한다. 프랭클린이 최고의 DNA 시료를 입수할 수 있었던 것은 스위스의 어느 학자가 송아지의 흉선(가슴샘)에서 추출한 것을 윌킨스에게 준 것을 연구소 소장 존 랜들이 프랭클린에게 전해준 것이다.
여하튼 프랭클린의 연구는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킹스 칼리지의 분위기는 프랭클린에게 썩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다. 킹스 칼리지는 영국 국교회의 전통을 따라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한 곳이므로 남자 교수들은 프랭클린을 같은 과학자로 대우하지 않았다. 심지어 여자들은 교직원 식당에 들어갈 수 없고 학생들과 함께 식사하도록 되어 있었다.
프랭클린은 혼자서 연구하는 타입이었고, 자신의 연구가 완전하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그 결과를 발표하기를 꺼렸다. 이러한 성향은 윌킨스가 연구실을 운영하는 방식에는 맞지 않아 사사건건 부딪쳤지만 여하튼 프랭클린의 연구는 성과를 보기 시작했다. 프랭클린은 미세한 DNA 가닥을 묶고 이것을 X선으로 촬영하는 방법을 통해 DNA가 두 가지 형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즉 DNA분자는 쉽게 물과 결합되거나 건조된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세포는 대부분 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DNA는 늘 물과 상호작용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DNA 표본이 말라버린다면 구조가 변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른 표본이 사진을 찍기 수월했다. 그녀는 이것을 A형이라고 했다. 반면에 B형인 젖은 표본은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고 교차되는 선만 보여주었다. 특히 X선은 인산기가 DNA 분자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당시에 플랭클린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교차된 선이야말로 DNA가 나선형 구조로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표시였다.
나선형은 X선 사진의 각도에 따라 나타나기도 하고 나타나지 않기도 했다. 긴 축을 위에서 바라보면서 X선 촬영을 했을 때는 통이나 관 모양으로 나타났고 회절무늬로 보아서는 그것이 실제로 나선형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옆에서 촬영했을 때는 DNA 분자가 지그재그 형태나 십자형 무늬였다. 이것은 나선 구조의 특성을 나타난다. 1952년 5월, 프랭클린은 DNA의 B형에 대한 선명한 사진을 찍는 데 성공했는데 사진은 DNA가 나선 구조로 되어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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