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세계유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운하 : 프랑스 미디 운하

Que sais 2020. 8. 31. 18:22

youtu.be/UiQAadvrrGI

대서양과 지중해를 연결하려는 생각은 로마 시대의 네로 황제도 구상했을 만큼 매우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가 점령한 북대서양의 영국에서 로마로 가기 위해서 유럽 반도를 통과하지 않고 배를 타는 것이 물동량 수송에 유리하지만 반드시 지브롤터를 지나야하므로 매우 먼 거리를 항해해야 했다.

그런데 대서양과 인접해 있는 프랑스의 보르도(Bordeaux)를 통해 뚜르즈(Toulouse), 나르본(Narbonne)을 관통하는 수로를 만들면 곧바로 대서양에서 지중해를 통해 로마로 연결될 수 있었다.

 

미디운하 구역도

그러나 당대의 기술과 제반 여건이 불비하여 실제 운하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은 여러 번 시도되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수많은 운하 건설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지만 17세기의 루이 14(16381715)는 프랑스 내의 운하를 건설하는데 누구보다도 관심이 많았다. ‘짐이 국가다라는 호방한 생각으로 유럽 세계의 패자가 되겠다는 루이14세가 운하에 큰 관심을 보인 것은 경제적인 목적도 있지만 필요한 곳에 군사를 곧바로 보낼 수 있다는 정치적, 군사적 이점 때문이다. 프랑스가 당대의 패자가 되기 위해서는 군대를 적시적소에 보내는 것이 관건인데 운하처럼 적절한 것은 없었다. 당대에 각국이 해군력 증강에 힘을 기우렸는데 바다를 통해서는 인근 해양국들의 견제와 시기를 받을 수 있지만 프랑스 내로 운하를 건설하여 물동량을 운반하는 것은 누구의 간섭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이런 대 작업에는 특별한 사람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실제로 미디운하의 건설은 한 야심적인 사람의 작은 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지중해 남부에 위치한 베지에(Béziers)에서 태어난 피에르 폴 드 리끄(Pierre Paul de Riquet, 16041680)이다. 12세기에 이탈리아로부터 이주한 그의 선조는 대대로 랑구독 지방(Languedoc)에서 대농장을 경영하는 대지주로 그의 아버지 길롬 드 리끄(Guillaume de Riquet)도 운하 건설에 관심을 갖고 계획에 착수했으나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치자 포기한 전력을 갖고 있었다.

 

폴드리끄의 동상

아버지로부터 운하 건설에 대한 이야기를 수없이 듣고 자란 폴 드 리끄는 아버지가 포기한 운하 건설을 자신이 실현시키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대륙을 관통하려는 운하를 어려서의 꿈만 갖고 실현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금이었다. 그 자신이 엄청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운하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마침 국가에 소금을 공급하는 전매권한을 확보했는데 이것이 그에게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게 만들어 준 효자 역할을 한 것이다.

자금을 어느 정도 확보하자 그는 아버지 때부터 꿈꾸던 운하 건설 계획에 착수했는데 이 계획을 실현에 옮기려면 두 가지 문제점이 해결되어야 했다. 첫째는 운하 주변을 근거지로 하고 있는 봉건 귀족들이 갖고 있는 땅을 관통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는 순조롭게 운하를 건설할 수 있는 건설 기술이 축적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 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프랑스의 지형적인 문제이다. 운하가 프랑스 내륙을 관통하려면 가론느(Garonne) 지방에서 중간에 우뚝 솟아있는 쇠이 드 노루즈(Seuil de Naurouze) 지방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곳을 어떤 방법을 사용하여 물이 통과할 수 있는 수로를 건설하는가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점이었다. 또한 수로를 흘러내리는 대량의 물을 어떤 방법으로든 안정적으로 확보해야 했다.

첫째 문제는 대형 토목 공사를 통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지만 년 중 중단 없이 수로를 관통할 수 있는 물을 공급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방안이 제시되었으나 그 어떤 것도 실현성이 보장되지 않았다.

이때 드 리끄는 수로가 계획된 지역 인근 동쪽에 있는 검은산(Montagne Noire)에 주목했다. 어려서부터 검은산을 자주 방문했던 그는 검은산에서 나오는 물을 셍 훼레오(St. Ferreol)에 커다란 저수지(호수)를 만들어 저장한 후 규칙적으로 물을 흘리면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인공 저수지(호수)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인공 저수지를 만들어 수로에 필요한 물을 공급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도출되자 드 리끄는 여러 번의 현장조사를 통하여 자신의 아이디어가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프랑스 정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당대에 루이14세는 세계를 제패할 꿈을 갖고 있었으므로 군사적인 목표를 위해서 드 리끄의 프랑스 남부를 관통하는 미디 운하 뿐만 아니라 북부의 릴(Lille)에서 베르사이유(Versailles), 동부의 스트라스부르그(Strasbourg)에서 루이지안(Louisiane)까지 관통하는 운하 건설에도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드 리끄의 여삼천 제안을 곧바로 승낙했다. 강력한 루이 14세가 운하 건설을 승낙했다는 것은 운하 건설에 가장 큰 걸림돌 중에 하나였던 봉건 귀족들의 반대를 원천적으로 제거해 주었다는 것을 뜻한다.

 

셍훼레오 저수호

운하 건설에 가장 큰 문제점 중에 하나가 사라지자 1661년 드 리끄는 자신의 미디 운하 건설계획안을 1661년 루이 14세와 프랑스의 경제장관인 콜베르(Colbert)에게 직접 보고했다.

콜베르는 그의 설명을 듣자마자 운하가 건설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지만 그에게 담보를 요구했다. 즉 루이14세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그의 재산으로 일부 구간이라도 운하를 건설하여 운하가 확실히 건설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콜베르의 조건에 맞도록 자신의 자금만으로 일정 구간의 운하를 건설하겠지만 대신 운하가 건설되면 운하를 관리하는 운용권을 요청했다. 그의 요구는 승낙되었고 약속대로 직접 자금을 투입하여 셍 훼레오 저수지 건설 설계에 착수했고 공사 계획과 준비가 차질 없이 진행되자 1666년 프랑스 정부에서는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드 리끄가 어려서부터 갖고 있던 운하 건설의 꿈은 그의 나이 63살인 1667년에 비로소 시작되었다. 공사는 3곳으로 나누어져 시행되었는데 드 리끄는 검은산으로부터 나오는 물을 셍 훼레올 저수지에 담는 것은 물론 뚜르즈에서 중세시대의 성채로 유명한 까르까손(Carcassonne)을 통과하여 트레베(Trèbes)까지 공사를 완성했다. 그는 그동안 번번이 실현 불가능이라고 지적되었던 쇠이 드 노루즈(Seuil de Naurouze) 지방의 난공사도 문제점 없이 해결했다.

 

미디운하에서 본 까르까손 성

프랑스 정부는 드 리끄의 운하 건설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실제로 수로로 물이 차질 없이 흘러가자 트레베에서부터 목적지인 세트(Sète) 항구까지 자금을 투입하기 시작했다. 운하가 건설되기 전까지 작은 항구에 불과했던 세트는 운하개통이후 지중해에서 중요한 항구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미디 운하 공사는 준공되는 구간마다 순차적으로 개통되었고 운하의 관리권을 확보한 드 리끄는 막대한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결국 총 245킬로미터에 달하는 운하는 착공한지 14년 만인 1881년에 완성되었다. 그가 건설한 뚜루즈(Toulouse)로부터 지중해에 면하는 세트(Sète)까지를 정시옹(Canal de Jonction) 운하라고 부른다. 이 운하는 뚜르즈에서 반대 방향으로 보르도까지의 라테랄 운하(Canal Latéral)로 연결되고 이어서 대서양까지 이어지므로 프랑스는 운하로 대서양과 지중해가 연결될 수 있었다. 로마시대부터의 대서양과 지중해를 연결하려는 꿈이 드디어 실현된 것이다.

아쉬운 것은 막상 16815월에 열린 운하의 개통식에 운하 건설의 당사자인 드 리끄는 참석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는 168010월에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미디운하 개통 포스터

미디 운하는 328개에 달하는 대형 건설이 수반되었는데 이 중에는 126개의 다리, 64개의 수문, 165미터에 달하는 터널, 수도교, 배수관 등이 포함되었다. 리브롱(Libron) 수로는 드 리끄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이 구간은 해수면에서 고작 13미터밖에 높지 않으므로 도수교 건설도 어려운 난점이 있었다. 그런데도 때때로 폭우가 내리면 수로 전체를 강타할 우려조차 있었다. 드 리끄는 수로의 물길을 아치로 만든 구조물 두 개로 나누어 통과토록 했다. 19세기 중반에는 그의 아이디어를 더욱 보완하여 레일로 움직이는 개폐문이 아치와 연결되어 관통하는 물을 조절할 수 있도록 했다.

 

미디운하 갑문통과 방법

그러나 드 리끄는 운하를 건설하는데 단순히 토목공학이나 기계적인 방법을 이용하여 수로를 개통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자연적인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각 장애물에 맞는 공법을 스스로 개발하면서도 친환경적인 요소를 강조했다. 자신의 운하 건설이 자연을 파괴하는 것임을 알고 새로 건설되는 대형 구조물에 예술성을 부여하는 것은 물론 공사 구간과 파괴된 곳의 이질감을 가능한 한 없애기 위해 파라솔 소나무(pins parasol), 플라타나스, 실편백나무 등을 심어 각종 인공구조물들과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이의 일환으로 건설된 살레르도드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운하 경관으로 알려진다.

살레르도드의 파라솔소나무

 

 

 

그가 건설한 미디 운하 전구간이 전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운하 공간 중의 하나라고 알려진 이유이다.

운하의 개통으로 프랑스의 주 생산물이라고 볼 수 있는 포도와 곡물 운송이 뚜루즈로부터 세트까지 단 4일에 주파할 수 있게 되자 운하는 항상 붐볐고 프랑스의 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프랑스의 운하가 성공리에 운전되자 1777년부터 1789년까지 추가로 로빈 운하(Canal de la Robin)가 건설된다. 이것은 로빈 항구에서 지중해의 요충지 나르본(Narbonne)을 경유하여 누벨항구(Port la Nouvell)까지 연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디 운하란 정시옹 운하와 로빈 운하 두 개를 합쳐서 말한다.

 

미디 운하 종착역 나르본

대서양과 지중해를 연결하는 운하는 기차가 출현하는 19세기 중반까지 호황을 누리지만 그 후부터 급격히 물동량이 줄어들어 1970년에는 산업적인 운하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1996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됨에 따라 미디운하는 관광지로 개발되어 매 년 수백 만 명의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특히 요트로 운하를 관통하려는 사람들이 전세계적으로 몰려들고 있어 관광 최전성기인 여름에는 극심한 배의 교통정체를 빚기도 한다.

 

정체를 부르는 미디운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