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세계유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랍풍 다리 : 스타리모스트

Que sais 2020. 8. 31. 18:15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랍풍 다리로 알려진 스타리모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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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모스타르 옛 시가지의 다리(Old Bridge Area of the Old City of Mostar)>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랍풍의 다리라고 알려지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모스타르(Mostar)에 있는 스타리모스트(오래된 다리라는 뜻)처럼 복잡한 역사를 갖고 있는 곳은 많지 않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이하 보스니아)는 남한의 절반 정도인 면적 51,129제곱킬로미터로 아드리아해 동쪽에 위치하는데 북쪽과 남쪽 그리고 서쪽으로는 크로아티아, 동쪽에 세르비아, 동남쪽으로는 몬테네그로와 접하고 있다. 특히 몬테네그로와 접하면서 남쪽 아드리아해안으로 21.2킬로미터의 좁은 해안선도 갖고 있다.

지중해, 발칸 유럽 그리고 중부유럽의 3가지 생태계 특징이 만나는 디나르 알프스 산맥지역에 위치하여 북부의 평원지대와 남부의 산악지대의 특징을 갖고 있다. 기후는 남부 지역은 지중해성 기후 특징에 따라 더운 여름과 대체로 온화하고 비가 많은 겨울의 특징을 보이고 있는데 동유럽의 대부분 국가가 그렇듯이 보스니아도 강한 지진대에 속해 잦은 지진이 일어나 세계의 뉴스를 자주 장식한다.

이들 지역의 역사는 워낙 복잡하지만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스타리모스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므로 과거와 근간의 역사 변천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한다.

보스니아 명칭은 보스니아 내륙을 북에서 남으로 가로지르는 보스나(Bosna) 강에서 유래하며 헤르체고비나는 15세기 오토만터키 지배 전까지 네레트바(Neretva)강 유역에 위치하는 모스타르(Mostar)를 중심으로 남쪽 일대를 점령했던 헤르체그 대공 가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보스니아는 유고 연방에서 독립한 두 개의 국가가 1국가 2체계로 인구는 보스니아 내전으로 약 10%의 인구가 사망하여 현재 약 400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

유고 연방의 일원이었던 보스니아가 다른 지역보다 극심한 내전을 벌인 이유는 1991년 인구조사 자료로도 알 수 있다. 주민의 구성에서 보스니아 회교도가 44퍼센트, 세르비아계가 31퍼센트, 크로아티아계가 17퍼센트로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었기 때문이다.

보스니아에 슬라브인들이 정착한 시기는 대체로 67세기 초로 지역 구도는 정확하지 않지만 일정기간 동안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들이 지배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1180년 전까지도 보스니아는 험준한 지형을 잘 이용하여 지배자보다는 자신들의 독특한 삶과 문화를 견지하는데 성공했다. 이들은 국가 체제보다는 쥬파(Zupa)라 불리는 작은 공국을 유지한 연합체를 적절히 이용하여 강력한 주변 국가들의 지배를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했으며 13세기에는 독립 국가를 건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15세기에 들어와 오스칸 터키 제국이 영토 확장에 성공하면서 사라예보 등을 비롯한 많은 도시들을 점령하면서 대부분의 보스니아 영토가 이들의 지배로 들어간다. 오스만 제국의 보스니아 지배는 슬라비아인들이 대규모로 회교도로 개종하여 유고 연방에서 다른 지역보다 회교도가 다수를 차지한다.

일반적으로 회교도가 정복한 지역에서 주민들로 하여금 회교도로 개종을 요구한다고 알려지지만 회교도는 기본적으로 개종을 강요하지 않고 회교도로 개종할 때 상당한 혜택을 주는 정책을 견지한다. 이런 제도를 데브쉬르메(Devsirme)라고 부른다. 이 제도는 8세에서 12세 사이의 기독교 남자 아이들을 오스만 터키의 본토로 데려가 능력에 따라 제국 내 하급 공무원(카페탄)과 술탄의 직속 예하부대(야니치로)로 편입시켜 충성을 유도한다.

오스만 터키는 이 제도를 통해 발탁되는 사람들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했다. 그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스만 터키 제국에서 중요한 위치까지 올라가는데 이들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면 제국의 중앙과 지방에서 충실한 공무원이 된다. 물론 그들은 독실한 회교도로 성장한다.

터키가 이들에게 차별을 두지 않았다는 예로는 파샤 소콜로비치가 술탄 바로 아래 직급인 벨리키 베지르(Veliki Vezir)까지 올랐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고향에 흐르는 드리나 강 위에 아름다운 다리를 건설했는데 이 다리가 노벨문학상을 수여받은 이보 안드리치(Ivo Andric)드리나강의 다리의 소재가 된다. 드리나강에 다리가 처음 세워진 15세기부터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인 약400여 년의 역사를 다리를 통해 그리고 있다. 그는 이 작품에서 다리를 경계로 서로 다른 종교와 문화 속에 거주하던 보스니아 민중들의 삶을 드리나 강에 있는 다리의 상징성을 통해 묘사했다. 그의 노벨상 수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유럽 작가들 중 최초 수상자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하튼 15세기에 들어와 오스만 터키 제국은 영토 확장 정책을 펼쳐 사라예보 등을 비롯한 많은 도시들을 점령하면서 대부분의 보스니아 영토가 이들의 지배로 들어간다. 오스만 터키의 보스니아 지배는 세계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장 큰 영향은 서유럽의 기독교 문화가 발칸 유럽으로 전파되는 것을 차단시켰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단은 서부 유럽에서 불기 시작한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의 영향을 받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 결과로 이들 지역이 서유럽 선진 지역에 비해 경제적인 후진 지역으로 전락하게 된 요인이 되었다는 설명도 있다.

오스만 터키의 지배는 러시아-터키의 전쟁 결과로 1878년 종식되고 보스니아의 지배권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넘어간 후 1908년 완전히 병합된다. 그런데 19세기 이후 발칸 유럽에서 급속히 확대되고 있던 민족주의는 보스니아에 살고 있던 세르비아인들을 자극해 대세르비아 부활을 요구했고 이것이 결국 걷잡을 수 없는 발칸 분쟁을 초래하는 요인이 된다.

이러한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열망이 19146월 사라예보를 방문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페르디난드 황태자 부부를 세르비아 청년인 가브릴로 쁘린찌쁘(Gavrilo Princip)가 암살하자 이 사건이 곧바로 제1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어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양산하는 비극 중의 비극이 된다. 이 사건은 유럽을 화약고로 만들고 유고연방이 탄생하며 모스타르를 두고 혈투를 벌인 요인이 된다.

 

<평화를 갖고 온 1개국 2체제>

스타리모스트 다리가 있는 모스타르는 크로아티아 두브로니크에서 북서쪽으로 150킬로미터 떨어져있다. 크로아티아 국경에 인접한 이곳은 유럽에서 작은 터키로 불리는 헤르체고비나 연방의 수도이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으로 세계가 참혹한 전쟁으로 몸살을 앓았는데 이곳 지역에서 또 한 번의 참혹한 전쟁이 일어난다. 현대사의 가장 어두운 장면 중에 하나로 알려지는데 이들 배경 즉 발칸 분쟁은 매우 복잡하다.

1945년 현 발칸지역을 거의 관할하는 유고연맹의 수상으로 선출된 티토(Josip Broz Tito, 18921980)는 소련과 미국의 냉전시대임에도 비동맹주의를 표방하며 강대국의 군사 및 정치 블록화를 거부하고 자체 생존을 모색했다.

유고 연맹의 이와 같은 독자 정책은 특히 소련으로부터 큰 반발을 받았지만 나름대로 여러 민족을 연방체제로 운영하는 묘수를 발휘하여 큰 말썽 없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가 19805월에 사망하자 정황은 급변한다.

특히 198911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1991년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붕괴되자 민족 간의 심각한 갈등과 대립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이때 기선을 취한 곳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지역으로 그들은 19923월 국민투표를 통해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독립의 선포는 곧 분쟁의 시작을 의미했다. 독립을 주도한 세력은 회교도가 중심을 이룬 보스니아 이슬람 정부와 이들 세력에 협조하는 보스니아 내 크로아티아인들이었다.

문제는 보스니아 내 약 30%를 차지하는 세르비아인들이다. 이들은 회교도와 보스니아내크로아티아인들이 주축으로 된 독립 선언을 인정할 수 없다며 분리 독립을 주장하면서 자체 독립을 선언했다.

사건을 복잡하게 만든 것은 세르비아인들이 독립을 선언하자 유럽연합(European Union)에서 곧바로 이들의 독립을 승인했기 때문이다. 세르비아 계의 독립에 반발하여 곧바로 내전이 일어났는데 내전 초창기는 신유고연방군의 지원을 받는 세르비아계가 보스니아 영토의 약 70%를 장악하는 등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이들 전쟁터에서 인종 학살 등의 문제가 생기자 UN은 곧바로 신유고연방에 대한 전면적인 금수조치, 항공봉쇄, 자산동결을 주 내용으로 하는 제재 조치를 취하였다.

신유고연방군은 UN의 제제에 굴복하고 휴전에 합의하였지만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는 세르비아에 의한 유고연방 통치라는 꿈을 꾸고 휴전에 동의하지 않은 채 전쟁을 계속했다. 이후에도 민족 간의 유혈사태가 세르비아계에 의한 소위 '인종청소'라 불리는 만행으로 비화되자 UN은 결국 군사 개입을 결정한다.

물론 3만 여명의 평화유지군이 보스니아에 파견되었지만 평화유지군의 역할이 미비하자 내전은 휴전과 재확전이 반복되는 악순환을 되풀이했다.

이러한 상황아래 신생국이라 볼 수 있는 러시아는 19953월 보스니아 사태 해결을 위한 새로운 제안을 하였다. 이 당시 러시아는 세르비아계를 암묵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는데 러시아는 세르비아공화국이 보스니아 회교정부와 크로아티아정부를 승인하는 대가로 세르비아에 대한 UN의 제재를 해제하자는 것이었다.

같은 맥락으로 미국의 주도하에 보스니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등 내전 당사국들과 미국, EU, 러시아 등 중재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199511월 미국의 데이턴에서 평화협상이 개최되었다.

난항을 거듭하던 평화협정은 199512월 데이턴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보스니아는 세르비아인을 중심으로 한 스르프스카 공화국(영토의 49퍼센트)과 보스니아 회교도와 크로아티아인으로 구성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영토의 51퍼센트)으로 구성된 1국가 2체제의 국가가 탄생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1995년 데이턴 평화협정에 따라 보스니아계(이슬람), 크로아티아계(가톨릭), 세르비아계(세르비아 정교)3개 민족 3명의 대통령이 8개월마다 번갈아 대통령직을 수행한다. 한국도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의 협력 동반자국으로서 19969월 보스니아 선거 때 선거감시단으로 12명을 파견하였으며 19989월에 실시되는 보스니아 선거에도 감시단을 파견하였다.

 

<어제의 친구가 적이 된 내전을 잊지 말자>

유럽에서 이슬람 양식으로 지어진 다리 중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지는 스타리모스트(오래된 다리)가 세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바로 이들 내전의 핵심에 스타리모스트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스타리모스트는 가톨릭교인과 이슬람교인들이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인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에서 헤르체고비나를 대표하는 모스타르 지역에 있다. 터키인들이 약 200년 간 이들 지역을 통치한 후 18세기 중엽 그리스교가 이들을 대치했는데 19세기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이들 지역을 점령하자 그들은 회교인들을 쫓아내는 대신 네레트바 강 동쪽에 독자적인 가톨릭 지구를 설치하면서 공존을 꾀했다. 즉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기독교와 회교도들이 각자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면서 평화롭게 사는 것을 보장하겠다고 선언했다.

이것이 스타리모스트를 사이에 두고 기독교계와 회교도가 각자의 삶을 유지할 수 있게 된 배경이다. 그러므로 모스타르 옛 시가지의 다리 지역은 여러 문화가 어우러진 건축 양식(오스만 이전, 오스만 동부, 지중해 및 서부 유럽) 및 경관이 어울려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심각한 전쟁으로 피해를 입어 재건 작업이 진행되자 이들 지역의 유적에 대한 세부적인 과학적 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고대 건축, 특히 옛 다리는 기술과 품질 면에서 매우 높은 기술이 접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보스니아 내전에서 스타리모스트 다리 인근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것은 모스타르가 크게 회교도 지구와 가톨릭지구로 나뉘기 때문이다. 네레트바 강 주변은 원래 이슬람권인데 강에서 200미터 정도 서쪽의 넓은 대로변부터는 가톨릭 지구이다.

가톨릭지구에는 19세기에 이 땅을 점령한 합스부르크 시대에 건설한 건물들이 주로 있으며 십자가 등이 보여 이슬람 지역과 차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진영은 서로 다툼없이 공존했다. 이러한 상징이 네레트바 강을 잇는 높이 20미터의 아치형 터키식 모스타르 다리(스타리모스트)’이다.

이 다리는 오스만 터키 제국의 위대한 황제로 불리는 슐레이만 치세에 건설되었고 다리를 경계로 서쪽에는 크로아티아인, 동쪽으로 회교도들이 주로 거주하면서 각자의 문화를 존중하며 살아왔다.

전설로는 이 다리가 한 번 무너진 적이 있는데 다시 무너지면 장인의 목을 베겠다는 술탄의 협박을 받고 철저하게 건설했다고 한다. 중세 시대의 모스타르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지만 모스타르라는 이름은 1474년 문헌에서 처음 언급되며 다리 파수꾼이라는 뜻의 모스타리(mostari)’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

이 시기에 이 도시는 아카딜루크(akadiluk)의 지구가 되었다. 아드리아 해와 광석이 풍부한 중앙 보스니아 지역을 연결하는 무역로가 있으므로 이 도시는 강의 오른쪽으로 계속 확장되었다. 도시가 점점 확장되자 헤르체고비나의 산자크(Sanjak) 지역에서 중점도시가 되었고 동쪽으로부터 오스만터키가 도착하면서 터키 통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 수십 년간 모스타르는 대대적인 발전기에 들어간다.

이슬람 사원, 마드라사(madrasah, 이슬람 교육기관), 하맘(hammam, 공공 목욕탕)과 같은 종교 건물과 공공건물이 강의 왼쪽 제방에 집중되었다. 또한 많은 개인 건물과 상업용 건물들이 체계적으로 건설되었다.

그러나 종교가 서로 다르다는 것은 분쟁의 요소가 항상 남아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 건설된 아랍 사원 13개 중에서 9개가 20세기에 종교적인 차이로 인해 파괴되었다. 19세기 동방 정교회 교회 2개 중 하나가 역시 사라졌으며 20세기 초에는 유대교 회당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심각한 피해를 겪고 극장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상당수 오스만 주택이 아직도 고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특히 행정용 건물은 모두 오스트리아-헝가리 기간에 건설된 것이다. 이들 건축의 특징은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위층을 주거용으로 사용하며 보도를 깐 정원, 2층 혹은 3층에 있는 베란다 등이다.

기독교와 회교도로 강을 사이에 두고 있으므로 각자 기독교의 성당과 회교 사원을 건축하여 서로를 간섭하지 않았다. 세계적으로 한 지역에 동서양 문화가 서로 공존하는 특수한 지역이 된 것이다.

그러나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지속된 단 몇 년 간의 내전은 그동안의 평화를 완전히 부셔버렸다. 종교가 다르지만 분쟁이란 단어가 없는 평화로운 지역이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터가 된 것이다.

스타리 모스트는 1557년에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었던 쉴레이만 1이곳을 점령한 후 동유럽의 중심지로 삼기 위해 네레트바 강을 잇는 나무로 만든 불안정한 현수교를 대신할 새 다리를 건립하라는 명령에 따라 건설되었다.

알려지기는 오스만 터키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시난의 제자인 미마르 하이레딘(Mimar Haire! din)이 투입되었다. 그는 1,088개의 하얀색 돌로 된 단일 아치형 터키식 다리로 변경하였으며 당대에는 세계에서 가장 긴 단일 구간 다리로 알려진다.

스타리 모스트는 건립 당시에 길이 28m, 높이가 20m에 달했을 정도로 경이로운 건축물로 여겨졌다. 특히 17세기 오스만 제국의 탐험가인 에블리야 첼레비(Evliya Çelebi)는 자신의 기행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다리는 하나의 절벽에서 다른 절벽으로 뻗어나와 있고 아치는 하늘로 치솟은 무지개를 닮았다. 가난하고 비참한 알라의 노예인 나는 16개 나라를 거쳐갔지만 이렇게 높은 다리는 본 적이 없다. 그것은 하늘만큼 높은 바위에서 바위로 던져졌다.’

 

이 다리의 원래 건설 목적은 오스만 터키의 군대가 달마티아 해변의 부유한 도시로 손쉽게 접근하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더불어 은이 풍부하게 산출되는 보스니아 내륙의 산악 지대와 교역을 수월하게 해 주었으며, 달마티아의 염전으로부터 귀중한 소금을 내륙 지방의 마을로 신속하게 수송할 수 있도록 해 주어 이 지역이 번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1991년에 시작된 크로아티아 내전과 1992년부터 시작된 보스니아 내전으로 모스타르 지역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자 스타리모스트를 누가 장악하느냐가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관건이 되었다. 결국 상대방의 보급로를 끊어 버린다는 명분하에 폭약으로 스타리모스트를 폭파했는데 아직까지 어느 진영에서 다리를 폭파했느냐로 논쟁이 일고 있는 상태이다.

 

스타리 모스트는 보스니아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93119일에 크로아티아계 무장 조직인 크로아티아 방위 평의회 포병대의 공격을 받고 파괴되었다. 보스니아 전쟁이 종식된 이후에 유네스코세계은행은 스타리 모스트와 모스타르 구 시가지 재건을 위한 감독 위원회를 결성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터키, 이탈리아, 네덜란드 정부, 유럽 평의회 산하 유럽 개발 은행은 재건 과정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했다.

199810월에는 유네스코가 스타리 모스트 재건을 위한 국제 전문가 감독 위원회를 결성했다. 유네스코는 스타리 모스트를 오스만 제국 시대에 사용된 건축 자재, 건축 기술을 이용해서 원래 모습과 똑같이 재건하기로 결정했다

 

스타리모스트 다리를 둘러싼 전쟁이 더욱 안타깝게 여겨지는 것은 서로 총을 겨눈 사람들이 전쟁 직전까지 서로 잘 알고 지내던 이웃이었기 때문이다. 길이 30미터에 불과한 짧은 길이로 동서양으로 나뉘었지만 이들은 과거부터 계속 한 동네 사람으로 인식하면서 서로 방해하지 않고 공조하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갑자기 민족과 종교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빌미로 상대방을 죽이기 위해 총탄을 퍼부은 것이다.

인간이 종교와 정책에 의해 얼마나 표변할 수 있는 지를 설명할 때 항상 스타리모스트 다리 이야기가 거론되는 이유이다.

이곳 지역의 전투가 얼마나 격심했는지는 인구가 내전 전에 비해 거의 절반으로 감소하였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현재도 도시 곳곳에 내전의 흔적인 총탄 자국이 낡은 건물 벽에 고스란히 남아 있어 당시에 벌어졌던 비극을 느낄 수 있다.

다행하게도 내전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고 내전이 종식되자 제일 먼저 강조된 것은 파괴된 다리를 가장 빨리 재건해야한다는 것이다. 스타리모스트야말로 문화와 종교가 다른 민족 간 화해와 연결의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특히 유네스코가 스타리모스트 다리를 복원해야 한다고 역설하자 세계 각국의 지원이 쇄도했고 복원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잠수부들은 파괴된 후 강에 수장된 1,088개의 다리의 파편들을 하나 하나 모두 건져 올렸고 터키의 건축가들은 오스만 제국 시대에 사용된 건축 자재, 건축 기술을 이용해서 돌을 꼼꼼히 재배치하여 원래 모습과 똑같이 완벽하게 재건했다.

20042월 다리가 예전의 모습으로 완성되자 7월 영국의 찰스 황태자 등 각국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하여 스타리모스트 재건의 의미 즉 평화공존을 세계에 알렸다.

극심한 살해의 현장이었던 다리 주변의 상인들도 다시 돌아왔으며 하루 수천 명의 관광객들이 스타리모스트를 찾아오는데 관광 성수기 때는 다리 위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뤄 앞으로 나아가기가 매우 어려울 정도다.

네레트바 강의 깊이는 약 5미터, 강물의 속도는 시속 18킬로미터인데 이곳의 명물은 수면으로부터 약 20미터 밖에 되지 않는 다리에서 매년 1번씩 열리는 번지점프이다. 이곳에서의 번지점프는 배경에 있는 스타리모스트 다리의 아름다움 때문에 해외토픽에 단골로 나올 정도로 유명한 이벤트가 되었다.

원래 번지점프는 이곳의 남자들에게 자신감을 주는 매우 신성한 행위로 간주되어 매년 빠지지 않고 거행되었는데 번지점프의 역사는 무려 3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네레트바강이 매우 차갑기 때문에 위험한 곡예를 펼치기 위해서는 높은 기술과 훈련을 필요로 하므로 아무나 뛰어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매년 한 번씩 번지점프 대회가 열리지만 번지점프 자체는 관광용 이벤트로 변하여 약간의 돈을 주면 언제든지 뛰어내릴 수 있는 다이버들이 다리 위에서 대기한다.

다리 양쪽에는 이슬람계 병사들이 화약고로 이용했던 탑이 위치하고 있고 터키인 거리 쪽으로 다리를 건너면 모스크였던 곳이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내부에는 내전 전의 스타리모스트 다리, 내전으로 파괴된 다리, 복원된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코란이 전시되어 있다.

다리를 비롯하여 이곳 곳곳에 보스니아 내전을 잊지 말자는 조그마한 표지석(Don't forget 1993)이 세워져 있고 서로를 겨눴던 총탄은 볼펜으로 만들어져 기념품으로 팔린다. 내전 당시 서로 극심하게 증오하며 싸웠던 이들은 평화가 돌아오자 한결 같이 말한다.

 

싸우는 것보다 용서가 낫다.’

 

네레트바 강과 스타리모스트 풍광은 1619년에 건설된 메흐메드 파샤 모스크(Mehmed Pasha`s Mosque)의 첨탑에서 가장 아름답게 보이지만 다리의 진면목을 감상하기 위해서 강 주변에 즐비하게 들어선 카페나 레스토랑을 찾는 것도 한 방법이다.

메흐메드 파샤 모스크에서 모스타르의 중심인 100미터도 채 안 되는 브라체 페지카(Brace Fejica) 거리로 들어서면 사람들의 복장이나 생김새도 투르크 전사들의 모습이다. 짧은 다리 하나를 건넜음에도 휘어진 칼이나 기하학적으로 새겨진 문양 등 정통 이슬람 양식의 예술품 가게와 식당들이 즐비하여 아랍이나 터키에 있는 것으로 착각할 만큼 동양적 색채가 강하다. 전 세계에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리는 것도 동유럽에 와 있다는 생각을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의 이국적인 아랍풍과 기독교식을 함께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모스타르 옛 시가지의 다리, 네이버지식백과, 유네스코 세계유산

https://ko.wikipedia.org/wiki/%EC%8A%A4%ED%83%80%EB%A6%AC_%EB%AA%A8%EC%8A%A4%ED%8A%B8

발칸유럽 사회와 문화, 김철민,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2004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 1001, 리처드 카벤디쉬 외, 마로니에북스, 2009

 

 

 

 

 

 

 

 

 

 

 

파괴된 다리모습

 

내전의 흔적(곳곳에 총탄 흔적이 보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코란이 보관된 박물관

 

잊지말자 표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