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고의 드라마 연출>
‘나는 배를 침몰시킬 수 있는 어떤 조건도 상상할 수 없다. 현대의 조선 기술은 이미 그 수준을 넘어섰다.’
타이타닉호의 선장으로 최후를 마친 저명한 항해자 에드워드 J. 스미스가 1907년에 한 말이다. 1909년 봄부터 영국의 벨파스트 조선소에서 건설하기 시작한 타이타닉호는 총 5만 마력이나 나가는 거대한 괴물로 높이 30미터로 건물의 11층 높이가 되며 너비 28미터, 길이 270미터, 무게 4만 6천 톤으로 159개의 화실(火室)에서 3킬로미터를 운행하는데 2톤의 석탄이 소요되며 100톤이 넘는 방향타가 설치되었다. 이 배는 당시에 취역 중인 최대의 군함보다 2배나 큰 세계 최대의 선박이었다.
타이타닉호는 거의 1000명에 가까운 승무원들이 2500명 이상의 승객과 함께 세계 어느 곳이라도 안전하게 운항할 수 있으리라 평가되었다. 전문가들은 16개의 방수구획실이 설치되어 있어 함교에서 전기 스위치만 누르면 몇 초내에 비상문들이 떨어져 어떠한 위험에도 대처할 수 있으므로 적어도 타이타닉호는 ‘침몰 불가능한’ 배는 아닐지라도 안전도에 관한 한 세계에서 최고 수준의 배임은 틀림없다고 평가했다.
1912년 4월 10일, 대영제국의 위용을 뽐내면서 지구상에서 가장 큰 여객선인 타이타닉호가 사우샘프턴의 44정박장에서 닻을 올리자, 2등 항해사 찰스 H. 라이톨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타이타닉호는 인간이 이제까지 들었던 가장 훌륭한 평판은 얻게 될 것이라는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항해가 계속됨에 따라 그 가동되는 방식, 진동이 전혀 없는 상태, 계속 속도가 증가함에도 흔들림을 느낄 수 없다는 것 등에 대해 칭찬이 쇄도했다.’
4월 14일 일요일 아침, 타이타닉호는 일간 항속을 거의 880킬로미터로 높였다. 배가 순조롭게 운항하면서 선실 안에서의 생활은 예정된 수순으로 진행되었으며 2등 선실 식당에서 모든 승객을 대상으로 예배가 진행되는 등 어느 곳에서도 재난의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오후 9시 40분 훨씬 작은 배인 메사바호에서 무선으로 타이타닉호의 항로 주변에 빙산들이 밀집해 있다는 경고를 했다. 그러나 타이타닉호의 무선 책임자 잭 필립스는 너무 바빠 메사바호의 메시지를 함교로 전달하지 못했다. 타이타닉호의 선객들이 워낙 많은 전보를 신청했으므로 무전실에서 고객 우선이라는 말에 걸맞게 안부전보를 처리하고 있었다.
밤 11시, 캘리포니아호의 선장 로드는 고속으로 항해하는 배가 타이타닉호인 것을 알고 깜짝 놀라 무선기사 시릴 에반스에게 타이타닉호에 경고 메시지를 보내라고 했다. 에반스는 곧바로 ‘캘리포니아호가 빙산에 둘러싸여 꼼짝하지 못하고 항해를 중단하고 있으니 주의하시오’라고 무전을 보냈다. 그러나 타이타닉호의 필립스는 캘리포니아호의 무선을 받자마자 ‘끼어들지 마시오. 당신이 우리 무선 교신을 방해하고 있소.’라고 면박을 주었다.
면박 당한 캘리포니아호의 무선사 에반스는 화를 참으며 11시 30분 무전기를 끄고 잠을 청했다. 캘리포니아호는 타이타닉호와 1시간 거리에 있었으므로 이때 에반스가 곧바로 발신되는 구조신호를 받았다면 타이타닉호의 승객들 거의 전부 구조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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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 배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는 것도 사고가 보다 커진 요인이었다. 스미스 선장은 빙산이 떠다닐 수 있는 지역을 항해하고 있으므로 항해사와 당번들에게 바다를 잘 관찰하라고 말하면서도 속도를 줄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당시의 여객선들이 도착 시간을 꼭 맞추는 서비스 경쟁을 하고 있는데다가 어느 누구도 ‘하느님도 이 배를 침몰시킬 수 없다’고 호언한 타이타닉호에 빙산 따위가 손상을 입히리라고는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밤 11시 40분, 해면(海面) 감시원 플리트는 갑자기 자신의 배가 빠르게 나아가고 있는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뭔가를 보았다. 너무 검어서 바다 수면과 구별되지 않았다. 플리트는 망대의 종을 세 번 강하게 울리고 곧이어 함교에 대고 “정면에 빙산이 있다”라고 소리쳤다. 37초 후, 타이타닉호의 우현을 거의 20만 톤에 달하는 커다란 형체의 빙산이 긁고 지나갔다.
이때 갑판에 있던 대부분의 승객들은 빙산이 다가왔다가 떨어지기 시작하자 가볍게 충돌한 것으로 생각하고 매우 흥미 있는 사건이라고 즐거워했다. 그들은 갑판 위에 떨어진 얼음 조각을 주웠고 곧바로 닥칠 파국을 생각하지 않고 즐거운 여행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6번 보일러실에서 차가운 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몇 초 후, 일등 항해사 윌리엄 머독은 아래의 모든 방수문을 닫는 전기 레버를 가동시켰고 잠시 후 방수문이 닫혔지만 6번 보일러실에는 물이 계속 들어차고 있었다.
조선 기사인 토머스 앤드루스와 스미스 선장은 배의 밑바닥으로 내려가면서도 사고가 치명적임을 예상치 못하고 예기치 않은 사고로 승객들이 놀랄까봐 정상적인 모습으로 걸으려고 노력했을 정도이다. 그러나 10분도 되지 않아 그들은 배에 물이 4.2미터나 찼으며, 이물 즉 뱃머리가 아래로 기울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다. 앤드류스는 타이타닉호가 침몰하기까지 한 시간 반 또는 두 시간의 여유가 있다고 말했다. 방수구획실이 3개나 파손된 이상 배의 침몰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선장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무전실에 연락하여 근처에 있는 모든 배에게 구조 요청을 하라고 지시했다. 이 당시 반경 수백 킬로미터 안에 있던 12척의 배의 무선 기사들은 불침함이라는 타이타닉호가 구멍이 나서 침몰하고 있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방향을 돌려 타이타닉호를 구조하기 위해 항해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멀리 있었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 캘리포니아호가 있었지만 에반스는 자고 있었다. 더욱 사건이 꼬인 것은 캘리포니아호에 탔던 한 견습 선원이 하늘에 발사된 신호탄을 보고 선장을 깨우려고 찾아갔다가 마지막 순간에 선장을 깨우지 못했다. 그에겐 선장은 마주 쳐다보기도 어려운 거물이었기 때문이다.
한밤중인 12시 5분, 선장은 타이타닉호의 16개의 목조 구명보트와 4개의 접을 수 있는 배를 끌어내어 보트로 옮겨 타도록 지시했다. 상황의 절박함을 모르는 승객들은 조그마한 보트에 옮겨 타라는 말에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첫 번 째로 내려진 구명보트에는 고작 남자 열한 명과 여자 두 명이 타고 있었다.
그러나 배가 왼쪽으로 비스듬히 기울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구명보트를 타려고 필사적으로 매달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들 구명보트가 필요량의 절반 밖에 안 되었다는 점이다. 재난이 시시각각으로 닥쳐오게 되자 수백 명의 개인들이 보여준 용기, 비겁함, 행운, 절망적인 일화가 시작되었으며 이날 밤 금세기 최대의 감동적인 드라마 중에 하나가 연출되는 것이다.
로저 브리쿠를 비롯한 음악가들은 갑판이 기울어 서 있을 수 없을 때까지 찬송가 ‘가을’을 연주를 했다. 이 오케스트라 단원 가운데 구조된 사람은 없었다. 토머스 R. 바일스 신부가 고행성사를 거행하며 무릎을 꿇은 백여 명의 사람들에게 죄를 사면해주고 있었다.
새벽 3시 35분, 커나드 해운회사가 소유한 정기선 캐퍼시아호가 타이타닉호의 구조 요청을 듣고 그들을 구조하러 왔다. 캐퍼시아호는 705명의 생존자 모두를 태우고 타이타닉호가 사라진 지점에서 추모 예배를 드린 후 뉴욕으로 돌아갔다. 구조작업이 막바지에 이를 때 가장 가까이 있었던 캘리포니아호도 다가왔지만 그들은 생존자는 물론 단 한 구의 시체도 찾지 못했다. 영하 2도나 되는 차가운 물에서 몇 시간 동안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1주일 뒤, 다른 배가 시체를 306구나 발견하여 대부분 바다에서 장사지냈다.
그 뒤 영국과 미국 위원회는 각각 대서양 선박 횡단 사상 최악의 참사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시작했다. 2200명이 넘는 승객과 승무원들 가운데 약 1500명이 죽었다.
사건 이후 구명보트에 탈 수 있는 사람의 숫자가 적었던 것은 당시의 규정에는 1만 톤 이상의 영국 선박들은 16척의 구명보트를 싣게 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타이타닉호가 규정을 어긴 것은 아니다. 그러나 16척으로는 승객 중에서 1,200명 정도만 승선시킬 수 있었다. 그나마 정원이 1,200명이었는데도 구명보트에 탄 사람은 겨우 705명으로 500석에 가까운 자리가 채워지지 않았다.
타이타닉호의 희생자 1,496명 중 대다수는 코르크 재질의 구명조끼를 걸친 채 수면에 떠 있다가 저체온증으로 사망했다. 물론 수 백명은 배 안에서 그대로 수장되었다. 이들 대다수는 미국에서 맞이할 새로운 삶을 고대하며 3등실에 몸을 실은 이민자들이다.
타이타닉호의 비극은 세계 해운업에 획기적인 변화 즉 선박의 안전 규정을 획기적으로 바꾸는데 기여한 재난으로도 유명하다.
타이타닉호 침몰사고를 계기로 국제적으로 ‘해상에서의 인명안전(SOLAS, Safety Of Life At Sea)에 관한 국제회의’가 결성되어 협약이 체결되었으며 오늘날까지 활동이 계속되고 있다. 이 협약에서는 모든 상선의 항해 안전문제, 여객선에 대한 수밀 구획 및 방화 격벽, 소화설비에 관한 사항 등에 관해 규정하고 있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한 이후, 모든 선박은 탑승한 모든 승객을 수용할 수 있는 구명보트를 구비해야 했다. 모든 대서양 횡단선에서는 의무적으로 구명 보트 탑승 훈련이 시행되었으며 빙산이 떠내려오는 계절에는 항로가 훨씬 남쪽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타이타닉호에서 구조된 승객들은 침몰 지점에서 지리상으로 가장 근접한 거리에 있던 노바스코샤 연안의 항구였던 캐나다의 핼리팍스로 보내졌다. 사망자들의 유해는 핼리팍스의 지역 묘지에 안장됐다. 지금도 핼리팍스 워터프론트에 위치한 아틀란틱 해양박물관(Maritime Museum of the Atlantic)에는 타이타닉호와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참고문헌 :
「타이타닉(S. S. Titanic)호의 마지막 비밀」, 로버트 개넌, 리더스다이제스트, 1995년 10월
「빙산과 충돌하여 침몰한 타이타닉호의 비극」, 김정흠, 뉴턴, 2001년 7월
「타이타닉(S. S. Titanic)호 침몰 원인과 사고조사 결과」, 한국해양연구원 해양시스템안전연구소, www.news.go.kr, 2004.08.
『생각 1g만으로도 유쾌한 화학 이야기』, 레프 G. 블라소프외, 도솔,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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