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속 4,000미터에 수장된 타이타닉호를 건진다>
타이타닉호는 빙산과 충돌하여 많은 사람들이 사망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타이타닉호에 수많은 보물이 있다는 것 역시 호사가들의 관심거리였다. 타이타닉호의 처녀항해 당시 수많은 부호들이 탑선했는데 당시의 풍조는 모든 귀금속은 물론 가구까지 휴대하고 다닐 정도였으므로 수많은 보물들이 침몰된 타이타닉호에 수장되어 있을 것이었다.
영화 〈타이타닉〉에서도 피카소의 그림을 매우 싼 가격에 구입했다는 장면이 나오는데 일부 부호들이나 귀족들은 여행 시에 그림들을 갖고 다니는 것도 관례였다. 단 며칠을 머무는 장소라도 자신들이 좋아하는 사진과 그림, 귀금속들을 전시하는 것이 자랑이었으므로 타이타닉호에 엄청난 보물이 들어있다는 것은 무리한 예상이 아니었다. 더구나 타이타닉호가 침몰한 지 거의 100년이나 되는데다가 유명세가 있으므로 타이타닉에서 발견되는 소소한 물건이라도 비싼 가격이 매겨질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타이타닉을 인양하면 횡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감히 타이타닉호를 찾으려는 꿈도 꿀 수 없었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한 지역의 수심이 너무나 깊었기 때문에 침몰선이 어디 있는지 찾는 것조차도 어렵고 또 심해 바다로 들어갈 수 있는 장비를 준비하는 것도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막대한 발굴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사람이 나설 리 만무했다.
그러나 인간사에는 항상 남과는 다른 일에 평생을 투입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해양학으로 저명한 우즈홀(Woods Hole) 해양연구소의 로버트 밸라드(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침몰한 독일 전함 비스마르크호도 발견했음)는 그럴수록 타이타닉호를 찾고 싶었다.
그는 1971년 타이타닉호 탐사를 위한 스폰서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밸러드는 발달된 해양 탐사 장비로 심해 바닥에 있는 타이타닉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63년에 침몰한 미국 원자력 잠수함 드레셔호와 1968년에 침몰한 소련 골프 2급 잠수함을 찾아 끌어올리면서 심해 탐사 장비들이 눈부시게 발달해 있으므로 자금만 확보된다면 타이타닉호를 찾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자본주들을 설득하고 다녔다.
밸러드는 타이타닉호가 수장되어 있다는 심해저일지라도 과학기술의 발달로 타이타닉호를 발견할 수 있다고 스폰서들을 설득했으며 그는 타이타닉호를 발견하기만 하면 자기가 직접 잠수정을 타고 바다 밑을 내려가겠다고 말했다.
그에게 탐사에 필요한 많은 자금을 지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심해가 어떤 곳인지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심해에서 무엇을 찾는 일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은 상식에 해당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밸라드는 포기하지 않고 타이타닉을 찾기만 한다면 상당한 자금을 벌 수 있다고 돌아다녔다. 타이타닉호에 있었던 조그마한 유물 한 점이라도 엄청난 환가성이 있다는 것이다(그의 주장은 추후에 사실로 판명되었다).
그의 집념은 헛되지 않아 1980년 드디어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잭 그림이란 지질학자를 만났다. 그는 네스호의 괴물, 터키의 아라라트 산에 있다는 노아의 방주, 히말라야에 있다는 설인 등 불가사의한 일에만 자금을 대는 괴짜였다.
여하튼 타이타닉호를 찾는 대 프로젝트가 진행된다고 하자 각지에서 전문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특히 컬럼비아 대학교의 해양학자 윌리엄 라이언은 잭 그림에게 매우 중요한 조언을 했다. 1963년 드레셔호를 찾아낸 기계는 자력계(磁力計)였지만 타이타닉이 가라앉은 곳은 북대서양에서도 자력이 매우 강한 화산지대 근처이므로 스캔소나(수중 음파탐지기)를 쓰지 않으면 침몰선을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충고한 것이다.
당시로서는 최첨단 장비로 무장하고 출발한 밸러드 팀이었지만 타이타닉호의 발견은 의욕만큼 진행되지는 않았다. 밸러드를 비롯한 탐사팀은 1980년 7월30일부터 8월16일까지 음파탐지기로 타이타닉호가 침몰했음직한 바다 밑을 탐색했으나 폭풍을 만나자 실속없이 철수했고 1981년과 1983년에도 기후 때문에 실패했다.
밸러드는 탐사 지역을 좁히려고 프랑스 해양연구소의 장 자리와 장 미셸 두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다. 미셸과 밸러드는 1973년 대서양중앙해령을 탐사할 때 함께 일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타이타닉호의 침몰에 관해 쓰여 있는 모든 항해일지와 기록을 참고하여 배가 침몰했음직한 장소를 1200평방킬로미터에서 20평방킬로미터로 축소했다.
이때 밸러드에게 희소식이 들어왔다. 미 해군에서 타이타닉호를 찾는데 필요한 경비로 22만 달러를 지원하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이 그의 탐사를 지원한 것은 사실 군사적 필요 때문이었다. 당시 미 해군은 심해탐사용 잠수정을 개발했는데 타이타닉호가 가라앉은 바다의 깊이가 3,900미터나 되므로 새로운 원격조종탐사 장비를 시험해 볼 좋은 기회라 여겼다.
1985년 7월11일부터 8월7일까지 밸러드 일행이 탄 르 시르와 호는 긴 쇠줄 끝에 쁘와송(생선)이라고 불리는 음파탐지기를 매달고 바다 밑을 뒤졌지만 아무 것도 찾지 못했다. 8월13일 밸러드와 미셸은 우즈홀 해양연구소가 보낸 탐사선 노르 호로 갈아타고 다시 탐사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이 연구소가 새로 만든 잠수정 아르고 호를 이용하기로 했다.
아르고란 그리스 신화에서 영웅 야손 일행이 황금양을 찾아 나설 때 탔던 배 이름이다. 아르고 호는 자동차만한 크기로 썰매 모양을 했는데, 강력한 음파탐지기와 탐조등, 고성능 카메라를 갖추고 있었다. 아르고 호는 6,000미터 깊이에서도 활동할 수 있는 잠수정이므로 탐사팀원들은 노르 호에서 위험을 전혀 느끼지 않고 아르고 호를 조종했다.
그러나 타이타닉호는 밸러드가 노르호를 돌려주어야 하는 며칠 전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또 다시 탐험 장소의 일기가 나빠지기 시작하여 풍속은 40노트, 파도는 4미터 넘게 솟구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험 팀은 24시간 내내 탐사장비에 매달렸다.
9월1일 0시30분 타이타닉호는 갑자기 탐사팀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석탄과 긴 파이프 같은 것이 스크린에 나타난 것이다. 타이타닉호가 발견된 곳은 정확하게 북위 41도 46분․서경 50도 14분이다.
아르고 호는 심해 3,900미터에서 쉴 새 없이 타이타닉호를 맴돌며 사진을 찍어 모니터로 전송했다. 포도주병, 매트리스, 전신기, 마스트, 닻 등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이상하게도 배의 앞부분만 보였지 뒷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타이타닉호가 두 동강났다는 믿을 수 없다고 여겨졌던 타이타닉호의 목격자, 즉 생존자들의 증언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1986년 7월14일 2차 탐사가 시작되었다. 밸러드는 탐사선 애틀란티스 2호에서 잠수정 앨빈호로 갈아탔다. 앨빈호는 6,750미터까지 내려갈 수 있는 성능을 갖고 있었고 1960년 이후 지금까지 100개가 넘게 만들어진 유인잠수정 가운데 가장 뛰어난 성능과 업적을 자랑하고 있었다.
밸러드를 비롯한 과학자 세 사람은 앨빈호와 75미터 사슬로 연결되어 있는 ‘제이슨 주니어’라는 로봇을 원격조종해 타이타닉호의 계단 통로를 따라 선실로 들여보냈다. 로봇에 장착된 특수카메라가 선실 안 모습을 구석구석 찍었다. 카메라는 높은 수압과 짙은 어둠 속에서도 실내를 선명하게 찍었다. 1등 선실의 크리스털 샹들리에는 조금도 상하지 않은 채 매달려 있었고, 구리로 만든 조타실 장식품들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조사는 날마다 4시간씩 7월25일까지 12일간 계속되었다.
예상과 달리 타이타닉호는 빙산에 의해 선체 옆구리가 찢긴 것은 아니었다. 학자들은 배의 우현 이물판이 충돌의 충격으로 찌그러진 후 틈이 생겨 바닷물이 들어오게 된 것을 알았다. 또 하나의 발견은 타이타닉호의 고물이 하강된 후 배의 나머지 부분에서 뒤틀려 떨어져 나왔다는 사실이었다.
세상을 놀라게 한 타이타닉호의 수중촬영 성공은 제임스 카메론이 영화 〈타이타닉〉을 촬영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카메론은 보다 생생한 화면을 찍기 위해 1995년 심해정 장비를 직접 타고 타이타닉호를 촬영했으며 이것이 영화의 주요 장면으로 나온다.
밸러드가 스폰서들을 모을 때 공헌한 말들은 사실로 증명되었다.
2004년 4월에는 타이타닉호에서 맨 처음 제공됐던 식사의 메뉴판이 영국에서 실시된 한 경매에서 5만 1천 파운드(한화 1억700만원 상당)에 팔린 것이다.
이 메뉴판은 타이타닉의 모항(母港)인 영국 사우샘프턴에서 열린 영국타이타닉협회 정기총회 때 경매로 나온 4건의 유물 가운데 하나다. 은퇴한 형사인 데이비드 하워드는 한 경매에서 부서진 호주머니용 은시계와 가죽 메모장, 승무원 배지 등과 함께 이 메뉴를 사들였는데, 그는 이날 경매에서 메뉴 외에도 승무원 배지를 3만2천 파운드(6천700만원 상당)에 처분했다. 그가 처분한 유물 4점은 타이타닉호의 승무원으로 배의 침몰 후 동사(冬死)한 토머스 멀린이라는 사람의 인양 사체에서 발견된 것들이다.
밸러드가 타이타닉호에 있는 유물을 인양하면 천문학적인 자금을 벌 수 있다고 투자자들을 설득한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타이타닉호의 이름은 영화 「타이타닉」의 성공 등에 힘입어 더욱 높아졌다. 탐사팀은 타이타닉호에 있는 유물들을 로봇으로 회수하겠다는 계획을 수정하여 타이타닉호 동체 자체를 인양하겠다는 대담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침몰한 타이타닉호와 똑같은 대형 여객선을 건조하겠다는 계획도 진행되고 있다.
1995년에 출시된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 「타이타닉」은 사상 최고의 흥행작 중 하나인데 이때 맹활약 것이 ROV인데 이 로봇은 ‘스놉독’으로 다루기 매우 어려웠다. 그래도 전문가들의 노력으로 난파선 안으로 들여보내 타이타닉의 화려한 장식들을 촬영할 수 있었다.
웬만하면 여기에서 만족하겠지만 제임스 카메론은 영화가 완성된 후 보다 정확하게 타이타닉호를 관찰하기 위해 첨단 ROV 2대를 새로 확보했다. 이 장비로 일등선실, 일등실 로비와 식당, 삼등 선실, 휴계실, 선창 그리고 무선통신실 등을 촬영했다.
타이타닉은 처녀항해에서 침몰했기 때문에 내부를 찍은 사진이 많지 않았다. 그러므로 외부에 발표된 타이태닉호의 내부 사진들은 거의 대부분 자매호인 올림픽호의 것이다.
방음장치가 된 무선통신실의 무선장비들도 살아남았다. 나이프스위치는 젊은 무선통신 기사 해럴드 부라이드와 조나단 필립스가 조작해둔 위치 그대로다. 갑판 위로 물이 밀려들자 두 사람이 무선 통신실을 버리고 떠나기 전날 밤 두 사람이 수리했던 변압기도 발견됐다. 두 무선기사는 규율을 어기면서까지 변압기를 수리해 최대 출력으로 맞춰놓았다. 이 덕에 712명의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는 뜻이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때.전력이 없었다면 구조선 카르파시아 호에 구조 신호조차 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
「타이타닉(S. S. Titanic)호의 마지막 비밀」, 로버트 개넌, 리더스다이제스트, 1995년 10월
「빙산과 충돌하여 침몰한 타이타닉호의 비극」, 김정흠, 뉴턴, 2001년 7월
「타이타닉(S. S. Titanic)호 침몰 원인과 사고조사 결과」, 한국해양연구원 해양시스템안전연구소, www.news.go.kr, 2004.08.
「타이태닉호 다시보기」, 햄프턴 사이즈, 내셔널지오그래픽, 2012년 4월
「운격 로봇으로 둘러본 타이태닉호의 내부」, 제임스 카메론, 내셔널지오그래픽, 2012년 4월
『바다의 공학』, 이종화, 현대과학신서, 1980
『문화와 유행상품의 역사(1)』, 찰스 패너티, 자작나무, 1997
『생각 1g만으로도 유쾌한 화학 이야기』, 레프 G. 블라소프외, 도솔, 2002
『위대한 패배자』, 볼프 슈나이더, 을유문화사, 2005
『세계 역사의 미스터리』, 양지에, 북공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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