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카사노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지구인 카사노바(1)

Que sais 2020. 11. 16.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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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모 지롤라모 카사노바 데 세인갈트(Giacomo Girolamo Casanova de Seingalt, 17251798)라면 모르는 사람도 카사노바라면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18세기의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성을 표방하여 섹스를 연상하면 곧바로 바람둥이의 대명사로 알려진다. 카사노바라는 이름이 여성 편력가로 워낙 유명하자, 그의 이름은 (여성을) 유혹하는 기술과 동의어로 남아있으며 세계 최고의 연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남다른 생애가 감독들의 눈을 끌지 않을 수 없다. 그에 대한 영화가 수없이 만들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라는 신기한 기술이 태어난 후 수많은 바람둥이에 관한 영화들이 제작되었는데 바람둥이를 다루는 영화들의 기본 소재는 18세기의 실존인물인 카사노바가 모델이다. 그만큼 매력이 높다는 뜻으로 근래에도 수많은 카사노바에 대한 영화가 제작되었다. <네티즌 탐정>이 선정한 카사노바에 대한 영화를 보자.

이탈리아의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1976카사노바는 카사노바의 전성기에서 말년의 모습까지 방대한 여정을 담는다. 카사노바는 여성은 물론 남성들에게도 선망의 인물인데 그런 잘난 인물이 시간을 흐름을 거스를 수 없어 어느 덧 노인의 되어 외로운 시간을 견딘다. 펠리니는 카사노바의 일생을 연극적인 기법으로 그려냈다. 영화의 압권은 세상의 여자들을 편력하며 자유를 한껏 발휘한 카사노바이지만 최후에는 마네킹을 사랑하게 되고 그것을 최고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남다른 펠리니 감독의 해석이라 볼 수 있다.

 

에두아르드 니에르만스 감독1992에 출시한 프랑스 영화 카사노바도 불멸의 남성성을 대변하는 카사노바의 노년을 재구성한 영화인데 알랑 드롱이 주연을 맡아 화제를 일으켰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카사노바는 여러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며 놀아나는 전성기의 카사노바가 아니고 긴 여정을 마친 후 고향으로의 귀환을 앞두고 있는 노년기의 카사노바. 카사노바가 세계를 여행한 후 고향 베네치아로 돌아와서 첩보 활동을 했다는 실제 사실에 근거하여 그와 관련된 여러 에피소드를 접합시켰지만 그의 기본 능력인 바람둥이 카사노바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인색하지 않다.

2005에 출시된 라세 할스트롬 감독카사노바는 지금은 고인이 된 히스 레저가 카사노바 역할을 맡았는데 이 영화가 여타 작품과 다른 것은 현대적인 관점에서 카사노바를 조명했다는 점이다. 영화의 소재는 젊음과 친근함에 현실적 인간미를 부여했는데 기존의 작품들과 달리 이 영화 속에서 카사노바는 푸치 주교 일행에게 쫓기면서도 사랑을 찾아 헤매는 나약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겸비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카사노바의 파란만장한 일생 즉 속임수와 결투, 위선, 애타는 짝사랑 등 복잡한 삶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만 카사노바가 마침내 욕정과 진정한 사랑의 차이점이 뭔지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카사노바가 바람둥이 자체로 일생을 살았다면 결코 현대까지 그의 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그보다 더한 호색한은 한 두 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바람둥이의 대명사로 알려지지만 그는 모험가이자 작가, 시인, 소설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그는 성직자, 바이올린 연주자, 병사, 도서관 사서, 번역가, 스파이, 철학자, 도박꾼, 복권의 창안자, 연금술사로 그에게 붙은 수식어만 보아도 그가 남다르게 자유분방하게 살아온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파란만장한 경력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을 향해 매우 자신있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기꺼이 사기당하고 싶어 하는 세상에서 바보 노릇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바보를 놀리는 일을, 사기를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사기꾼 역할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딱 한 가지를 강력하게 거부했다. 거칠고 노골적인 방법으로 남의 주머니를 터는 노예선 출신의 노예들이나 교수형을 선고받은 죄수들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는 남다른 재치로 자신을 변호했다.

 

나는 어리석은 자들의 손에서 우아하고 세련된 마술로 돈을 빼냈다.'

 

지구상에 살아간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이런 말을 카사노바처럼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던 사람이 있었는지 모를 정도다. 자서전이기도 하고 회고록이기도 한 그의 저서 나의 인생 이야기 Histoire de ma vie18세기 유럽 사회 생활의 관습과 규범에 대한 가장 신뢰할 만한 자료 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물론 그가 책에서 여자들과의 정사를 노골적으로 묘사해 당시에는 도덕상의 이유로 출판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후 1822년에서 1828년 사이 독일의 빌헬름 폰슐츠에 의해 개작되어 처음으로 출판된 후 1960년에 브로크하우스판으로 비로소 무삭제판이 출판되었다. 그는 이 책의 첫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내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행한 모든 일들이 설령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자유인으로서 나의 자유 의지에 의해 살아왔음을 고백한다.’

 

18세기인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의 고백은 솔직했는데 이는 도덕적 논리를 앞세우는 허위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가 당대인들로부터는 못된 호색가로 평가받았지만 현대인들로부터는 에로티시즘(eroticism)을 대중 앞에 공개시킨 사람으로 알려진다. 그가 성을 종교나 신분, 사회적 통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인으로서 가져야 할 인간의 권리이므로 이를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동생 프란체스가 그린 자코모 카사노바

물론 그가 난봉꾼 정도를 넘어 매춘에 관련되고 사기 행각을 저질렀다는 자체를 강조하면서 그를 지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살던 시대가 18세기임을 감안하면 현대적인 시각으로만 볼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여하튼 그가 당대 세계 최고의 자유인으로 당대를 풍미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그는 자신이 이 땅에 태어난 사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성을 위하여 태어났다는 사명을 느꼈으므로 늘 사랑하였고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내 전부를 걸었다.’

 

<세상을 자유롭게 살고 간 카사노바>

도시국가 베니스는 수백년 동안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과 함께 무역을 기반으로 많은 부를 축척하고 군사 경제면에서도 막강한 위상을 갖고 있었다. 특히 십자군 전쟁 때 수많은 십자군들이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는 항로를 장악하여 엄청난 부를 쌓아 도시국가로의 위상을 높였다.

그러나 카사노바가 살았던 18세기의 유럽은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강력한 왕권을 가진 제국주의로 위세를 한껏 높이고 있었지만 베니스는 옛 영화를 잃고 이미 퇴락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해상국가로 유럽의 강자로 부상했던 베네치아는 조그마한 도시국가로 영토도 적은데다 외국 식민지도 별로 없어 몰락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도시 시민들은 점점 불만을 갖기 시작했고, 도시 지도부는 이 불만을 어떻게든 해소해야만 했다.

 

산마르코광장의 비둘기

베네치아가 택한 것은 유흥 산업이었다. 도시 곳곳에서 합법적인 도박판들이 벌어졌고 누구나 오락을 즐길 권리가 있었으며, 술을 마실 권리가 있었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유곽이 되었고, 모든 여성들이 창녀와 구분되지 않을 정도이므로 유럽인들은 베네치아를 유럽의 환락가또는 퇴폐와 유흥의 중심지였다.

이곳에서 1725년 산 사무엘라 극장 근처의 칼레 델라 코메디아에서 도시의 명예를 한껏 드높이는 한 남자가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세계 최고의 바람둥이로 알려지는 카사노바. 그는 희극배우였던 아버지 자에타노 주세페 카사노바와 유명한 성악가인 어머니 자네타 사이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유럽의 오페라 무대에서 빼어난 재능을 발휘했고 특히 그의 동생인 프란체스코 카사노바서양 미술사에서 빠지지 않는 화가로 성장한다. 그가 그린 그림들은 오늘날 기독교미술관에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하며 그의 친척들도 변호사, 공증인, 사제의 명예로운 망토를 입어 비록 귀족은 아니지만 모차르트나 베토벤과 같은 예술적 분위기에 젖은 시민계급 출신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섯 남매만 남기고 서른여섯 나이에 병으로 요절하자 외할머니 마르지아가 그를 돌보았는데 그를 돌보던 할머니마저 세상을 뜨자 카사노바가 당시 극장 소유주였던 귀족 미켈레 그리마니에게 맡겨 양육되었다. 당시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연극배우 아들이라는 출생 환경은 카사노바에게 커다란 부담감으로 평생을 따라 다녔다. 이러한 열등의식 때문에 훗날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실제로는 귀족 미켈레 그리마니라고 거짓주장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리마니가 그를 키운 것은 사실이므로 포장한 것이다.

그가 여자에 탐익하게되는 계기는 다소 환상적이다.

그는 자서전에서 여덟 살 때의 일을 정확하게 기억했다. 그는 여덟 살 때 코피가 늘 멈추지 않는 괴상한 병으로 고생했는데 그의 부모가 잦은 해외공연으로 그를 돌볼 수 없었다. 외할머니 마르지아가 그를 양육했는데 어느 날 할머니가 어린 손자를 곤돌라에 태우고 베니스에서 약 30분 거리에 있는 무라노 섬으로 갔다.

그 섬에서 주술사에게 넘겨진 카사노바는 하루 밤을 꼬박 상자에 갇혀 보낸 후 새벽에 아름다운 한 신비스런 여인으로부터 알몸으로 주술치료를 받았다. 이후 그의 몸은 점차 건강하게 되었고, 그녀로부터 전달된 여인의 신비감에 사로 잡히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출신 성분이 당대로 보아 좋지 않으므로 그는 이를 자신의 노력으로 극복하려 했다.

한마디로 세찬 세파에 이겨나가기 위해서는 남다른 처세술과 재주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키가 2미터가 될 정도로 거인이라는 것도 큰 장점이었다.

당대에 출세하려면 사제가 되든가 군인이 되는 것이 기본이므로 카사노바성직자 길을 택했다. 그는 그를 잘 알고 있는 성직자 알비세 말리피에로의 도움으로 17402월 즉 15살 때 성직에 입문하고 베네치아의 코레 대주교로부터 신품을 받았다. 또한 그는 파도바 대학에서 박사 논문을 준비하면서 열여섯 살에는 비잔틴 성당에서 첫 신학 강의를 했고 추기경의 비서로까지 일하는 등 전도 유망한 젊은 사제였다.

그러나 결론은 결코 사제가 되지 못한다. 그가 적은 글에 의하면 로마로 가서 성직자로서 자리잡기 위해 수순을 밟다가 운명의 꼬임으로 길을 포기한다고 실토했다. 무엇이 그를 꼬이게 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카사노바는 70살의 성직자 말리피에로17살의 어린 가수 테레즈농락하는 걸 곁에서 지켜보면서 혼란스러워했다고 적었다.

그런데 그가 몽레알 백작 부인의 관리인의 딸 루시아를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사제라는 걸 인식하고 욕정을 절제하고 그녀를 떠난다. 그런데 훗날 그녀가 어느 호색한에게 농락당했다는 것을 알고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린다. 다시는 사랑이라는 얼개를 이성으로 절제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