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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지구인 카사노바(3)

Que sais 2020. 11. 16.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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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사업가 카사노바>

카사노바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평할 때 그가 뛰어난 사업가였다는 점을 꼽아준다. 특히 경제의 맥을 잘 짚어내는 벤처사업가 기질이 많았다는 것이다.

베네치아에서 탈출하여 1757년에 파리에 도착한 카사노바는 베니스에서 사귀었던 프랑스 외교관 베르니스 공사의 주선으로 파리의 사교계에 자연스럽게 데뷔했다.

 

베니스의 감옥을 탈출했던 무용담과 해박한 지식으로 파리 귀부인들 사이에서 순식간에 명성을 얻은 카사노바는 루이 15세의 정부 퐁파두르 부인에게도 인정을 받게 된다. 어느날 오후 사저(私邸)를 나서던 퐁파두르 부인과 마주친 카사노바는 인사만 나눈 뒤 빨리 그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매우 반가운 기색으로 카사노바에게 말을 건네더니 그가 프랑스에 정착했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카사노바는 곧바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저 또한 그러고 싶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살려면 후견인이 필요합니다. 별 재능도 없는 저에게 누가 후견인이 되어주려고 하겠습니까?’

 

그의 말에 당대 최고의 유명인사인 퐁파두르 부인은 자신이 후견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인데 카사노바프랑스가 재정적인 문제로 고민하는 것을 파악하고 루이 15에게 복권 제도를 건의했다.

 

퐁파두르 부인

그의 제안은 곧 받아들여졌고 루이 15세는 세계에서 복권 제도를 처음으로 시행한 군주로 불멸의 명성을 얻는다. 카사노바는 복권사업을 관장하는 책임자로 임명되어 탁월한 수학 지식을 바탕으로 첫번째 사업에서 200만프랑의 매출을 올려 파리시에 60만 프랑의 수익을 남겨주었다. 그에게도 상응하는 반대급부가 주어졌음은 물론이다. 그도 복권사업소 다섯 곳을 운영하여 상당한 수입을 올렸다.

남다른 언어와 용모를 갖고 있는 30대의 바람둥이인 카사노바에게 경제적인 여유까지 생기자 많은 여자들이 그의 품안에 안겼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카사노바에게 예기치 않은 행운이 찾아왔다. 프랑스 정부가 천부적인 사교 능력에, 탈옥능력까지 갖춘 카사노바에게 다국적 스파이로 위촉한 것이다. 한마디로 프랑스 비밀 요원007이 된 것으로 그가 공식적으로 여자들을 편력할 수 있는 무기도 생긴 것이다. 또한 프랑스 외무부 특사 자격으로 네덜란드에 파견되어 프랑스 채권 판매협상을 성공리에 마치고 돌아왔다.

 

베네치아에서복권추첨장면

카사노바의 또 다른 일면은 로코코의 남자라고 정의될 만큼 화려하고 멋을 아는 남자라는 점이다. 키가 2미터나 되는 거구의 카사노바가 항상 관심을 둔 분야는 패션이다.

1759카사노바는 복권 사업을 통해 얻은 수익을 염직물 사업에 투자했다. 18세기의 사회혁명이 계몽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진행되었지만 경제혁명방직산업을 중심으로 일어난 산업혁명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또한 로코코 문화의 영향으로 화려한 옷감으로 만든 화려한 옷이 큰 인기를 끌었다.

문제는 옷의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점이다. 중산층 이하의 사람들은 값싼 옷감으로 만든 옷으로 만족해야했는데 카사노바가 화려하면서도 저렴한 옷감 수요를 알고 염직물 사업에 손을 댄 것이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패션 분야에서 카사노바가 큰 기여를 한 사업자로 설명한다.

그런데 그의 사업은 완전 참패였다. 그의 공장은 기계 설비를 훔쳐 달아난 한 종업원에 의해 위기를 맞았고 카사노바의 사업 파트너와 후원자들은 카사노바를 의심해 고발했다. 결국 사업 실패로 그는 짧은 기간이나마 상류사회의 꿈을 실현시켜준 파리를 떠나야 했는데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과학기술사에서 볼 때 패션 산업계에서는 카사노바가 염직 산업부흥시킨 장본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카사노바의 진면목은 그가 당대의 미식가로 유럽을 미식 세계로 올려놓았다는 점이다.

카사노바의 기본은 여인이 마음에 들면 먼저 풍성한 식탁으로 초대했다. 그는 마치 무대에 올릴 예술 공연을 준비하듯 두 사람의 사랑에 맞는 식탁 분위기를 연출했으며 서로의 마음을 가열시킬 독특한 요리를 미리 준비했다고 한다. 또한 여인의 타입에 따라 술과 음식을 다르게 선택했다고 한다. 머리색과 피부색 그리고 신분과 취향에 이르기까지 여인의 분위기를 세심하게 간파해 샴페인과 포도주, 제철에 나는 싱싱한 해물들을 준비했다. 가히 음식의 신에 버금갈 정도가 아닐 수 없다.

카사노바에게 식사는 평생 동안 계속된 여인들과의 사랑을 지속하기 위한 에너지의 원천이기도 했다. 놀랍게도 카사노바는 그를 거쳐간 여인들을 추억하면서 그들과 어떤 술과 음식을 먹었는지를 모두 기록하여 적었다.

베네치아 음식은 베네치아의 앞바다인 아드리아해가 제공해 주는 풍부한 해산물을 사용해 18세기 유럽 미식가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특히 사회 각 분야에 걸쳐 진행된 혁명과 개혁의 영향으로 프랑스 요리가 알프스를 넘어 전통적인 베네치아 음식과 섞였으며 이로 인해 마늘과 양파의 사용이 보편화됐고 허브, 약재, 향신료 등이 모든 음식에 기본적으로 사용됐다. 오늘날로 치면 퓨전 음식이 되었고 현재 베네치아의 식당에서 당시 카사노바가 즐겼던 요리들이 대중적인 메뉴로 올라와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베네치아의 바르바리고 요리고등학교요리주임 마르티니와 미켈라1998년 카사노바 사후 200주기를 기념해 카사노바가 즐긴 요리책을 발간했다. 카사노바의 일생을 추적한 김준목 박사는 현재 베네치아의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카사노바 요리의 비법을 가르치고 있다고 전했다.

미식가 카사노바의 미식 비법은 세 가지이다.

첫째(석화)이다. 신선한 굴은 남성을 위한 최고의 음식. 카사노바는 최음 효과, 사랑의 전희, 사랑의 유희에 최고의 음식이라 극찬했다. 그는 그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굴에 대해 적었다.

 

어느 날 에밀리와의 식사 때 나는 굴을 그녀의 입에 넣어주려고 했다. 그러나 약간의 실수로 굴이 그녀의 가슴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자연스레 손으로 떨어진 굴을 주으려 했으나 나는 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가슴 단추를 풀렀다. 그리곤 내 혀로 그녀의 가슴에 떨어진 굴을 삼켰다. 나는 그녀의 옷을 자연스럽게 벗겨 내렸다. 알몸을 드러낸 그녀의 가슴에 계속해 하나하나 굴을 떨어뜨리며 나는 계속해 두 입술로 삼켰다. 이것은 나와 그녀의 몸을 신선한 굴 맛 이상의 감각으로 전율케 했다.’

 

요리방법으로 신선한 굴에 레몬 즙을 뿌려 날로 먹는 것인데 이 때 버섯을 곁들이면 금상첨화라고 알려진다.

둘째는 베니스 해안에서 가장 많이 잡히는 숭어 요리. 숭어알을 소금과 식초에 절여놓은 것을 보타르가라 하는데 이를 베니치아의 캐비어라 불렸다. 보타르가는 맛이 뛰어나고 정력에도 탁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사노바는 숭어 알집을 말린 후 여인과의 사랑에 때때로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카사노바의 비장의 무기 콘돔 중 한가지이다. 요리방법은 소금, 식초로 잘 절여진 보타르가레몬즙, 후추, 올리브 오일을 뿌려 먹는다.

셋째계란 흰자 샐러드이다. 그는 혹시 정력이 모자랄까 두려워 계란 흰자로 샐러드를 만들어 먹었다고 했다. 카사노바는 이것을 최고의 최음제라고 설명했다.

요리방법은 식초에 샐비어 잎, 박하, 통 파, 통후추, 겨자를 넣고 끓인 뒤 2주간 잘 밀봉해 둔다. 계란을 완전히 익혀 노른자를 빼고 흰자를 얇게 썬 다음 식초 소스와 소금, 올리브 오일을 뿌려 먹는다고 한다.

카사노바를 사랑했던 많은 여인들은 카사노바에게 초콜릿을 대접했다고 알려진다. 초콜릿이 성적 흥분을 가져온다는 믿음에서였다.

초콜릿의 원료는 카카오 나무의 열매 카카오빈으로, 아프리카 및 남아메리카가 원산지다. 카사노바가 살았던 18세기에는 초콜릿 음료에 바닐라와 계피 등의 향신료를 첨가하여 즐겨 마셨다고 한다. 오늘날 발렌타인 데이 등에 연인들이 주고 받는 선물로 초콜렛이 애용되고 있는 것도 이같은 믿음과 무관하지 않다.

 

<도주는 카사노바의 특기>

여하튼 카사노바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렸는데 이를 갚을 수 없게 되자 유명하면서도 단순한 아이디어를 도출한다. 한마디로 줄행랑치는 것이다. 그는 파리를 떠나 프랑스 남부지방으로 도피 생활을 하면서 이때부터 생갈의 기사라는 가명을 쓰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그의 도피생활이 마냥 괴로운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계몽사상의 아버지 볼테르를 만나 계몽주의에 몰두하면서 우정을 쌓을 정도로 식자로서의 대접도 받았다.

1763. 카사노바가 영국을 방문하지만 이곳은 프랑스와는 달리 그를 찬밥 대접했다. 영국은 산업혁명을 통해 새로운 산업 사회로 나아가던 시기였으므로 그의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도박판이 없었다. 더구나 그의 여성 편력도 신통치 않아 1763년 런던에서 38세의 카사노바창녀 샤필론에게 사기를 당해 전재산을 날리게 되었다. 화류계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카사노바가 당한 것으로 그는 런던의 템즈강에 뛰어들어 자살하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친구가 작은 유흥을 한 번만 더 즐기고 죽으라고 말하여 카사노바는 자살의 순간을 놓친다. 그날 밤, 카사노바는 익사하는 대신에 여성과 황홀한 하루밤을 지냈고 더 이상 자살하려는 생각을 갖지 않았다고 한다.

카사노바가 당대에 남다르게 여성 편력이 심했던 것은 여자로부터 남다른 호평을 받았기 때문인데 이것은 카사노바가 여자들을 임신시키지 않는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카사노바는 평소에 콘돔을 갖고 다니면서 임신과 성병을 예방했으므로 실질적으로 효과있는 최초의 콘돔 고안자로도 알려진다. 그런 천하의 카사노바도 그만 영국에서 악성 성병을 얻어 그의 명성에 다소 흠집을 낸다. 최초의 콘돔 고안자이지만 스스로도 예방하지 못할 정도였다는 아이러니는 계속 그를 따라다닌다.

카사노바식 피임법에 대해서도 알려진다. 그가 사용한 비법이란 금 세공사에게 특별 주문한 지름 18mm 무게 60g금구슬을 여자의 몸에 삽입해 정액을 몸 안에 들여보내지 않고 밀어내는 것이다. 현대로 보면 자궁 내 장치와 비슷한 효과를 내는데 레몬을 반으로 갈라 과즙을 짜낸 뒤 반구형의 껍질을 질 안에 넣음으로서 정자를 죽이게 했다고 한다. 일종의 살정제의 역할을 도모했던 셈이다.

여하튼 영국에서 참패를 당한 카사노바는 곧바로 수많은 도시를 여행하기 시작한다. 베를린에서 카사노바는 계몽사상을 맹신하는 프리드리히 대왕으로부터 1764사관학교 교사 자리를 제시받기도 한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제안을 거절한 카사노바는 러시아에서 예카테리나 여왕을 만나고 그녀에게 유럽에서 통용되던 그레고리력의 사용을 권했다.

당시 러시아는 11일이나 차이가 나는 율리우스력을 사용하여 정치, 경제, 외교 등 각 분야에서 많은 불편을 초래하고 있었지만 러시아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우리지 않았다. 러시아에서의 생활도 러시아 여성들과의 만남 때문에 곤욕을 치르게 된다. 그의 탁월한 여성 편력에 화가 난 러시아 남자들이 수없는 결투를 신청하자 이번에도 그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줄행랑이었다. 러시아에서 탈출한 카사노바폴란드, 스페인으로 향한다.

 

예카테리나2세

문제는 그가 스페인에 도착할 때 이미 나이를 먹은 중년의 사나이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탈리아에서 탈출하여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지만 그에게도 고향은 중요했다. 그는 고향인 이탈리아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방법은 이탈리아의 종교 재판소와 화해하는 것이다.

원래 글재주가 있는 카사노바인지라 그는 스페인에서 주로 베네치아에 대해 부정적인 내용을 적은 책들을 비판했다. 놀랍게도 이 비판서가 베스트셀러가 되어 베네치아 고관들의 눈도장을 얻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그의 시도는 성공하여 탈옥범인 상태이지만 카사노바종교 재판소와 화해를 하고 다시 베네치아로 귀환하였다. 이탈리아에 돌아와 보니 자신도 모르게 태어난 그의 딸도 있었고,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 남자들도 있었다.

베네치아 당국에서 그에게 면죄부를 준 것은 카사노바를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인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세상 경험이 많고 외국을 많이 여행한데다 프랑스에서 비밀정보원으로도 활약했으므로 50살의 카사노바를 종교재판소의 비밀 첩보원으로 활용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카사노바에게 비밀 첩보원 일을 맡긴 것이 귀환의 조건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인데 실제로 카사노바는 약 50건에 달하는 밀고서를 작성했다고 알려진다. 그가 불순한 보고서에 서명한 이름은 안젤로 프라톨리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