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카사노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지구인 카사노바(4)

Que sais 2020. 11. 16.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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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노바는 베네치아에 돌아와 출판업에 열중했다. 당시 베네치아는 정부 체제만 비방하지 않으면 모든 분야에서 출판의 자유가 보장되었으므로 다른 나라에서 금지된 책들을 비교적 자유롭게 출간할 수 있으므로 활황을 누리고 있었다. 유럽 각국의 많은 이방인들은 책을 구하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들었고 그로 인해 출판업은 활기를 띠었다 카사노바는 프랑스 배우들과 연계하여 연극비평 주간지 <탈리의 메시지(Le Messager de Thalie)>도 창간하여 훗날 예술계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다.

또한 카사노바프란체스카 부라키니라라는 가난한 처녀와 평범한 가정을 꾸리게 된다. 물론 그의 정적들과 빚쟁이들이 카사노바를 괴롭히긴 했지만, 카사노바는 비교적 평온한 생활을 견지하는데 또 다시 불행이 찾아온다.

카사노바1883년에 쓴 사랑도 싫고, 여자도 싫다는 풍자시가 문제가 된 것으로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친아버지가 당시의 베네치아의 귀족 미켈레 그리마니라고 거짓 주장을 했다. 그가 미켈레 그리마니의 양아들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는 양아들이 아니라 친아들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가 이와 같은 주장을 하게 된 연유는 카사노바가 제노바의 외교관 카를로 스피놀라의 비서로 활동하고 있었을 때 그의 담보증서를 보증한 브로커와의 알력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켈레 그리마니의 아들인 카를로 그리마니가 카사노바의 편에 들지 않자 그는 나름대로 통쾌한 복수를 했다. 자신이 진짜 미켈레 그리마니의 사생아이고 카를로 그리마니는 세바스티안 지우스타니의 사생아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 사건은 전적으로 카사노바의 잘못이다. 그가 미켈레 그리마니의 양아들임은 사실이지만 자신이 적자이고 카를로 그리마니가 다른 사람의 사생아라는 것은 그야말로 적반하장이었다. 그의 말대로 그가 적자라면 그리마니가의 재산을 상속받아야한다는 것을 뜻하므로 간단히 넘어갈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카사노바의 신상을 잘 알고 있는 베네치아이므로 그의 실수는 곧바로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조차 머리를 돌리게 만들었다. 그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또 한 번의 줄행랑으로 급기야 고향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신세가 된다.

카사노바의 일생을 보면 남다른 방랑벽을 갖고 있어 잠시도 멈추지 않고 유럽을 돌아다녔음을 알 수 있다. 이유야 어떻든 그는 한 장소에 오래 머무르는 일이 거의 없었다. 도처에서 염문을 뿌리고 연애를 하며 때로는 사회의 여러 계층의 여인들과 비교적 지속적이고 심각한 관계를 가지기도 했는데 그 역시 남다른 사랑 경력을 갖고 있다.

그중 하나가 그의 생애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프랑스 여성 앙리에트(Henriette)3개월 동안의 동거다. 다른 하나는 수녀 M. M.과의 사랑이었으며, 로마 여성 루크레치아(Lukrezia)와의 연애도 있다. 그녀와의 사이에서는 딸 하나까지 두었는데 이후에 그 딸도 역시 그의 애인이 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확인된 것은 아니다. 카사노바는 때론 자신도 한 여성과 평범한 가정을 꾸릴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의 행태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그것은 그의 다음 말로도 알 수 있다.

 

어딘가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언제나 내게 거부감을 일으켰다. 분별 있는 처신은 내 천성과 어긋나는 것이었다.”

 

한번은 그가 자신의 애인 크리스티나에게 결혼하겠노라고 약속한다. 하지만 그는 다시 생각해보고는 결국 그녀에게 대리남편을 구해준다. 이런 그의 행동을 놀라워하던 당시의 남성들이 카사노바에게는 모든 여성들이 감사한다는 유행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카사노바가 남다른 명성을 갖게 되는 이유다.

카사노바는 전립선 비대증에 걸려 73세에 죽음을 맞이했다. 30대에 삶을 마감하는 당시 귀족들에 비하면 카사노바는 상당히 장수한 셈이다.

그의 고향인 베네치아는 그와 거의 동시에 운명을 같이 한다. 그가 사망하고 얼마 뒤, 카사노바를 낳은 환락의 자치 도시 베네치아는 멸망한다. 볼테르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 민중들이 혁명을 일으켜 새로운 정부를 세웠고,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의 군대가 유럽을 휩쓸며 베네치아 자치 공화국을 지도에서 지워 버렸기 때문이다.

 

<계몽주의자 카사노바>

천하의 바람둥이로 알려지는 카사노바의 생애에서 매우 놀라운 것은 그가 당대 유럽에 풍미하던 계몽주의의 절대 신봉자였다는 점이다.

우선 그는 177918세기 계몽주의를 주도했던 당대의 석학 볼테르반박하는 저서를 남길 만큼 자신의 철학을 갖고 있었다. 그는 볼테르의 철학과 사상, 특히 종교관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18세기 유럽은 계몽주의 사상이 확산되고 있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을 비롯해 당대의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시대가 문을 두드린다는 볼테르의 외침에 심취했다. 당시 유럽의 지성인들에게 볼테르를 만나는 것은 철학자로 혹은 계몽주의자로 인정받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볼테르

카사노바1760년 스위스에서 볼테르를 만났다. 그러나 볼테르와의 만남에 대한 카사노바의 기억은 유쾌하지 않았다. 위대한 철학자로 알려진 루소를 사생아, 배반자 유다, 사기꾼 등으로 폄하해 마지않던 볼테르였으므로 카사노바를 홀대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당시의 대화를 카사노바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카사노바 : 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드디어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군요. 20여년간 저는 선생님의 제자였습니다.

볼테르 : 앞으로 20년간 제게 의무를 다 하십시오. 그리고 그때 가서 수업료 내시는 것을 약속해 주십시오.

카사노바 : 물론입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 드리죠. 약속을 지키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죽겠습니다.

 

우아한 대화이지만 이 속에 가시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볼테르가 매우 위압적으로 카사노바에게 말했는데 여하튼 이후 카사노바는 볼테르를 공격하는 글을 썼다. 흥미로운 것은 카사노바는 볼테르가 본명인 프랑소아 마리 아루에 대신에 필명인 드 볼테르를 사용했다고 비판했다. 유럽에서 란 말은 귀족의 이름 앞에 붙는 단어인데 볼테르가 이를 의식하여 자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필명이지만 괘심한 행동이라는 뜻이다.

학자들이 카사노바에게 큰 점수를 주는 것은 일관성있는 철학적 신념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좋은 의미에서 카사노바의 생애를 점철한 끊임없는 애정 행각도 바로 이 자유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런데 카사노바의 자유의지에는 강한 신앙을 바탕으로 한다. 사실 그는 한 때 카톨릭 사제였으며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크리스찬으로 자처했다. 카사노바의 자유 의지에 대한 신념 속에 신과 종교가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문화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삶과 이성이 종교적 영향 하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러한 종교관은 당시 다른 계몽주의 철학자들과 구분되는 중요한 특징이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생각을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인간은 자유롭다.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다는 것을 의심할 때 자유를 상실한다. 운명의 힘에 의존한다면 신께서 인간에게 이성과 함께 부여한 자유마저 상실하게 된다.’

 

이에 의하면 카사노바는 어떠한 삶의 원칙에 매달리지 않고 바람 부는 대로 살고자 했다. 카사노바는 그로 인해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그래도 그의 삶의 일관된 주제는 자유라는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카사노바의 삶과 철학을 프랑스 혁명과 직접적으로 연관짓기는 어려우나 그의 자서전에 나오는 여러 사건들은 늘 자유와 평등과 사랑이라는 주제로 설명한다. 프랑스 혁명이 사회적 경제적 억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려는 자유 평등의 혁명이란 점에서 카사노바의 철학과 공감대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자서전 기록 중에는 프랑스혁명을 예견하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내용이 있다.

 

산업화 이전 대부분의 유럽인들이 허기로 고통받아온 것처럼 나도 굶주림 속에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시골의 한 농가에 숨어 들어 약 50마리의 훈제 청어를 훔쳐와 단 며칠 만에 먹어 치울만큼 불우한 시절을 보냈다. 나는 베네치아의 철옹성 같은 감옥을 탈출하여 파리에서 지낼 무렵, 귀족들의 낭비벽과 어리석음을 꼬집으며 경제파탄이 오고 끝내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류사회의 아웃사이더였던 카사노바는 평등을 지향하는 유토피아를 절실히 갈망한 것이다. 18세에 법학박사학위를 받은 천재였으며, 자유와 평등의 철학을 추구했던 계몽주의자였고, 프랑스 혁명을 앞둔 격변기에 유럽을 누비면서 자유와 평등을 전파한 메신저였다는 뜻이다. 물론 시대의 아웃사이더로서 자유와 평등의 시대를 꿈꾸던 카사노바는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서 열매를 채 누리기도 전에 사망했다.

 

<SF의 선구자>

고향인 베네치아에서 축출된 카사노바는 체코의 프라하에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보헤미아의 발트슈타인 백작의 둑스 성에서 마지막 휴식처를 찾았다. 그가 베네치아를 떠나면서 기력도 명성도 후원자도 잃고 빈, 드레스덴, 베를린, 프라하 등을 방황할 때 발트슈타인 백작을 만난 적이 있었다. 발트슈타인 백작은 카사노바와 마찬가지로 프리메이슨 회원인데다 미술에도 관심이 많으므로 둑스에 있는 자신의 성에서 사서로 일할 것을 권했다.

카사노바에게 다른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그는 둑스 성에서 1784년부터 13년간 나의 인생 이야기 Histoire de ma vie를 비롯하여 수많은 작품을 완성했다. 프랑스어로 쓰인 그의 회상록은 총 12권으로 되어 있는데 카사노바의 가계(家系) 설명에서 시작하여 긴 방랑 여행을 마치면서 트리에스테(Trieste)에 돌아올 때까지의 일이 면밀하게 기록했다.

그가 만난 인물도 당대 유럽의 가장 유명한 인물들을 거의 망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황 베네딕투스(Benedictus) 14세와 클레멘스(Clemens) 13,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여제, 프랑스 왕 루이(Louis) 15, 그에게 궁정의 자리를 제안했던 독일의 프리드리히(Friedrich) 대왕, 러시아 여제 에카테리나, 영국 왕 조지(George) 3, 프랑스 왕의 애첩 퐁파두르(Pompadour) 부인, 계몽사상가 볼테르(Voltaire), 루소, 디드로와 함께 백과전서를 편찬했던 달랑베르(d'Alembert), 영국의 현인 존슨(Samuel Jonson) 박사, 근대 고고학의 아버지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 스위스 의사이자 시인인 알브레히트 폰 할러(Albrecht von Haller), 미국인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모차르트(Mozart), 프랑스의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François Marie Isidore de Robespierre) 등도 그를 만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러시아 여제 에카테리나2번이나 만났는데 이는 러시아의 관례로 파격적인 일이며 클레멘스 13세로부터 교황청 기사 작위도 받았다. 그의 회상록에 저명인사들과의 만남과 비화에 대한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그는 음악의 신성 모차르트와 큰 인연이 있다.

그가 체코 둑스성에 머물던 시절, 카사노바는 모차르트를 만난다. 여기서 그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죠바니가사를 고쳐주었다고 한다. 카사노바와 모차르트는 모두 프리메이슨 단원이었으며 체코 둑스성 주인인 발트슈타인 백작으로부터 후원을 받았다.

그가 방문한 곳은 파리, 베를린, 모스크바, 런던, 바르샤바, 마드리드, 빈 등 거의 유럽 전역에 걸쳤고 한동안 침대가 있는 일종의 캠핑 마차도 가지고 있어, 비교적 여유있게 여행할 수 있었으므로 남다른 시각에서 당대의 풍물을 접할 수 있었다. 이 책이 바람둥이 카사노바를 뛰어 넘어 남다른 평가를 받는 것은 그의 비범한 관찰력과 기억력에 힘입어 18세기 유럽의 사회·풍속 등을 풀어내는 필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18세기에 저술된 가장 귀중한 필사본으로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당대 지식들의 시각으로 볼 때 다소 퇴폐적이고 무정부적이라 판단되어 생전에는 그의 모험담인 베네치아 감옥에서의 탈출을 담은 납이라 불리는 베네치아의 감옥으로부터의 탈출 내력만이 발표되었다.

여하튼 그의 회상록은 그의 생존시에는 발간되지 못했지만 그가 사망한 한 후인 1821F.A.브로크하우스가 작가의 종손으로부터 원고를 매입한 후 1822독일어역의 슈츠판이 출간되었다. 그러나 이들도 상당부분에서 수정이 가해진 것이다. 이후 프랑스어의 라포르그판이 간행되었고 이 두 책을 대본(臺本)으로 하여 여러 판본(版本)이 출간되었으며 1960년 비로소 무삭제판이 출간되었다.

 

카사노바의 자서전

나의 인생 이야기는 그에게 문학적인 면에서 불멸의 명성을 안겨준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의 책이 세속적인 개연성에 비추어 볼 때 앞으로도 열광적인 독자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극찬했다. 그는 도박꾼이자 행운아인 카사노바가 무례하게도 단테와 보카치오 이래의 모든 이탈리아 시인을 능가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수테판 츠바이크가 이와같이 나의 인생 이야기를 극찬한 것은 카사노바의 회상록이 카사노바로서의 자기 인생을 묘사하고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그대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꾸며내고 생각해내야 했을 것을 그는 자신의 삶에서 몸으로 겪어 얻었다. 다른 사람들은 머리로 써야 했을 것을 그는 정열에 불타는 자신의 육체로 몸소 살아냈으므로 다른 사람들처럼 현실의 붓과 상상력으로 그럴 듯이 치장할 필요가 없었다. 극적인 사건이 무궁무진함에도 가필이 필요하지 않고 모두 완성된 상태였다. 한마디로 그 누구도 카사노바의 체험만큼 다양한 상황으로 구성된 인간 삶의 교향곡 연주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나의 인생 이야기외에 소설 다섯 편, 희곡 단편, 꽁트 20편을 남겼고 수많은 번역서를 남겼다. 말년인 1791년 자신의 삶을 소재로 3막 짜리 희곡을 발표했는데 이 연극은 1971년 이탈리아에서 카사노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해 공연됐다.

호머일리아드이탈리아 사람들이 모국어로 읽도록 번역한 사람도 카사노바인데 놀라운 것은 오디세이와 키르케라는 오페라 대본도 직접 썼다는 점이다.

카사노바는 미술에도 뛰어난 재주를 발휘하여 사물에 대한 많은 소묘를 남겼다. 특히 그가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의 초상화를 그렸다. 1760년 로마에서는 화가 라펠 맹그스, 예술사가 요한 빈켈만 등과 만나 예술사에 대하여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알려진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학자들에 따라 그가 쓴 자코사메론세계최초의 SF로 인정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 소설은 쥴 베른의 해저의 2만리의 선구로 알려지는데 항해하던 배가 폭풍에 난파되어 침몰한 후 지구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다룬다.

 

카사노바의 친필

이 소설은 1788년에 프라하에서 출간되었는데 원래 이 작품은 동시대의 사회를 직접 혹은 간접으로 비평하기 위해 가상의 문명인 메가미크레스의 다양한 풍속과 면모를 상상력으로 동원한 것이다. 카사노바는 공상과 상상이 어우러진 이 소설이 성공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의 작품이 실패한 이유는 출판인이 큰 흥미를 보이지 않은 면도 있었지만 5권이나 되는 장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카사노바가 단순한 바람둥이가 아니라는 점은 둑스 성에서 여러 가지의 수학책과 의학책을 썼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가 1790년에 쓴 입방체의 수학적 문제는 그가 심혈을 기우린 자코사메론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발간했으나 역시 사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한다.

바람둥이로만 알려진 카사노바가 남다른 문학적 재능을 갖고 있는 전형적인 지식인의 면모를 갖고 있는 것은 모두 그의 자산이자 실력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학자들은 그의 이와 같은 문학가로서의 작품을 볼 때 그가 바람둥이라는 수식어만 붙지 않았더라면 창의적이고 열정이 많은 지식인으로 평가 받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단지 바람둥이라는 이름이 그의 이름 앞에 붙는다는 점이 카사노바에게는 아쉬운 일이 될 수 있겠지만 바로 그 점이 카사노바를 불멸의 명성을 얻게 만든 장본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카사노바 만만세라 아니할 수 없다.

 

참고문헌 :

[카사노바 다시보기], 19, 김준목, 동아일보, 2009.09.20.

<카사노바> - 역사적 변화가 낳은 이단아, 히스, 히스토리아, 2009.10.02

카사노바, 나무위키

감각의 순례자 카사노바, 김준목, 시공사, 2002

츠바이크가 본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 슈테판 츠바이크, 필맥,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