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카사노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지구인 카사노바(2)

Que sais 2020. 11. 16.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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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것은 그가 1742년 즉 17의 나이에 베네치아 인근의 파도바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카사노바가 수학한 파도바대는 지금도 유럽의 명문 대학으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있었던 곳이기도하다.

그는 선천적으로 언어 능력을 갖고 있어 베네치아 인근의 파도바 대학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히브리어에 능통했고 스페인어, 영어도 어렵지 않게 구사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더구나 대학교 때 학습 능력이 대단하여 고전 문학을 줄줄이 꿰고 있는 것은 물론 신학, 법학, 자연과학, 예능 등 다방면에 뛰어난 성적을 유지했다. 가난하면서도 똑똑하고 융통성이 뛰어나 훗날 경제, 정치,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엘리트들과 교류할 수 있는 밑걸음이 되었다.

특히 그는 춤, 펜싱, 승마 등 몸으로 하는 모든 궁중 예술과 카드놀이에서 여느 귀족가문의 기사보다도 특출한 재능을 발휘했으므로 자신이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지 못한 귀족 사회와 부유한 상류층의 언저리에서 견딜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의 환상적인 기억력이다. 그는 70년 평생 동안 자기가 본 얼굴들을 하나도 잊지 않았고 듣고 읽고 말하고 본 것을 모두 다 기억했다고 한다. 또한 그가 평생 40여 편의 저서를 남기면서 인문학에 뛰어난 지식을 겸비한 저술가로 평가받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당시의 경력과 기억력 때문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그의 짧은 시간의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은 성직자가 카사노바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절도있는 규범에서 자주 일탈했는데 심지어는 설교를 위해 단상에 올라갔지만 너무 술에 취해 자신의 몸도 가누지 못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성직사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에 돈이면 무엇이든 해결되는 베네치아 사회였기 때문이다.

간신히 성직자 직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는 성직자가 깨끗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다. 도시 전체가 창녀촌인데, 설교를 한다고 해서 이를 도덕군자로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교회를 다니던 여성을 유혹하면서도 떳떳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여성들을 쉽게 유혹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체구와 용모 덕이기도 하지만 남다른 바이올린 연주 능력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산 사무엘라 극장에서 1년 동안 바이올리니스로 일하며 생계를 해결한 적도 있었다. 17살에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바이올린 천재라니 어느 여자가 넘어오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의 파격적인 생활이 계속 구설수를 몰고 다니므로 참다못한 교회는 그를 쫓아낸다. 유명한 카사노바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그가 도망간 곳은 기독교가 존재하지 않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었다. 투르크 제국에서 다시 이탈리아 반도로 돌아온 카사노바는 <프리메이슨>에 가입하고, 비밀 첩보 요원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그는 첩보의 왕국 베네치아 사람이자, 교황청에서 일한 적이 있으므로 교회에 대해 남모르는 무언가를 많이 알고 있었다. 이후 카사노바는 그 능력을 이용하여 예술의 도시 파리, 음악의 도시 빈을 돌면서 수많은 여성들을 유혹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카사노바가 여성들을 유혹하기 위한 자금줄으로 이용했던 것은 도박이었다. 그는 도박에도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곤돌라

물론 그가 이와 같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그에게 든든한 자금줄이 있었기 때문이다. 17474월 카사노바는 어느 귀족 집안의 결혼식에서 베네치아 귀족이자 상원의원인 마테오 조반니 브라가딘과 우연히 같은 곤돌라를 탄다. 그런데 곤돌라 안에서 브라가딘이 갑자기 쓰러지자 카사노바가 간단한 응급처리를 하고 의사를 찾았는데 의사는 브라가딘의 가슴에 수은을 붙여 주었다.

의사의 응급치료에도 불구하고 브라가딘이 계속 고통을 호소하자 카사노바가 수은을 떼어내고 나름대로 치료를 했는데 놀랍게도 브라가딘이 회복되었다. 카사노바가 유명인사인 브라가딘을 살려내자 브라가딘은 그를 양자로 받아들이면서 하인과 곤돌라 그리고 매달 10제키니의 용돈도 주었다.

브라가딘가의 양자가 된 카사노바는 거칠 것이 없었다.

자신의 출생에 대해 열등감을 갖고 있던 그에게 귀족 중의 귀족의 양아들이 되었으므로 그동안 그를 억누르던 압박에서 벗어나 그는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여행을 했고 여행 중 만난 모든 여인을 그의 침실로 끌어들였다. 카사노바의 여인이 100명이 넘는 것은 과장이라는 설이 있지만, 그는 회고록에서 122으로 기록했다. 특히 환락의 도시 베네치아는 일상적으로 섹스 파티가 유행하였고, 카사노바는 수녀들까지 파티에 초대했는데 바로 이 섹스 파티로 인해 카사노바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한다.

카사노바와 파티를 즐긴 여인들 중에는 성직자의 부인, 종교 재판관의 애인 등 고위층들이 많았다. 이들은 카사노바가 <프리메이슨> 등 이단과 연결되어 있다는 정보가 들어가자 1755년 그의 나이 30살 때. 카사노바는 금지된 이단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라는 죄명으로 종교 재판관에 의해 체포된다. 여자를 유혹하는 그의 기술이 악마의 속삭임이란 뜻이다.

카사노바의 공식 죄목은 다소 혼란스럽다. 당시 카사노바는 베네치아 종교 재판관들의 요시찰 대상이었다. 카사노바의 이단적인 지식과 파격적인 행동 때문이었다. 카사노바는 외국의 대사 및 정부 인사들과 자주 접촉하였는데 놀랍게도 이것이 국가에 위험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의 죄명은 난봉, 사기, 착취, 연금술 시도, 비밀 결사 단체인 프리메이슨 회원이라는 점 등이다. 프리메이슨은 유럽의 지식인층이 중심이 되어 계몽주의 사상을 전파하던 단체이므로 위정자들로 보아서는 불순단체였다. 여하튼 카사노바'는 후일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타인에게 잘못한 적이 없다. 사회 안정을 위협한 적도 없고 남의 일에 간섭한 일도 없다. 사적인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단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아마도 종교재판관의 애인과 자주 만났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는 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1년간 카사노바는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에 있는 피온비 감옥의 가장 열악한 감방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감옥의 지붕은 납으로 되어 있어 납 감옥이라고도 불리는데 여름엔 더위, 겨울엔 추위로 고생해야 했다. 특히 감옥의 지붕이 낮아 거의 2미터나 되는 카사노바는 제대로 일어 설 수도 없었다.

그가 갇혀 있었던 두칼레 궁전은 산 마르코 광장에 면해 있는 궁전으로 베네치아 공화국 총독의 주거지이자 공화국 정부 건물이다. 9세기에 처음 지어진 후 계속 확장되었는데 679년부터 1797년까지 1,100년 동안 베네치아를 다스린 120명에 이르는 베네치아 총독의 공식적인 주거지였다. 최초의 건물은 마치 요새 같은 고딕 양식의 건물이었지만 현재는 고딕 양식을 잘 나타내면서도 비잔틴, 르네상스 건축 양식이 복합된 모습으로 베네치아 고딕이라고도 불리는데 베네치아 고딕 건물 중에서 조형미가 가장 뛰어난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두칼레 탄식의 다리

방문객들이 현재도 가장 많이 찾는 곳이 재판을 담당하던 10인 평의회의 방이다. 이곳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유화 중 하나인 틴토레토의 대벽화, 베네치아의 주요 역사를 그린 그림, 76인 총독의 초상화 등이 있다. ‘10인의 평의회의 방에서 소운하를 사이에 두고 '탄식의 다리'라고 불리는 다리를 건너면 감옥이 있는데, 카사노바가 갇혔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탄식의 다리16001603년에 안토니 콘티노(Antoni Contino)의 설계로 만들어졌는데 10인의 평의회에서 형을 받은 죄인은 누구나 이 다리를 지나 감옥으로 연행되었다. 탄식의 다리라고 이름이 붙은 것은 죄인들이 이 다리의 창을 통해 밖을 보며 다시는 아름다운 베네치아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탄식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하튼 지상최대의 바람둥이는 일생의 황금기를 감옥에서 보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고 공언했는데 그가 투옥된 감옥은 누구도 탈옥할 수 없다는 악명높은 피온비 감옥이었다. 그럼에도 카사노바는 탈출에 성공한다. 탈출 과정은 비교적 소상하게 알려져 있다. 당시 감옥에 갇힌 죄수도 돈을 내면 요리를 주문할 수 있었으나 카사노바에게는 이런 권리조차 박탈되어 있었으므로 교도소장 부인이 만든 마카로니를 먹어야 했다. 마카로니가 피온비 감옥을 탈출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듀칼레 궁전

카사노바가 감옥에 갇힌 지 얼마되지 않아 직접 쇠지렛대를 제작해 탈출구를 만들었지만 곧바로 발각된다. 그래서 카사노바는 작전을 바꾸어 다른 죄수에게 쇠지렛대를 보내 탈출구를 만들게 했다. 이때 뜨거운 마카로니가 가득 든 접시를 받치는 성경 속에다 탈출 도구를 감추어 간수에게 주자 그는 의심하지 않고 옆방의 죄수에게 건넸다. 카사노바의 작전은 성공하여 1756년 지붕을 타고 내려온 카사노바는 다시는 살아서 돌아올 수 없다는 탄식의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그는 회상록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때 나는 아름다운 운하를 바라보았다. 배는 한 척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보낸 잔인한 밤들이 스쳐 지나갔고 지난날 내게 호의적이었던 많은 행복한 사건들로 인해 나의 감정이 나의 자애로운 신에 이르는 감사의 소리로 되었다.’

 

피온비 감옥에서의 탈출은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는데 그것은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낸 바람둥이의 완벽한 쇼생크 탈출이나 마찬가지다. 프랭크 다라폰트 감독쇼생크 탈출은 아내와 그녀의 정부를 살해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악질범들만 수용한다는 지옥같은 교도소 쇼생크에서 20여년 간 차근차근 준비하여 극적으로 탈출한다는 내용이다. 쇼생크 탈출은 시청자들로부터 가장 다시보고 싶은 영화 중 하나로 뽑혔는데 탄탄한 시나리오도 한 몫 했지만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교도소에서 탈출하는 과정 등이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는 탈출에 성공한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를 이곳에 가둘 때 나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듯이, 나 역시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이곳을 떠나노라.’

 

이 글을 읽으면 그가 얼마나 탁월한 언변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감옥을 탈출한 그는 바로 이탈리아 반도를 떠나 당대에 문화와 예술이 발달한 도시인 프랑스의 파리로 향한다. 혹자들은 그가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카사노바가 갇혀있던 감옥이 두칼레 궁 옆의 그 감옥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당시 두칼레궁에서 10인 위원회 재판을 거쳐 탄식의 다리를 건너 투옥된 사람들은 주로 국사범이나 정치범들이 수용되는 곳이므로 단순 형사범으로 처벌받은 카사노바가 그런 곳에 수감되었을리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1년 정도 감옥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내용은 어떻든 베네치아 두칼레궁은 카사노바의 감옥 건으로 매우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베네치아 두칼레궁에서 매일 카사노바 투어를 실시하는데 이 투어는 카사노바가 투옥되었던 두칼레궁 내부의 감옥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