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토리노의수의(예수의수의)

토리노의 수의(예수의 수의)를 둘러싼 진짜ㆍ가짜 공방(4)

Que sais 2020. 11. 17. 10:48

youtu.be/SbYPyn3TI20

반면 과학자들은 진정한 예수의 수의로 인정받으려면 수의의 제조 연도가 예수 시대임을 증명하여야 하는데, 그러려면 탄소연대측정을 꼭 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의가 유럽에 공개되기 시작한 시기가 14세기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황청의 허가는 쉽사리 내려지지 않았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1968바오로 2는 가톨릭 교회의 가장 유명한 성유물 중 하나1대 교황인 성 바오로가 사용하였다고 알려진 의자의 연대를 측정하도록 허가하였다. 이 의자는 상아로 상감된 참나무 재질의 고가구로서 유명한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베르넹에 의하여 1657년에 시작하여 1666년에 조각이 완성된 금박입힌 청동 기념물 안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탄소연대측정을 해보니 이 유물은 기원후 9세기 작품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이러한 실패의 예도 있으므로 굳이 과학이라는 명분 때문에 인간의 정신적인 영역인 종교까지 침해당해야 하는 것이 옳으냐는 비판도 있었다. 종교적인 분야는 과학이 아닌 종교문제로 귀착시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고대 유물이 진본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데는 탄소연대측정법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었다. 탄소연대측정을 위해서는 수의를 적어도 가로, 세로 15cm 크기로 오려내야 했기 때문이다.

 

수의 보관 모습

그러나 세계의 가톨릭 신자들의 구심점인 교황청에서 토리노의 수의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자는 제안을 계속 묵살할 수만은 없었다. 우선 교황청에서도 토리노의 수의가 진짜임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탄소연대측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미 수의의 주인공이 예수가 아닐 확률이 2,250억 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고 발표된 데다가 수의가 진짜로 판명될 경우 기독교인들의 믿음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과학자들은 탄소연대측정법을 개선하여 길이 7cm에 폭 1cm의 크기만으로도 연대측정이 가능하다고 부추겼다.

드디어 교황청에서도 결단을 내렸다.

19884 전 세계의 주목 속에 토리노 성당의 수의1x5.7센티미터의 작은 우표 크기만한 3조각으로 다시 나뉘어진다. 3조각은 각각 미국 아리조나의 터슨 대학,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 스위스의 쥬리히 폴리테크닉 대학으로 보내졌다. 기원후 2세기 초와 중세 말기의 대조 표준들, 즉 연대가 정확히 알려진 다른 견본들도 함께 보내졌다. 핵가속기가 이 수의에 남아 있는 방사성 탄소 동위 원소들을 측정했다.

 

<혹시나가 역시나>

1988101310토리노의 지오바니 바티스타 성당발레스트레로 추기경은 세 연구소의 연구 결과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옥스퍼드 대학 해지스 박사의 결론놀랍게도 가짜라는 것이다. 토리노 수의의 제작 연대는 수의가 유럽에 처음으로 발견되던 바로 그 즈음인 기원후 1260년에서 1390년 사이로 판정되었기 때문이다.

 

토리노 수의 연구결과 발표(딧면의 숫자는 추정연대)

실험실들이 밝힌 실험의 정확도는 95%, 오차는 200년 미만이다. 이는 예수가 사망한 시기와 약 1300년이나 차이가 난다. 탄소연대측정법에서 도출된 결과는 프랑스 리레에서 처음 수의가 공개된 시점과 일치해, 그 당시 순례자들을 모으기 위해 위조했을 거라는 회의론자들의 기존 주장을 증명하는 셈이 되었다. 세계가 경악하였음은 물론이다.

조사를 담당하였던 스위스의 윌리 뵐프리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토리노의 수의가 가짜라는 연구 결과에 대하여 놀라지 않으셨습니까?”

전혀 놀라지 않았습니다. 수의에 대한 역사를 고려한다면 그것이 2,000년이나 오래된 직물이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실험은 나의 견해를 확인하여 준 것뿐입니다.”

 

예수가 죽은 지 수세기가 지나자 기독교인들은 예수나 순교자들의 삶과 직접 연관된 유물들을 찾고자 했다. 성자의 유품초자연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세의 서유럽의 모든 성당, 교회 그리고 수도원은 적어도 성유물 한 가지 정도는 소장해야만 대접을 받았다. 유물들은 기도와 병 치료를 원하는 순례자들을 끌어 모으는 역할을 했고 기금 모집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따라서 유물을 조작하는 사기행위도 발달했으며 유물만을 훔치는 도둑질도 성행했다. 심지어는 여러 성당이 골고루 나눠 가질 수 있도록 성자의 시신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기도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십자군 전쟁시에 유럽으로 들어온 가짜 수의의 진상을 쉽게 알아낼 수 있다.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에 대한 맹신과 당시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있던 아랍인들에 대한 무지에서 일어난 전쟁이었다. 11세기에 들어오면서 유럽은 인구가 늘어나고 농업 생산이 호조를 보여 도시가 형성되는 등 점차 사회가 안정되었다. 자연히 무역을 위주로 하는 상인들은 차차 유럽 밖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때 지중해를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은 유럽 상인들의 교역을 방해하고 성지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기독교도를 박해했다. 이에 따라 이슬람교도로부터 예루살렘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마침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로마 교황에게 셀주크 투르크의 침입을 호소하자, 교황 우르반 2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종교 회의를 열고 성지를 되찾기 위해 십자군을 보낼 것을 제의하였다.

서기 1096년부터 1270년까지 약 17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다. 신앙심을 가지고 모인 십자군은 본래의 목적과는 달리 점차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결국 1차 십자군 원정을 제외하고는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특히 전쟁을 일으킨 기독교도들은 야만인이라고 생각했던 아랍인들이 자신들보다 더 선진 문명을 갖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 와중에서 상술에 밝은 아랍인들은 십자군 전쟁에 참가한 유럽인들이 예수에 관계되는 모든 유물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을 알아차렸다. 유럽인들에게 바위를 깎아 만든무덤 속에 예수를 매장하기 전 예수의 시신을 쌌던 수의만큼 호기심을 일으킨 것은 없었을 것이다. 결국 아랍인들은 가짜로 수의를 만들어 성유물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유럽인들에게 판매함으로써 자신의 영토를 침략한 이방인들에게 가장 통쾌한 복수를 한 셈이었다.

 

<수의 제조 방법>

학자들은 토리노의 수의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추론하기 시작했다.

우선 학자들은 예수가 처형되었던 것과 똑같은 상황을 모델을 이용하여 제조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즉 모델을 이용하여 예수가 처형당했던 상황을 재현한 후 상처 난 모델의 몸에 물감을 칠한 후 수의를 덮고 탁본했다는 것이다. 이는 위조범이 로마식 고문과 처형 방법을 잘 알고 이를 재현했다는 것이다.

시체나 조각상을 이용하는 방법도 제시되었다. 시체나 조각상에 예수가 처형당한 것과 같은 상처를 만들고 질산과 암모니아에 적신 세마포를 덮은 뒤 양지바른 곳에 세워두면 수의와 같은 형상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방법으로는 토리노의 수의에 있는 흔적을 100퍼센트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불분명하다는 지적이다.

 

바티스타 성당에서의 수의 공개 모습

캘리포니아의 산타바바라에서 1978년 수의 조사에 참석했던 번 밀러와 샘 펠리코리가 이와 유사한 실험에 착수했다. 그들은 피실험자가 땀을 낸 후, 40미크론 정도만 오염되도록 표백되지 않은 린넨으로 살짝 덮어 햇볕을 쬐었다. 그들은 피부 접촉면에 땀이 묻은 곳이 퇴화되어 황색으로 변색되는 것을 확인했고 이를 섭씨 176의 열을 가열하니 수의와 유사한 그림이 나왔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들도 색상은 일치하였으나 음영은 일치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스티븐 매팅리포도상구균을 바른 인형을 수의로 단단히 감싼 후 그 위에 영양분을 도포한 후 박스에 넣었다. 2일 후 박스를 열어서 말렸더니 색상이 일치하였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수의의 얼룩과는 달리 실물보다 얼굴이 크게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실험 수의로 얼굴 옆면까지 감싼 탓으로 추정했다.

한 과학자는 수의가 가짜임을 전제로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인영이 찍혔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마찰을 이용하는 것이다. 종이 위에 동전을 놓고 연필로 긁을 때 동전의 인영이 생기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그는 양각의 조각상 위에 천을 덮고 긁어대면 수의의 인영이 찍히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죠 니켈(Joe Nickell) 박사는 이상 열거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조합하여 실험에 착수했다. 우선 탁본용 조각을 만들어 그 위에 린넨을 꾹꾹 눌러 입체적으로 만들었다. 그 위에 붉은 산화철 가루안료로 착색했다. 붉은 산화철녹반과 황산철을 사용하여 만들었는데 이들은 시간이 흐르면 노란색으로 변색되는 특징이 있다. 니켈 박사는 산화철 안료로 혈흔을 만들 흔적이 토리노 수의의 흔적과 매우 유사하다고 발표했다. 그는 앞으로 600년 이상이 지나면 틀림없이 토리노 수의와 같은 결과를 나타낸다고 장담했다.

검시 전문가인 랜덜 브리스(Randall Bresee)와 에밀리 크레이크(Emily Craig)는 의료용으로 쓰이는 탄소분말을 사용하여 수의에 새겨진 형상과 아주 흡사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었다. 니켈이 사용한 방법은 물감이 의류조직에 너무 깊은 곳까지 침투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브리스와 크레이그의 방법은 토리노의 수의와 아주 동일한 형상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토리노 성당의 수의가 예수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해서 그리스도교에 미치는 영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여하튼 예수의 수의로 알려졌던 수의가 진본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자 토리노의 바티스타 성당은 곧바로 이를 수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