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그래?(세계불가사의)/어린왕자

어린 왕자, 드 생텍쥐페리 동화(3)

Que sais 2020. 11. 18.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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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의 의미>

드 셍텍쥬베리가 귀족 중 귀족이라는 것이 그의 생애를 계속 따라다니는데 이는 전통을 중시하는 유럽 사회에서 귀족이라는 신분이 가지는 의미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프랑스의 대통령이었던 샤를르 드 골, 죠르즈 드 퐁피두, 지스카르 데스텡 등 앞에 자가 붙는 사람은 모두 귀족이다. 유럽 언론이 대서특필감 기사로 입맛다셔 하는 것 중의 하나가 어느 왕족 또는 유명한 귀족이 평민과 결혼한다더라 하는 기사이다. 자유와 평등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 잘 확보되어 있는 듯 보이는 유럽에서 귀족이나 왕족이 평민과 결혼했다는 것이 뭐 그렇게 중요한 일이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들만의 사회에서는 보통 일이 아니다.

실제로 평민 출신의 프랑스와 미테랑1981년에 재선을 노리는 프랑스의 정통 귀족 지스카르 데스텡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모 신문에서는 데스텡이 미테랑의 등 뒤로 '그래도 당신은 귀족 클럽에 가입할 수는 없어'하며 스스로를 위안하는 만평이 실린 적이 있다. 이는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귀족이 아니면, 귀족 클럽에 입장이 불가하다는 것을 은연중에 비친 것이다.

유럽은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절대군주제에다 봉건 사회였다.

봉건 사회란 지금으로 따지면 지방분권제도와 다소 유사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통치하는 장원 자체의 방어력만으로는 외세에 대항할 수 없다는 한계를 인지하고 왕에게 세금을 내며, 외국과의 전쟁이 일어나면 병력을 동원하겠다는 서약을 한 후 자신의 영역 안에서는 자치권을 행사한다. 이때의 자치권이란 자신의 영지 안에서는 사법권도 행사할 수 있다는 뜻으로 봉건 귀족은 왕과 마찬가지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과거의 프랑스나 영국 등 왕정국가는 엄밀한 의미에서 각 지역을 자치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봉건 귀족들이 모여서 된 나라로 볼 수 있다.

현재의 지방분권제도와 과거의 봉건제도가 많은 점에서 유사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지방분권제도 하에서의 시장구청장군수 등은 주민들이 직접 선거로 뽑지만 봉건제도에서의 지도자는 대대로 상속이 된다는 점이다. 봉건제도에서는 공작후작백작자작남작 등 작위를 갖고 있는 귀족에 한하여 대대로 지도자가 세습되었고, 귀족 중에서 가장 높은 왕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 상속에는 철저한 규칙이 있다.

한 세대에 한 명만이 귀족의 칭호, 영국식으로 프랑스식으로 자를 붙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백작에게 5명의 아이가 있다면 ○○백작이 사망할 경우 그 자식들 중에 한 명만이 백작의 칭호를 상속받을 수 있다. 상속자가 되지 못한 나머지 4명은 귀족의 자식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평민이 되는 것이다. 이런 제도 때문에 유명한 추리소설가 아가사 크리스티를 비롯하여 수많은 유명 작가들이 소설은 물론 영화TV물에서 귀족들의 상속에 얽힌 문제를 단골로 다루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규칙에도 예외는 있었다. 왕의 자식 즉 왕자와 공주들은 귀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영국은 아직도 왕제가 존재하므로 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자식들은 모두 귀족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까다로운 규칙이 있었으니, 만약에 현재의 황태자인 찰스가 왕위를 계승할 경우 그의 아이들은 아버지가 왕이므로 왕자나 공주로 모두 작위를 계승하지만 둘째 아들인 에드워드, 마가레트와 앤 공주의 아이들은 단 한 명만 작위를 계승받는다.

찰스 황태자가 왕으로 등극해도 원칙적으로는 에드워드 왕자의 아이들, 즉 찰스 왕자의 조카들이 모두 귀족의 작위를 자동적으로 계승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러한 제도가 차질 없이 지켜지기 때문에 유럽의 귀족들이 평민들과 차별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예외없는 예외는 없는 법이다. 현재 영국의 여왕엘리자베스2로 그녀만 귀족 칭호를 어떤 사람에게든 신규로 줄 수 있다. 그녀가 개인적으로 어느 누구에게도 귀족 칭호를 줄 수 있다.

여왕이라 해도 자식에 대한 개인적인 정이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에드워드 왕자, 앤 공주는 자식 모두에게 귀족 칭호를 달라고 요청했다. 엘리자베스여왕이 승낙했음은 물론이다.

 

파리에입성하는 드골

그런데 마가레트 공주는 어머니인 엘리자베스여왕에게 자식 모두에게 귀족 칭호를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다. 그것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마가레트 공주가 사랑하는 남자와의 결혼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마가레트 공주가 자식의 미래를 위해 귀족 칭호를 받아내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현재는 큰 영향이 없지만 영국과 같은 귀족 사회에서 자식들이 대대로 귀족 칭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제도는 877616일 공포된 키에르지 쉬르 우와즈법령에 따라 귀족 작위 세습이 현 프랑스 지역인 서프랑크 왕국에서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독일 지역까지 지배하고 있던 프랑크 왕국이 동서로 분리된 후 이탈리아로 파병을 결정하자 귀족들이 작위 세습을 골자로 하는 조건에 왕이 서명하도록 강요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귀족 특히 왕족들이 전쟁이나 비상사태 때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것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영국의 경우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과의 전쟁을 독려하기 위해 왕이 많은 장병들을 위로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왕제가 없는 프랑스에서도 왕의 존재는 이에 못지않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망명 프랑스 정부의 수반으로 프랑스군을 이끈 사람이 드 골 장군이었다. 영국으로 피신 갈 당시 그의 경력은 국방부 차관이자 계급은 소장급이다. 영국에 망명한 사람 중에서 가장 높은 관직이나 계급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프랑스 망명정부의 수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드 골 왕자(prince de gaule)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원래 프랑스 지역을 지방이라고 하며, 로마시대의 줄리어스 시저가 지은 갈리아() 전기는 현재의 프랑스를 평정할 때의 이야기이다. 드 골은 프랑스 정부를 대표할 수 있는 프랑스의 왕자이기 때문에 전쟁이라는 긴급 시에 비록 각료로서의 서열은 낮았지만 망명정부의 수반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왕제가 없는 프랑스나 독일 등은 영국이나 스페인과 같이 새로이 귀족이 생길 수가 없다. 아무리 돈이 많거나 이름이 높아져도 귀족으로 태어나지 않는 한 귀족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불문가지이다. 그런데 이런 철옹성과 같은 귀족법에서도 절묘한 예외 즉 편법을 동원하면 평민이라도 귀족이 될 수 있다.

귀족은 부모가 귀족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유럽에서 돈이 많은 사람들이 돈이 없는 유명무실한 귀족을 양자로 받아드린다면 귀족 행세를 할 수 있다. 자식이 귀족이므로 부모가 귀족행세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유럽의 잡지 중에는 자신이 유명한 공작이나 후작, 백작 등의 가문에서 태어난 귀족으로 양부모를 찾는다는 광고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것이 있다. 조건은 자신을 양자로 받아들일 경우 아주 좋은 가문 출친의 귀족 양부모가 되므로 양자에게 엄청난 자금을 주는 것이다. 이런 점만 보더라도 유럽에서 귀족이 갖는 의미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적으로 영국의 경우 노벨상을 받거나 세계적인 저명인사 또는 영국에 엄청난 재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에게 왕이(Sir)이라는 귀족 칭호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 칭호는 대대로 상속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에게만 해당된다. 즉 그들이 죽으면 경이라는 칭호는 사라진다.

여하튼 프랑스만 하더라도 당장에 왕정으로 된다면 찬성하겠다는 사람들이 무려 25퍼센트나 된다는 여론조사가 나온 적도 있다. 물론 프랑스에서 왕제가 부활된다면 공식적으로 왕제가 폐지되기 이전의 왕가, 부르봉 왕가의 상속자가 왕이 된다. 프랑스에서 왕제가 사라졌다고 해서 부르봉 왕가의 자손들 모두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부르봉가에서는 언젠가 도래할지도 모르는 왕위를 상속할 계승자들이 계속적으로 세습되고 있는데 현재의 상속자 파리 백작파리자선병원의 원장이다.

 

<미국에서 어린왕자 출간>

1940510,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전쟁이 시작되자 523일 블로흐174 정찰기로 정찰비행 중 독일 전차부대를 발견했는데 대공화기에 피격되었다. 다행히 무사히 귀환하여 정찰비행 사진을 제공했다. 19406월 이 일로 훈장을 받았지만 건강상태로 19407월에 전역.

이후 성채(Citadelle)의 집필에 몰두했으나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함락되고 비시 정부가 들어서자 완성하지 못하고 12월에 미국 망명을 위해 뉴욕으로 출발하였다.

이때부터 그에게 구설수가 따라다니는데 군에서 전역했지만 드 생텍쥐페리드 골 장군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 진영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프랑스의 승리를 위해서는 미국의 개입이 절대적이라고 확신했다. 스스로를 프랑스와 동일시하는 드 골에 대한 불신감이 깊었던 데다가, 드 골의 자유 프랑스가 독자적으로 대독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면서 미국의 참전을 독려하기 위해 미국행을 결심한다. 그는 모로코, 리스본을 거쳐 19401231일 즉 1940년 마지막 날에 뉴욕에 도착했다.

 

생텍쥐페리

미국에서 드 생텍쥐페리는 사실상의 망명자나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한 달만 미국에 머물면서 미국의 전쟁 참전을 독려할 예정이었지만 프랑스로 돌아가도 뚜렷한 전망이 보이지 않는데다 그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인 19411월에 출간한 전시 조종사(Pilote de Guerre)가 호평을 받아 프랑스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내 콩수엘로를 미국으로 오게 했다.

1942년 여름 드 생텍쥐페리 부부는 뉴욕에서 기차로 45분 거리에 있는 롱아일랜드 노스포트 근처 이튼네크로 옮겼는데 이 집이 어린왕자의 사실상의 산실이다. 19434레이널앤히치콕(Reynal & Hitchcock) 출판사에서 어린왕자영어와 불어판이 출간되었다. 놀랍게도 이 당시 발간된 영어판 초판은 30,000, 불어판 초판은 7,000부였다. 프랑스에서는 드 생텍쥐페리가 사망한 194511월에야 책이 발간되었다.

프랑스에서 비교적 잘 알려진 드 셍텍쥐페리의 어린왕자가 미국에서 출간되는데는 약간의 에피소드가 있다. 생텍쥐페리가 뉴욕에서 미국의 담당 출판업자인 유진 레이널(Eugene Reynal)과 저녁 식사를 하던 도중에 냅킨에 낙서로 아이 한 명을 그렸다. 유진 생텍쥐페리의 그림을 보고 크리스마스 전까지 그 아이를 소재로 동화를 쓰면 참 좋을 것 같다고 제안했다.

글에 재주가 있는 생텍쥐페리는 처음부터 그림이나, 동화 창작에 관심이 많았다.

1940년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던 도중에, 어느 여배우가 그에게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를 알려주었고 또 다른 친구가 그에게 수채화 물감을 선물해주었다고 한다. 침대에 누워 기분전환으로 동화를 쓰기 시작했는데 일러스트를 다른 삽화가들에게 부탁했으나, 마음에 들지 않아 결국 자신이 직접 그렸다고 한다. 그는 주로 밤에 글을 썼는데 친구 중 한 명이 어린왕자나 여타 다른 사람들의 포즈를 담당하는 식으로 도와주었다고 한다.

생텍쥐페리가 원고를 완성하고 1943년 유진이 출간했지만 저작권 문제가 제기되었다. 드 생텍쥐페리의 모든 원고의 저작권은 프랑스의 대형 출판사인 <갈리마르> 사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갈리마르> 사는 드 생텍쥐페리가 사망한 후 기존에 출판된 원고의 타자기 본을 바탕으로 194511월에 프랑스에서 정식으로 출판한다.

드 생텍쥐페리가 미국에서 잘 나가고 있을 때, 비시 정부가 일방적으로 그를 정부 요직에 임명했다. 그러자 자유 프랑스 정부의 샤를 드 골 장군은 드 생텍쥐페리를 친독일 인사라고 공개적으로 암시하는 등 정치적인 색깔논쟁에 휘말린다.

그런데 그야말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생긴다.

드 생텍쥐페리가 4월에 출간된 어린왕자가 놀라운 인기를 끌고 있었음에도 자유 프랑스군에 입대하기 위해 5월 프랑스령 알제리에 도착한 것이다. 당시 알제리의 드 골 임시정부는 유명인사인 드 생텍쥐페리가 참전하지 않는 것을 빗대 공공연히 비겁자로 비방하며 그의 책 전시조종사판매를 금지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드 생텍쥐페리가 다음과 같은 말을 친구에게 한 것을 볼 때 매우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왜 내가 전투 비행기에 몸을 싣고 순정한 삶을 살도록 허락하지 않는단 말인가.’

 

한마디로 그가 독일파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프랑스 공군은 최신형 미제 항공기 조종사 연령을 만 35세 이하로 제한했는데, 당시 43세였던 그는 연령제한을 8년 초과했다. 더구나 잦은 추락사고로 인한 부상 후유증으로 비행복을 스스로 입을 수도 없었고, 왼쪽으로는 고개를 돌릴 수도 없어서 후방의 적항공기를 확인할 수 없을 지경이었기 때문에 조종사 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비행사 생텍쥐페리 

그러나 드 골 장군의 자유프랑스군에서는 일단 합류한 드 셍텍쥐페리의 위상을 고려하여 예비군 공군 소령 계급을 주고 조종사로 복무토록 허락한다. 다만, 매우 정교한 최첨단 정찰기인 F-5B-1-LO 라이트닝 정찰기를 조종하기 위해서는 7주간의 기종 전환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조건을 걸었다.

놀랍게도 신체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드 셍텍쥐페리는 이들 훈련을 성공리에 마치고 19437월 튀니지 부근의 라 마르사 기지에 위치한 미 제7군 소속 자유 프랑스 공군 제33정찰비행대대 2비행대자신의 옛 비행중대에 복귀했다. 그의 비행기 조종에 대한 의지는 꺾이지 않아 이때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나는 죽음이라는 개념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했다.’

 

또한 동료 조종사들에게 점쟁이들이 자기는 바다에서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것이 추후에 그가 자살했다고 알려진 이유 중에 하나인데 여하튼 그는 프랑스의 코르시카에 있는 새로운 기지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