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가면 폭탄을 터뜨린 볼테르>
철가면의 원전은 1850년 뒤마의 『삼총사』가 출간되기 100여 년 전인 1751년, 『루이 14세 시대』를 발표한 볼테르다. 유명한 사상가 볼테르는 당대의 반체제주의자로 23살 때 루이14세의 동생의 차남인 필리프2세를 조롱하는 풍자시를 발표하여 루이 14세 때 체포되었다.
이러한 체포 경험은 그로 하여금 루이14세 체제를 공격하는 본격적인 저격수로 나서게 하는데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당시 프랑스 영토인 제네바 국경 근처로 피신하여 폐허가 된 페르네이 성을 구입하여 은거했다.
프랑스에서 체포 명령이 내리면 총알같이 이탈리아로 피신할 수 있기 때문으로 그는 이곳에서 『루이 14세 시대』를 출간한다. 한마디로 프랑스 최고의 미스터리로 알려지는 '철가면 사나이'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는 작품에서 철가면의 사나이가 감옥에서 철로 된 가면을 쓰고 식사를 할 때조차 가면을 벗을 수 없는 인물로 묘사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당시 프랑스 정권의 무자비와 잔혹성을 비판하였다.
그에 의하면 철가면은 루이13세의 왕비인 오스트리아의 안 도트리시와 당시 재상인 마자랭 추기경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라는 것이다. 당시 루이 13세는 성불능인데다 왕비는 마자랭과 불륜 관계라는 소문이 자자했음을 강조했다.
여하튼 볼테르는 철가면 사나이의 정체를 루이 14세의 동생이라고 주장하며 루이 14세를 자신의 동생조차 철가면의 씌운 채 감옥에 수감시키는 잔혹한 인물로 설정했다.
일부 학자들은 볼테르가 루이 14세의 동생이 철가면을 쓴 채 죽을 때까지 감옥에 수감되었다는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목표인 부르봉 왕조의 몰락을 위한 단초를 마련했다고 설명한다. 한마디로 칼보다 강한 펜으로 창조된 철가면 사나이가 프랑스 혁명의 초석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설은 신빙성이 매우 희박하다. 당시 왕비는 전 신하가 보는 앞에서 출산했기 때문에 태어난 아기를 감추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더구나 왕가의 서자는 경위가 어떠하든 투옥되기는커녕 영지와 연금을 주는 것이 보통이었다.
또한 루이 13세에게는 루이 14세의 동생이자 또 다른 아들인 필리프 드 프랑스라는 차남이 있었으며 왕비의 불륜 상대라는 마자랭 추기경은 왕비의 임신시기 중 이탈리아에 있었다.
루이13세의 왕비에 대한 또 다른 설도 있다.
철가면이 루이 14세의 친부일지 모른다는 주장도 있다. 루이 13세와 왕비는 결혼 후에도 불화로 오랫동안 별거생활을 했는데 왕비에게는 연인이 있었고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얼마 후 왕비가 루이 14세를 낳자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루이 14세의 생부를 쫓아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루이 14세가 왕위에 오른 후 생부는 몰래 아들 앞에 나타났다. 루이 14세는 자신의 비밀이 탄로날까봐 두려워 철가면을 씌워 평생 감옥에 가두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죄수가 사망했을 때의 나이는 약 60세 전후의 중년 남자였고 루이 14세의 나이가 65세였으므로 그가 루이 14세의 생부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알렉산더 뒤마>
볼테르의 폭로가 있은 후 약 100여 년이 지난 1847년 문호 알렉산더 뒤마가 대표작 『철가면』을 출간했다. 뒤마 덕에 철가면의 수수께끼는 단번에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뒤마의 주장은 철가면은 루이 14세의 쌍둥이 동생이며 사령관 생마르가 적은 기밀문서에도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뒤마가 처음 제시한 것이 아니라 1770년 런던에서 출판된 『리슐리에 회상록』에서 처음으로 나온다.
뒤마는 프랑스 혁명 후 외무부의 기록보관실에서 발견되었다고 주장했다. 문서에 의하면 ‘루이 14세가 태어난 것은 1638년 9월 5일 낮 12시경이었고 동생이 태어난 것은 그날 밤 8시 경이다.’는 것이다.
사실 왕비의 출산이 있기 얼마 전 파이에 양치기 두 명이 나타나 왕비가 쌍둥이를 출산하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왕의 이야기를 들은 추기경 리슐리에는 만약 쌍둥이가 태어나면 후에 나온 아기에 대해서는 그 출생 사실을 감춰야 한다고 설득했다. 언젠가 왕위를 요구하면 나라가 시끄러워질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이 14세가 쌍둥이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해당 기밀문서는 현재로서는 위조문서라는 설이 강하다.
우선 사령관 생마르가 이런 사실을 알았다면 직책상 그런 내용을 따로 기록하여 보관한다는 것이 비상식적이며 더구나 추기경 리슐리에는 1638년 9월 5일부터 10월 2일까지 생캉탱에 머무르고 있어 출산을 지켜볼 수 없었다. 세 번째로 왕가의 출산은 신하들 앞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왕비가 쌍둥이를 낳으면 그것이 발각되지 않을 리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 회상록은 리슐리에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리슐리에가의 집사인 술라비가 쓴 것으로 이 부분의 기술은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 위조된 기밀문서는 알렉산더 뒤마 혼자의 상상물이라는 것이다. 물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한 「아이언 마스크」는 ‘철가면 사나이=루이 14세의 쌍둥이 동생'이라는 공식으로 풀어간다.
알렉산더 뒤마는 프랑스 북부 빌레르-코트레(Villers-Cotterets) 출신으로 평생 250여편의 희곡과 소설을 남겼고 유명한 『몽테크리스토 백작』도 그의 작품이다.
뒤마의 가족은 프랑스에서 매우 유명한데 그의 할아버지 알렉상드르 뒤마(1762〜1806)는 프랑스에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할아버지 뒤마는 아이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몰락한 프랑스 후작, 어머니는 흑인 노예였다. 다소 이해되지 않는 일이지만 할아버지 뒤마의 아버지는 프랑스로 돌아갈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들 알렉상드르를 노예로 팔았다가 얼마 후 다시 사들인다. 그것은 알렉상드르의 어머니가 흑인 노예이므로 그도 노예 대접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14세에 프랑스에 자신을 노예로 팔았던 아버지와 함께 들어와서부터 운명이 달라진다. 그는 프랑스에 도착한 후 곧바로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프랑스군에 이등병으로 입대했다.
장교가 될 수 없는 경력을 가졌지만 프랑스 혁명 덕분에 그는 1793년 즉 31살의 나이에 4성 장군이 되 53,000명의 병력을 지휘했다. 그는 유럽이나 미국을 통틀어 4성 장군 자리에 오른 최초의 흑인으로 미국은 1975년에야 최초의 흑인 4성 장군을 배출했다. 미 공군의 대니얼 제임스 2세다.
장군이 된 뒤마는 ‘반혁명분자’로 몰리기도 했지만 문제는 나폴레옹이 그를 싫어했다는 점이다. 왜소한 나폴레옹과는 달리 그는 기골장대하여 키가 182㎝를 넘었다고 한다. 특히 나폴레옹과 함께 이집트 공격군으로 참전했는데 이집트 사람들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전열의 맨 앞에서 병사들을 이끄는 알렉상드르 뒤마를 프랑스군 지휘자라고 착각했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탁월한 전략가·전술가이자 사상가였지만, 사람들은 나폴레옹보다는 뒤마를 더 사랑하고 따르고 존경하므로 나폴레옹이 그를 경원했다는 것이다. 여하튼 나폴레옹이 1802년, 1794년 폐지됐던 노예제뿐만 아니라 인종주의를 프랑스 제국에 다시 도입한 것은 그의 영향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는 나폴레옹과의 이집트 원정에서 영국제독 넬슨의 프랑스 함대를 공격할 때 간신히 탈출하지만 나폴리 왕국이 그를 투옥하고 프랑스에 보석금을 요구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그의 보석금 지불을 거절하자 그는 부인이 직접 보석금을 마련하여 석방되지만 포로생활의 여파로 세상을 떠난다.
이 때문에 알렉산더 뒤마는 작품에서, 나폴레옹을 매우 부정적으로 그린다. 또한 그의 유명 작품들의 주인공들은 그의 가문을 최종 모델로 한 것이 많다.
그런데 그를 줄곧 따라다니는 것은 『몽테크리스토 백작』, 『삼총사』, 『철가면』 등 주로 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썼지만, 재미를 위해서 역사왜곡도 서슴치 않았다는 지적이다.
그가 『삼총사』를 쓸 때 일어난 소송이 유명하다. 삼총사가 밀라디와 리셜리외의 밀담을 엿듣는 장면을 그렸는데 이 내용이 당시 동업자인 다른 작가로부터 표절 및 도용 혐의로 제소당한 것이다. 결국 뒤마는 처음 설정에서 대사를 더 넣어서 밀라디의 비밀을 추가한 뒤 리셜리외 추기경과 삼총사와의 만남 부분을 재창작하고 순서를 바꾸었다.
뒤마의 소설들은 '흥미의주의 소설' 로 쓰여진데다 모험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었기에, 웬만한 다른 종류의 고전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재미있어 호평을 받았다. 그런데 그의 소설 대부분 장편 즉 매우 긴 작품이다. 이는 당시 뒤마가 ‘소설 제조 회사’라는 비아냥을 받을 정도로 일생동안 엄청난 숫자의 상업 작품을 남겼기 때문이다. 양이 많으면 질이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작품들은 현재도 대중성을 인정받아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에게만은 다작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 예로, 당대의 기록 중에는 외과 의사가 마취제 대신에, ‘뒤마의 소설’을 읽고 수술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의 정치적 성향도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30년대 중반 프랑스는 산업화를 겪으며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작가들도 공화주의를 지지하는 측과 왕정 복고를 지지하는 측으로 나뉘어졌는데 그는 극작가로서 성공을 거두자 뒤마는 당시 빠르게 성장하던 언론 매체인 신문에 연재 소설을 기고했는데 이때 그는 과거에 발표한 작품을 각색하기 일 수였다.
뒤마는 많은 작품을 출판하였고 그로 인한 수입도 컸지만 씀씀이와 여성편력으로 파산을 밥 먹듯이 했는데 시민왕 루이 필리프가 반란에 의해 폐위되고, 나폴레옹3세가 집권하자 완전히 파산한다.
1851년 벨기에 브뤼셀로 추방당한, 뒤마는 다시 러시아로 이동한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프랑스어가 널리 통용되었기 때문에 뒤마는 그곳에서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1861년 3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이탈리아 왕국의 독립을 선언하자, 뒤마는 이탈리아로 건너가 신문 <인디펜덴테>를 발간했으며 이탈리아의 통일 운동에 앞장선 후 1864년 파리로 돌아왔다.
뒤마는 흑인혼혈이므로 인종주의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흑인 혼혈이란 점 때문에, 평생 인종주의에 시달렸는데 이를 단편 소설 『조르쥬』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아버지는 물라토요, 조부는 깜둥이었으며, 증조부는 원숭이었소. 알겠소, 선생? 우리 집안은 당신네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했단 말이오.’
뒤마가 사망한 후 자신이 태어난 고향 마을 빌레르-코트레의 묘지에 매장되었는데 2002년, 그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그를 프랑스의 위인들이 잠든 판테옹에 안장했다. 계몽사상가 볼테르, 소설가, 빅토르 위고, 과학자 퀴리 부인, 소설가 에밀 졸라 등이 잠들어 있었지만 그는 다소 대중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판테옹에 묻히지 못했는데 드디어 판테옹에 입성한 것이다.
시라크 대통령은 뒤마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프랑스 작가중 한 명으로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하는 것이 옳으며, 그것이 내가 그의 이장을 결심한 이유라고 밝혔다.
그가 프랑스에서 절대적인 작가로서 유명하지만 그의 아들인 동명의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1824〜1895)도 유명작가다. 그는 『춘희』 『사생아』 『방탕한 아버지』 『금전 문제』와 같이 ‘부인과 어린이의 바른 권리를 주장하고 남성과 금력(金力)의 횡포를 경계하는 작품’으로 필력을 자랑했다. 주세페 베르디(1813〜1901)의 오페라 「라트라비아타(1853)」는 뒤마 피스의 『춘희』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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