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가면에 대한 증언>
철가면이 살아 있던 당대에 그에 대해 철저하게 함구에 붙였지만 모든 사람에게 비밀을 유지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철가면 주위의 몇몇 사람들의 증언이 남아있다.
바스티유 감옥에서 죄수를 돌보던 의사 마르조랑은 1698년 철가면이 바스티유에 도착했을 때 그의 나이가 60살 정도라는 말을 듣는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철가면은 1638년생인 루이 14세와 같은 해에 태어난 것이 된다. 죄수 가운데 한 명이었던 한 수도원장은 철가면이 여러 곳에 여행한 적이 있다는 말을 듣는다. 생마르 사령관의 보좌관인 드 브렌빌리에는 비밀리에 보초로 변장하여 철가면의 모습을 달빛 속에서 보았다. 피부는 하얗고 큰 키에 탄탄한 체격으로 머리는 백발이었다고 적었다.
철가면이 사망한 후 생마르그리트 섬에 유폐되었던 극작가 샹세르는 간수장으로부터 ‘철가면이 투옥된 것은 1669년으로 생마르 간수장이 철가면에게 지극히 정중한 태도를 취하고 은 접시에 식사를 담아 매일 직접 갖다 주었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철가면을 체포하여 재판도 열지 않고 그대로 감옥에 수용시킨 루이 14세는 그 후에도 철가면에게 계속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학자들은 철가면이 진짜로 루이 14세와 같은 얼굴을 갖고 있다고 34년 동안이나 가면을 써야 했던 이유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얼굴이 국왕과 닮았다고 그것만으로 투옥되는 것은 비상식적이라는 뜻이다.
정말로 위험한 사람이라면 왜 34년이나 죽이지 않고 살려두었을까하는 점도 의문이다. 당대에 죽이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닌데 바로 이 점에서 철가면이 루이 14세와 가까운 사람이라는 소문이 계속 나온 것이다.
프랑스 혁명과 함께 마침내 철가면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실마리가 잡혔다.
국방부의 고문서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육군장관 루부아와 당시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알프스 산중턱의 작은 마을 페네롤로 감옥의 간수장이었던 생마르 사이에 오갔던 편지가 대량 발견된 것이다. 피네롤로는 마을 전체가 성채로 둘러싸인 견고한 요새다. 1669년 철가면이 최초로 유폐된 해의 6월 말경 루부아는 생마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칙명으로 유스타슈 드제라는 자를 피네롤로로 호송시키겠소. 중요한 것은 이 자를 엄중히 격리하여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신상을 이야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요. 귀하에게 사전에 연락한 것은 이 자를 수용할 독방을 준비하도록 하기 위해서요. 들창은 누구도 가까이 갈 수 없는 방향에 만들고 감시병들이 아무것도 엿들을 수 없도록 다중문으로 하며 식사는 하루 분을 하루에 한 번 당신이 직접 갖다 주시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자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우리지 말고 본인에게도 쓸데없는 말을 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말하시오. 푸파르 씨에게는 따로 통보하여 당신이 지시하는 일을 하고 당신에게 보낼 죄수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세간들을 준비하도록 명령했소. 세간 준비 대금과 죄수의 식비는 내가 직접 정산할 것이요.’
이 내용을 보면 드제라는 남자가 이미 체포되어 피네롤로로 우송할 계획이 정해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그에게 자신의 신상을 이야기하지 못하도록 한 것으로 보아 중대한 어떤 비밀을 갖고 있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생마르에게 직접 식사를 갖다 주라는 것도 예외이며 죄수가 자기의 체포 이유를 털어놓으려고 하면 그 자리에서 죽이라는 말도 해괴하다. 더욱이 죄수 전용 식단으로 예산이 지불되는데도 불구하고 별도 예산으로 그에게만 특별식을 주라고 한 것도 평범한 이야기는 아니다. 실제로 생마르는 철가면에게 직접 식사를 갖다 주었고 그를 왕족처럼 우대했다.
생마르는 1669년부터 매주 육군장관인 루부아에게 보고서를 보냈다. 이 이례적인 조처는 루이 14세가 철가면에게 엄중한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수천 통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편지 대부분은 루이 14세의 명령에 따라 처분되었지만 사라지지 않은 편지 100여 통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드제는 1987년 지중해 남부의 셍마르그리트 섬으로 이송되었고 이때도 생마르 간수장이 동행했다. 생마르그리트 섬에는 12개의 감방과 수비대를 수용하는 커다란 건물이 있었는데도 드제를 위해 특별 감방을 만들었다. 생마르그리트 섬의 생활은 피네롤로와 다른 점이 없었다. 그에게 파격적인 예산이 배정되었고 경비는 엄중했다. 1698년 생마르가 간수로서는 최고위인 바스티유 감옥 사령관으로 발령나자 철가면도 바스티유로 이송된다. 이 당시 생마르는 생마르그리트 섬에 근무했던 부관은 물론 말단 간수까지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바스티유로 데리고 같다.
프랑스의 사학자 바이언 박사는 당시 바스티유 감옥의 죄수들과 관련된 자료를 조사한 결과 철가면 즉 드제는 이탈리아의 에르콜레 마티올리 백작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1640년에 태어난 만토바 공국의 재상이다. 프랑스는 1632년 피네롤로로 불리는 토지를 구입했다. 그리고 약 30년 후 루이는 만토바 공국내 토리노 근방의 카살레 지역을 이탈리아 북부 점령을 위한 요충지로 생각하여 만토바 공작으로부터 카살레 지역을 넘겨받는 조건으로 엄청난 금화를 약속했다. 만토바 공국의 재정적으로 매우 궁핍한 상태로 무엇이라도 처분해야 할 형편이었다. 교섭은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프랑스와 스페인과의 관계가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만토바 공국의 주위에는 스페인사람들이 많았다. 루이 14세의 제안에 선뜻 응낙하지 못한 공작은 루이 14세와의 협의를 위해 자신의 심복 마티올리 백작을 프랑스로 보냈다. 루이 14세는 백작에게 많은 금은보화를 내밀었지만 애국심이 투철했던 백작이 그 모든 제안을 거절하고 비밀 교섭을 스페인에게 누설했다. 이 때문에 거래가 깨졌다. 루이14세는 격분했지만 마티올리가 이탈리아 영내에 있는 한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러자 왕은 마티올리에게 화를 내지 않고 거래를 종결짓는다는 명목으로 그를 피네롤로로 불렀다. 그가 프랑스 영지인 피네롤로로 들어서는 순간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된다. 마티올리는 단순한 ‘행방불명’으로 처리되었고 옥사했다.
앞에서 바스티유 감옥의 에티엔 드 조카는 철가면을 ‘마르셀’이라고 호칭했다.
한편 죄수는 ‘마르시올리’라는 이름으로 매장되었다. 그러나 마티올리가 가면의 사나이라고 한다면 생마그리트 섬의 감옥에서 다시 바스티유로 이송한 다음에도 왜 왕은 이 죄수의 신원을 숨겼는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마티올리가 이탈리아에서 실종된 것은 사실이므로 외교문제로까지 발전할 수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당시는 권모술수가 횡행하고 각 국가가 오직 실속만 차리던 시대였으므로 일단 감옥에 갇힌 사람에 신경을 쓰는 시대는 아니었다. 더욱이 왜 마티올리의 얼굴을 가려야 했는가이다. 그가 만토바 공국의 재상을 설사 지냈다하더라도 그가 당시의 정황을 볼 때 그렇게 중차대한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철가면이 마티올리라는 주장에는 결정적인 하자점이 발견된다. 피네롤레의 교도소장인 생마르가 1681년 근처의 다른 교도소로 전근가면서 그 ‘옛 죄수’도 데리고 갔다고 되어 있으나 마티올리는 그냥 남아 있었다.
<계속되는 철가면 연구>
프랑스 혁명으로 바스티유 감옥이 무너진 후 즉 철가면이 사망한 지 약 100여년이 지나 『바스티유 공개』라는 책이 출간되었는데 이 공문서를 조사한 위원회의 책임자인 M. 샤르팡티에는 철가면의 사나이를 비롯한 왕실의 비밀 자료들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철가면의 사나이를 ‘옛 죄수’라고 적었는데 매우 흥미있는 내용을 찾아냈다. 철가면은 오스트리아의 앤과 영국의 버킹엄(1592〜1628) 공작과의 사이에서 얻은 자식이라는 전설에 대한 내용이다.
버킹엄 공작은 뒤마의 『삼총사』의 핵심인물로 나오는데 그는 영국의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 시대의 젊고 잘 생긴 모략을 즐기던 정치가였다. 그는 제임스 1세와 동성연애의 상대로 알려지는데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1626년 프랑스 체류 중에 루이 13세의 왕비인 앤의 유혹에 빠졌다는 설명이다. 여하튼 앤이 1626년 버킹엄 공작과의 사이에서 사내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는 그로부터 12년 후에 태어나는 그녀의 아들 루이 14세와 매우 닮았다는 것이 이들 주장의 핵심이다. 그에게 가면을 씌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의 결정적인 약점은 철가면이 1626년에 태어났다고 하면 사망시에 73세 정도가 되는데 이 죄수에 관한 여러 가지 증거는 이보다 적어도 10세는 아래라고 이야기된다. 바스티유의 문서에는 철가면이 투옥된 해가 1669년이라고 나와 있는데 그렇다면 그 당시 이미 40세가 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유럽에서는 이미 노인에 속하는 나이다.
여하튼 철가면 즉 드제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도전했다.
다소 실망스러운 이야기이지만 철가면의 진실을 아는 최후의 생존자로 프랑스의 궁정대신 샤미르가 등장한다. 그가 사망하기 전 그의 사위가 침상을 지키고 있었는데 사위는 그에게 철가면의 비밀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샤미르는 국가의 이익과 관련된 기밀이라 영원히 비밀에 부치겠다고 국왕에게 맹세했다며 끝내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철가면의 진실을 공식적은 증언으로는 확인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1970년 프랑스 기자 알레스가 출판한 『철가면, 그 비밀을 풀다』.에는 철가면이 루이 14세의 재정대신 푸케라고 결론지었다. 1615년에 출생한 리슐리에 추기경의 부하로 루이 14세가 총애하던 신하이지만 1661년 마자랭이 사망하자 사람들은 푸케가 재상이 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당시 23세의 젊은 왕은 권세를 이용하여 거부가 된 푸케에 대해 크게 실망한다. 왕은 사업가의 아들 장 밥티스트 콜베르(1619〜1683)를 푸케의 부관으로 임명하는데 그는 푸케가 매일 오후 왕에게 보고하는 재무상의 숫자가 엉터리임을 알아내고 왕에게 밀고한다. 푸케는 공금 횡령혐의로 체포되었는데 루이 14세는 그를 사형에 처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법원에서는 그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그가 복역한 곳은 피네롤로의 감옥으로 『삼총사』의 주인공인 달타냥이 실제로 푸케를 감옥으로 호송했다.
루이 14세는 감옥에 있는 그에게 자결할 것을 명했고 얼마 후 푸케는 사망했다. 그의 사망년도는 1680년 3월인데 알레스 기자는 이때 사망한 사람은 푸케가 아니라 그의 하인이었고 그는 가면을 쓴 채 일생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철가면이 정말 푸케라면 1703년 사망할 당시 그는 백발노인이어야 하는데 철가면은 사망할 때 중년이었다. 철가면에 대한 전설이 워낙 널리 퍼지자 루이 15세와 루이 16세 모두 철가면에 대해 조사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조사결과는 밝혀지지 않았고 루이 16세는 철가면에 대한 비밀을 영원히 지켜야 한다고만 말했다. 철가면에 대한 비밀이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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