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속인 거짓말/나폴레옹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패배의 진상(1)

Que sais 2020. 11. 26.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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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 있는 정신병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은 남자로는 나폴레옹이고 여자로는 클레오파트라. 이들 정신병 환자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나폴레옹이나 클레오파트라의 현신이므로 사람들이 자신에게 봉사할 의무가 있다고 강변한다. 실제로 정신병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나 연극일 경우에도 이 두 사람은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온다.

정신병자들이 가장 많이 애착을 갖는 사람이라면 그들이 인류가 태어난 이래 가장 성공적인 생활을 한 사람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는 것은 역으로 볼 때 가장 많이 거짓말 한 사람도 된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엥발리드

나폴레옹프랑스가 자랑하는 영웅이며 아직도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파리의 엥발리드에 있는 그의 묘지를 찾는다. 파리를 점령한 히틀러가 제일 먼저 찾은 곳도 나폴레옹 무덤이었다. 나폴레옹은 살아있을 당대에 수많은 적과 동지를 만든 장본인으로 후대의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그가 일부 전문가들로부터 혹평을 받는 것은 자신의 지위 향상을 위해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한 전력도 단연 황제급이라는 사실이다. 나폴레옹이 갖고 있는 명성의 거의 대부분이 교묘하게 조작되었거나 철저하게 과장되었다는 사실을 보아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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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시카의 촌뜨기 나폴레옹

나폴레옹1769815, 프랑스의 식민지 코르시카 섬의 아작시오에서 카를로 보나파르트와 레티치아 라몰리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해군장교가 되고 싶었으나 식민지 출신이라는 불리한 조건 때문에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했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할 때에도 기병이나 보병장교가 되지 못하고 포병장교가 되었다. 기병이나 보병 장교프랑스 귀족 가문 출신에게만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폴레옹식민지 출신임에도 사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아버지의 배경 때문이다.

그가 태어나기 바로 전 제노바코르시카프랑스에 할양했다.

그러자 코르시카 사람들이 프랑스의 점령에 저항할 때 카를로 역시 파스콸레 파울리가 이끄는 코르시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파올리가 망명하자 카를로프랑스인과 타협하여 코르시카가 이탈리아 영토가 아닌 프랑스 영토가 되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엄밀한 의미로 볼 때 나폴레옹프랑스 인으로 태어났지만 프랑스 인들이 나폴레옹을 항상 이탈리아 촌뜨기로 대우한 이유이다. 나폴레옹도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으면서도 한 동안 스스로를 외국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나폴레옹의 아버지이탈리아인들로부터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라는 비난을 계속 받았다.

나폴레옹의 출생에 따른 문제는 나폴레옹이 출세할 때마다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한다. 프랑스 인들로 볼 때 나폴레옹은 프랑스 인이 아니라 이탈리아인으로 비쳐졌고 이탈리안들로 볼 때 나폴레옹은 매국노의 아들이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출신 배경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폴레옹은 황제가 된 후에 자신이 점령한 나라가족이나 부하들로 하여금 통치하게 했지만 이탈리아만프랑스와 합병하여 통치했다. 나폴레옹프랑스와 이탈리아통합한 단일 국가의 황제이므로 그의 출생문제는 통합 국가에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여하튼 나폴레옹은 시골뜨기라는 조롱을 당하면서도 사관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그의 사관학교 졸업성적58명 중 42번째로 좋지 않았으나 역사와 수학만큼은 뛰어났다.

179122살이 된 그는 프랑스 혁명의 주력 세력인 자코뱅 당가입하여 포병 연대장이 되었으며 2년 후인 1793뚤롱 전투에서는 영국군섬멸한다. 여기에서 툴롱 전투프랑스 혁명정부의 운명을 좌우한 매우 중요한 전투다. 프랑스 남부 지중해에 있는 뚤롱 항영국이 점령하고 있었는데 성이 견고한 것은 물론 모든 보급품을 바다로부터 받고 있었으므로 프랑스는 그들을 격퇴할 수 없었다.

 

나폴레옹의 뚤롱항 탈환 

한편 프랑스 영토 안영국의 점령지가 있다는 것은 프랑스로서는 불명예였으므로 뚤롱을 함락하는 것은 혁명정부로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혁명정부는 역전의 명장 까르또우 장군을 투입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이 때 참모회의에 참석한 조그마한 포병장교가 자기의 의견을 말했다.

 

"제가 망원경을 갖고 산을 돌아다녀 본 결과 기습작전을 편다면 에기에뜨 포대를 점령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일단 이 포대를 점령한다면, 한 눈에 뚤롱 항이 내려다보이므로 영국군은 복부를 찔리는 것이 될 겁니다. 그러니까 영국 함대는 모두 도망치거나 아군의 포격으로 침몰하게 됩니다.“

 

그의 의견은 곧바로 채택했고 이 키가 작은 청년장교는 병사들을 이끌고 산으로 올라가 기습작전으로 영국군의 에기에뜨 포대를 점령했다. 그가 포대를 점령하자 영국군은 프랑스군 포화의 과녁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현명한 판단을 했다. 곧바로 모든 함대를 철수한 것이다. 이 청년장교가 나폴레옹이며 그는 이 사건으로 일약 국민적인 영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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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인들을 후련하게 만든 나폴레옹의 신화

나폴레옹은 처음부터 출발이 순탄했다.

그러나 1795세칭 테르미도르 반동, 즉 자코뱅 당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실각된 후 처형당하자 나폴레옹도 체포되어 감옥 생활을 한다. 여기에서 기적이 일어난다. 그는 자코벵 당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처형되어야 하지만 극적으로 목숨을 건진 것이다.

파리에서 일어난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뚤롱의 영웅이 혁명정부로서 꼭 필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단 2주일 만에 석방되며 기대대로 반란을 효율적으로 진압하고 이어서 이탈리아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다. 당시 프랑스는 대프랑스 동맹의 중심세력인 오스트리아공격하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했는데 나폴레옹이 그 중 이탈리아 방면3군을 지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1, 2은 모두 오스트리아에게 했으나 나폴레옹만은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패배시킨 후, 1797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수도에 육박했다. 여기에서 오스트리아프랑스에 굴복하고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체결하며 벨기에와 이탈리아의 북부지방롬바르디아를 프랑스에게 넘겨주었다.

젊은 청년 장군 나폴레옹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혁명 정부는 나폴레옹의 인기가 너무 높아지자 견제하기 시작했다. 그를 프랑스 국민들과 차단하기 위해 이집트로 파견명령을 내린다. 명목은 영국과 인도를 잇는 길을 차단함으로써 영국의 인도 지배방해하고 그 세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폴레옹이집트의 원정이 결정되자 여타 지휘관들과는 다른 명령을 내린다. 원정군을 군인만으로 구성하지 않고 학자들을 포함시킨 것이다. 그는 35,000명의 장병 외에도 300명의 과학자들을 선발했다. 그의 부대는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한 후, 지역의 호족들을 쳐 부시고 카이로에 입성했다.

 

나폴레옹이 대동한 학자들은 이집트의 고대 유적은 물론 이집트에 살고 있는 동, 식물은 물론 고대 이집트인들의 풍속 등을 조사했다. 이때 발견된 로제타석이 결국 이집트의 고대 문명을 밝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점이 나폴레옹은 다른 지도자와는 달리 학자들을 우대하였으며 전쟁만을 일삼는 전쟁광이 아니라고 선전된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학자들을 데리고 이집트에 원정을 간 것은 사실 이집트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들의 재산을 손쉽게 약탈하기 위한 방안 중에 하나라는 지적도 많이있다. 당시에 외국을 침략할 때 어느 나라의 지휘자들도 나폴레옹과 같이 학자들을 대동하였다는 것이다

낙타타고 이집트로 진군하는 나폴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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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일본한국에 진출할 때 제일 먼저 한반도측량하고 각지의 풍물을 조사하였던 것과 맥락이 같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이 특별히 유명한 것은 이집트가 몇 천 년의 역사를 갖고 있었는데도 역사에서 도외시된 지역인데다 피라미드 등과 같은 신비의 유적들이 많이 있어 일반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매우 비난받는 일을 자행하는데 서슴치 않았다는 점이다. 1799자파(Jaffa)에서 터키 수비대를 공격하여 2,000여명을 격파한다. 그런데 그는 3,000여명의 포로들을 모두 살해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들이 온전하게 살아 돌아간다면 다시 프랑스군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설명이다.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 나가있는 동안에 프랑스는 국제적으로 사면초가에 빠지고 있었다. 더구나 그는 이집트에서 무려 10,000여 명의 손실을 입은 상태였다.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다시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위협했으며 국내 정치도 그들의 공격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때의 주변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고 있던 나폴레옹은 혁명 정부의 명령도 받지 않고 몰래 이집트에서 탈출한 후 동생 루시앙의 도움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헌법을 폐기하고 3명의 통령을 두는 새 헌법을 만들어 국민투표에 부쳤다. 나폴레옹은 개인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새 헌법은 압도적인 지지를 얻으며 1통령이 되어 사실상 프랑스 정권을 자신의 손아귀에 장악했다.

당시 프랑스 인들은 루이 16세를 처형하는 등 혁명의 와중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안정과 질서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나폴레옹은 그들의 구미에 맞는 인물이었다. 더욱이 프랑스 인들에게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의 멜라와 전투에서 승리하여 프랑스의 자존심을 높여 준 영웅이다.

그런데 나폴레옹의 명성을 한껏 올려 주는데 큰 공헌을 한 오스트리아의 전투에 대해서도 구설수가 따라다닌다. 그는 1800614일 적군의 동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유명한 드새(Desaix) 장군의 정예부대를 정찰임무에 투입했다. 이때 오스트리아군이 공격해왔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오후 5시까지 계속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멜라는 자신이 승리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드새 장군이 가까스로 합류하여 영웅적인 활약을 보이면서 전사하고 켈르만(Kellermann) 장군이 공격에 나서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는 오스트리아 전투에서 나폴레옹공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켈르만 장군은 그의 영웅적인 행동으로 보상을 전혀 받지 못하고 원수가 되지도 못했다. 보나파르트가 보기에 그는 자신을 추월할 잠재력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보나파르트는 계속 평탄한 가도를 달려 1802년에는 숙적 영국과 아미앵 조약을 체결하고 10년 만에 평화를 맞았다. 프랑스는 이에 부응하여 나폴레옹종신통령에 임명했다.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은 프랑스 인들의 민심을 여러 면으로 유효 적절히 이용한다. 한 마디로 자신이 황제가 되어야만 프랑스가 안정된다는 것이다. 그의 여론몰이는 성공하여 2년 후 국민투표에 의해 마침내 황제가 된다. 루이 16세를 처형하여 공화정으로 나선 지 겨우 10년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골치거리는 역시 영국이었다.

영국해군력을 바탕으로 나폴레옹의 권위에서 벗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영국을 철저하게 굴복시키기 위해 1806대륙봉쇄령을 내려 유럽 국가들이 영국과의 교역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영국과의 무역에 의지하던 러시아는 이 명령으로 생존권에 영향을 받자 봉쇄령을 지킬 수 없었다. 181260만의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로 쳐들어가게 되는 요인이다.

 

불타는 모스크바

나폴레옹군은 예상대로 쉽사리 모스크바점령했다.

그는 모스크바를 점령하기만 하면 러시아에서 그가 제안한 화평에 응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황제는 나폴레옹의 화평 제의를 거절하고 항전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러시아에서 겨울을 지낼 준비를 하지 않은 나폴레옹군은 결국 빈손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폴레옹군이 퇴각하는 순간을 기다린 러시아 군은 철수하는 프랑스군을 철저히 공격하여 궤멸시켰다. 이 당시의 패배는 나폴레옹의 몰락을 초래했고 1814년 지중해의 작은 섬 엘바로 유배되었다. 새 황제로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가 즉위했다.

그러나 18152나폴레옹엘바섬을 탈출하여 다시 파리로 돌아왔고 루이 18도망쳤다. 다시 유럽은 나폴레옹을 저지하기 위해 군대를 모았고 6월에 벨기에의 워털루에서 양 진영은 운명의 한 판을 벌렸다. 결과는 나폴레옹의 패배였다. 재집권한지 꼭 백 일 만의 일이었다. 이 패배로 나폴레옹은 더 이상 재기할 힘을 잃고 대서양의 외딴 섬인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