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속인 거짓말/나폴레옹

나폴레옹의 독살(1)

Que sais 2020. 11. 26.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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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은 독살되었다

나폴레옹은 놀랍게도 그는 자신이 왜 죽어 가는지를 알고 있었다.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나폴레옹은 외형적으로 평온한 생활을 했지만 실제로는 매우 정신적인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의 아내 마리 루이는 물론 아들 등 그와 관련되는 어떤 사람들과도 연락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유폐되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그리워할 것으로 생각했다. 아내도 자기를 만나고 싶어 했지만 점령자들의 간계에 따라 상봉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생각하는 생활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보호자로 지정된 오스트리아의 군 장교 그라프 아담 폰 네이퍼그와 정을 통하고 있었으며 나폴레옹이 사망하기 이전에 비밀리에 그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나폴레옹이 이 사실을 몰랐을 것으로 두둔하지만 여하튼 나폴레옹이라 할지라도 자신과 가장 가까운 처까지 자신을 배신하고 있는 지를 알지 못했다.

아들의 경우도 나폴레옹이 생각하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생활했다. 전직 로마 왕이었던 자신의 아들이 라이히슈타트의 공작이 되어 비엔나에서 안전하게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나폴레옹은 유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내 아들이 프랑스 왕자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기를 바라며, 통일된 유럽 국가를 반대하는 권력 집단의 손에 놀아나는 도구가 되는 것을 그 스스로 허용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버지의 죽음을 복수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교훈으로 삼아라

외교 문제에 관한 한 아버지의 업적을 계승해라

진보적인 사상가가 되어라

 

또한 나폴레옹은 아들에게 프랑스를 적국으로 하는 전쟁을 절대로 하지 말라.’고 요구하고 아들더러 모든 것을 프랑스 국민들을 위하여라는 자신의 의지를 받아들일 것을 제안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퇴위해도 아들이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이끌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18151015, 프랑스이탈리아의 황제로부터 퇴위한 후 세인트헬레나 섬에 도착했다. 나폴레옹세인트헬레나유폐된 것은 간단하다. 나폴레옹이 더 이상 정권을 잡아 유럽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폴레옹이 사실상 영국의 포로로서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으며 그가 살아서는 결코 그 섬을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을 뜻했다.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폐되었다지만 그는 매우 활기 있고 건강했으며 규칙적인 생활에 적응했다. 아침 9시에 일어나서 10시에 아침식사를 하고 별로 외출하지 않았으며 한 때 수상이었던 비서 라스 카세스에게 자신이 구술하는 것을 받아쓰게 했다. 저녁 7시에 식사를 하고 11시까지 소리내어 고전을 읽다가 잠자리에 드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그런데 나폴레옹을 심층적으로 연구한 학자들은 나폴레옹이 어린 시절부터 만성 질병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만성적인 위 장애와 배뇨 장애, 신경성 피부염 등이다.

 

나폴레옹의 초상

나폴레옹의 군의관알렉산드르 우르방 이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황제는 매우 신경질적이었고 감정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그럴 때마다 위와 방광의 경련을 일으켰다.’

 

그래서인지 나폴레옹배에 통증이 생기면, 상의의 단추를 풀고 손을 넣어 통증이 있는 부위를 손으로 만졌다. 나폴레옹의 이러한 모습은 나폴레옹의 초상이라는 작품으로 남아 있다. 바로 나폴레옹을 상징하는 포즈. 학자들은 이 포즈야말로 배에 통증이 생겼을 때 통증을 완화시키기 위한 포즈였다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이탈리아 원정 때는 편두통과 발열, 치질로 고생을 했으며 방광에는 여러 번에 걸쳐 염증이 생겼고 간질 증상도 있었다.

나폴레옹에게 간질 증상이 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로 1803년부터 몇 차례 간질 발작이 있었는데 그는 이로 인해 미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프랑스 왕들이 사용했던 침대에 누울 때마다 그들의 실성해서 마구 부렸던 광기가 옮아오는 것 같네.’

 

한 번은 나폴레옹이 밤중에 심한 간질 발작을 일으켰다. 그때 옆에서 자고 있던 그의 정부가 기겁해서 소리를 지르며 벗은 몸으로 침실 밖으로 뛰어 나갔다가 그 소리에 놀라 잠이 깬 왕비와 복도에서 마주친 일화도 있다고 한다.

학자들은 발작 시에 얼굴이 찌그러지고 땅바닥에 넘어졌으며 정신을 잃었다는 설명을 토대로 간질 중에서도 소위 대발작(大發作)인데 1805년 이후부터는 발작을 일으킨 기록이 없다는 것이 다소 의아하지만 간질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물론 많은 학자들이 나폴레옹의 질병은 치사율이 높은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나폴레옹에게 지병이 있다고 해도 그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는 센트헬레나 섬유폐되었음에도 그는 매우 활기 있고 건강했으며 규칙적인 생활에 적응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정력적이고 활동적인 나폴레옹182155일 즉 유배된 지 5년 반 후에 사망하였다. 1821년 봄부터 시작하여 나폴레옹은 위와 간의 통증으로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그는 구토에다 세인트헬레나에서 옮은 아메바성 이질로 인한 급성 설사가 겹쳐서 심한 탈수 상태에 빠져 있었다.

 

나폴레옹의 사망

그의 주치의 프란시스코 안톤 마르키는 그에게 주석(酒石: 포도주 침전물) 구토제레모네이드에 타서 주었다. 주석 구토제는 유독한 안티몬 혼합물로 당시 의사들이 표준으로 사용하는 설사약이었다. 이 약을 마시고 나폴레옹은 방바닥에서 고통스러워 했으나 의사는 아랑곳없이 투약을 계속했다. 두 번째 주치의였던 군의관 아치볼드 아노트설사약을 더 많이 쓰는 것이 황제에게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당시의 의사들은 죽어 가는 허약한 환자들에게 대량으로 설사 출혈을 유도하는 발포관장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현재의 의학자들은 나폴레옹에 대한 이런 치료가 고의적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증상을 보았을 때 설사약을 투여하여 위를 비우도록 시도하는 것은 의도적인 살인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나폴레옹의 고통이 심화되자 아노트는 설사약으로 사용하는 유독성 염화 제1수은 10개를 투약했는데 이는 최대 허용치를 3배나 넘게 초과하는 분량이었다. 나폴레옹은 몇 시간 내에 의식을 잃고 182155일 오후 549분에 사망했다.

나폴레옹을 검시한 의사들의 공식적인 사망 요인악성위궤양간으로 침투한 것이다. 사실 나폴레옹위궤양으로 사망했다는 것은 하등에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나폴레옹의 집안은 유달리 위궤양환자가 많았으며 그의 아버지도 위궤양으로 38세에 세상을 떠났다. 사실 당시의 의학적인 소견으로는 위궤양으로 병명이 적혀있지만 현대 의학적으로 볼 때 말기 위암과 간암으로 추정하는데 이 병은 현대 과학으로도 거의 고치지 못하는 병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자신의 죽음이 정상적이 아니며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적었다.

 

나는 내 명을 다 살지 못하고 죽으며, 영국의 소수 권력 집단과 그들이 고용한 암살자들의 손에 의해 살해된다.”

 

이 당시의 상황을 보다 상세하게 살펴보자. 나폴레옹이 사망한 다음날, 롱우드 하우스에서 여섯 명의 영국인 군의관나폴레옹의 시의(侍醫)였던 안톤 마르키의 손에 이뤄졌다. 2시간이 지나 검시(檢屍)를 마친 일곱 명의 의사들은 서로 다른 의견을 보였다.

위에서 십이지장 사이에 궤양이 있다는 것은 모두 인정했지만, 안톤 마르키암성 궤양으로 보았고, 영국인 군의관들은 암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악성 종양으로 판단했다. 두 명의 의사는 나폴레옹의 간장이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데 비해 상당히 늘어나 있는 것에 관심을 보였다. 결국 일곱 명의 의사들은 나폴레옹위암이나 유문(幽門 : 위의 아래 쪽 끝의 십이지장에 연결되는 부분)으로 죽었다고 기록했다.

나폴레옹은 영국의 감금자들에 의해 서서히 독살되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의 유언은 머리를 면도로 밀어낸 뒤 몸은 화장시키고 머리카락친구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이다. 또한 화장한 재는 자신이 사랑하던 프랑스 사람들 곁 세느 강변에서 뿌려 주기를 바랬다.

 

엥발리드의 나폴레옹 관

그러나 그의 재를 세느 강변에다 뿌려달라는 유언의 일부는 지켜지지 않았다.

1840루이 필립 통치 시대에 나폴레옹의 재를 프랑스로 옮겨 세느 강변에 뿌리기보다는 엥발리드의 돔 안에 안치했기 때문이다. 현재도 그의 재는 엥발리드의 박물관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