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속인 거짓말/나폴레옹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패배의 진상(2)

Que sais 2020. 11. 26.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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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 조작에 천재성을 보인 나폴레옹

나폴레옹은 생애 동안에 수많은 거짓말을 했는데 그 중에서도 그가 가장 신경을 쓴 것은 자신이 벌린 전투에 대한 전황 보고였다.

그가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포병장교로 임관하였을 당시 프랑스사면초가 상태였다.

프랑스에서 유혈 혁명이 일어나자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혁명의 불꽃이 자기 나라로 튈까 걱정하여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쓰러트리려 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철저하게 이용한 사람이 바로 나폴레옹이다. 그는 자신이 참가한 전투마다 승리를 거두어 프랑스 국민들을 열광시켰다. 외적의 침입에 의해 국토가 유린당하는 상태에서 나폴레옹의 승전 소식은 그야말로 프랑스 국민들이 바라던 바였다.

그러나 그가 승리한 전투는 많은 부분에서 과장되었고 심지어는 고의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조작하기까지 했다. 나폴레옹은 처음부터 언론을 이용하는데 천재적인 머리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18009월 지중해의 작은 섬 몰타를 지키고 있던 프랑스 수비대영국군의 포위로 궁지에 몰렸다. 식량이 부족해지자 프랑스 병참장교 두블레나폴레옹에게 지원병과 식량을 요청하면서 몰타를 구해달라고 급히 전갈을 보냈다. 그러나 그가 보낸 편지는 프랑스 정부가 발행하는 신문 <모니퇴르>정 반대의 내용으로 게재됐다.

 

각하의 존함은 몰타의 용맹스러운 수비대에게 새로운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수비대에는 현재 충분한 병사와 식량이 있습니다.”

 

결국 지원병과 식량은 몰타로 가지 않았고 몰타 수비대는 영국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이것은 나폴레옹공문서 특히 각종 전황보고서를 수없이 변조한 사례 중에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나폴레옹의 비서인 동시에 전기 작가이기도 한 부리엔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폴레옹은 전황 보고서를 대단히 중시하여 그것들을 손수 작성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이 작성하는 경우 그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직접 수정하곤 했다‧‧‧. 전황 보고서는 언제나 나폴레옹이 국민들로부터 믿어지기를 바랐던 내용대로 발표되었다‧‧‧. 승리에 대한 것은 부풀려진 반면에 패배나 사상자 수에 관한 것은 발표되지 않거나 혹은 줄여서 발표되었다.”

 

영국의 역사가 토머스 칼라일은 나폴레옹의 허위 전황보고는 거의 상습적이었다고 비평했지만 나폴레옹은 이러한 변조행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항상 적절한 변명을 준비해두었다.

나폴레옹은 보고서를 허위 작성하면서 그때마다 아군의 사기진작을 위해서라든가 적군을 유인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붙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 자신의 입지를 유리하게 만들려는 야심 때문이라는 것을 당시에 알아차린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폴레옹의 대관식

나폴레옹이 만든 허위 전황 보고를 그대로 믿고 그를 영웅시한 프랑스 국민들에 의해 그는 마침내 황제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전황을 임의로 조작한 나폴레옹은 자신의 패배에 대해서도 거짓말을 감추지 않았다.

나폴레옹의 가장 큰 실수 중에 하나인 러시아의 침공에 따른 패배는 예상하지 못한 기후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한결 같은 주장이었다. 그는 러시아의 침공으로 프랑스인 25만 명을 포함하여 총 35만 명이나 되는 많은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는데 그는 이 참패의 책임을 간단하게 천재지변으로 돌렸다.

 

나와 나의 용감한 군대가 러시아에서 패배한 것은 1812년부터 3년 동안이나 계속된 혹독한 겨울 때문이다. 게다가 그 해 겨울은 이상하게도 일찍 찾아왔다.”

 

나폴레옹123일의 보고서에서도 그는 겨울 때문에 프랑스군이 파멸했다고 적었으며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유배되어 있을 동안에도 나폴레옹은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일반적으로 그 당시의 상황을 묘사할 때 도로와 하천이 꽁꽁 얼어붙고 휘몰아치는 눈 속에서 사람과 말이 속수무책으로 얼어죽었다는 지독한 추위라는데 이의를 달지 않는다. 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에서도 나폴레옹의 주장대로 혹독한 추위였다고 적혀 있고 대부분의 역사책에도 그렇게 기술되어 있다. 물론 1812년부터 3년 간에 걸친 겨울은 19세기를 통틀어 가장 추운 겨울이었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면밀히 분석해 보면 혹독한 추위는 나폴레옹자신의 실패50만 명의 장병이 희생된 책임을 피하기 위한 속셈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1812은 나폴레옹이 설명한 것과는 달리 겨울이 예상보다도 늦게 찾아 왔기 때문이다.

1812624나폴레옹은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했다.

그 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고 건조했다. 이에 병사들은 신속하게 행군했고 병사들의 사기도 좋았다. 그런데 폴란드부터 말썽이었다. 병사가 너무 많아 비위생적인 환경이 되자 군대 안에서 이질과 장티푸스는 물론 치명적인 발진티푸스가 창궐하기 시작했다.

7월 셋째 주의 오스트로비나 전투에서 이미 8만 명 이상이 발진티푸스 때문에 죽거나 전투 불능에 빠졌다. 프랑스를 출발한 지 한 달 만에 전염병으로 전투력의 5분의 1이 사망하거나 부상으로 줄어든 것이다. 부하 장군이 이런 참혹한 사태에 직면하자 병사들에게 줄 식량조차 부족하다며 행군을 멈출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러시아 국경으로부터 겨우 200킬로미터밖에 남지 않은 상태에다 승리를 목전에 두었다고 생각한 나폴레옹진격을 명령했다.

나폴레옹의 진군 명령에 의한 피해는 더욱 커져 갔다. 8월말에 이미 30만 명의 공격 부대 중에서 14만 명이 사망했고 9월초에는 또 다시 발진티푸스3만 명이 사망했다. 그 동안 러시아시종 일관 후퇴를 하면서 나폴레옹을 러시아 깊숙이 유인했고 나폴레옹은 전투다운 전투도 별로 하지 않고 9월 중순에 모스크바입성했다. 이 당시 모스크바에 도착한 프랑스군은 고작 9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나폴레옹은 자신이 러시아의 수도인 모스크바를 점령했으므로 자신이 승리했고 러시아에서 곧 항복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페테스부르크에 버티고 있던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는 시종 일관 평화 교섭을 벌이는 척하면서 시간을 질질 끌었다. 나폴레옹의 참모는 추위가 닥치면 모스크바에서 오도가도 못한다고 경고하였지만 나폴레옹은 건의를 묵살했다.

나폴레옹도 바보는 아니다.

결국 그는 러시아의 알렉산드르가 평화 협상 시간을 끌면서 전력을 재정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자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다. 모스크바에 진주하고 있는 동안 15,000명의 증원군이 도착했지만 그 동안 1만 명이 질병과 부상으로 사망했으므로 전력에 도움이 된 것은 아니었다. 결국 러시아의 회답을 기다리고 있던 나폴레옹은 마침내 철군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당시의 프랑스군은 고작 95천 명이었다.

나폴레옹철군을 시작한 날은 1019일이었다. 나폴레옹은 다음과 같이 그 당시의 상황을 적었다.

 

“116일까지는 날씨가 더 없이 좋아서 군의 이동이 순조로웠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무서운 추위가 닥쳤고 14일부터는 온도계가 영하 16, 18도를 가리켰다. 겨우 며칠 사이에 3만 마리 이상의 말이 쓰러져 버렸다. 6일까지만 해도 화려하던 우리 군대는 14일에는 그림자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베레지나 강의 도강

나폴레옹군1125일부터 27일 사이에 베레지나 강을 건넜다. 이 때의 상황을 묘사한 많은 전쟁화에서는 엄청난 눈과 한파에 시달리는 병사들이 강을 건너고 있다. 한 전기 작가는 한술 더 떠서 베레시나 강을 건널 때의 온도가 영하 35도였으며 러시아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고 적었다.

그런데 이 즈음 다소 예외적으로 기온이 올라드네프르 강, 베레지나 강도 얼어붙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실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서 퇴각을 시작한 10월 중순부터 추위가 닥쳐와 양측에 상당한 손실을 입힌 것은 사실이지만 러시아군의 오판으로 나폴레옹은 방해를 받지 않고 도강에 필요한 부교를 건설하여 근위대를 포함한 나폴레옹군은 하루 동안 거의 방해받지 않고 강 너머로 건너갈 수 있었다.

그러나 곧바로 러시아군이 추격하여 결국 부교를 폭파했다.

나폴레옹의 정규군 상당수가 부교를 건넜지만 부상자와 환자, 낙오병들과 비전투원들 대부분은 강을 건너지 못했다. 이는 이 시기에 베레지나 강은 전혀 얼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지만 철수하지 못한 프랑스군이 후에 닥친 한파에 큰 피해를 본 것은 사실이다.

여하튼 나폴레옹은 가장 추운 겨울이 닥쳤으므로 후퇴를 단행했다고 선전했는데 추위가 닥친 것은 사실이지만 추위는 훨씬 나중에야 닥쳤다는 설명이다. 핀란드 헬싱키의 중앙기상연구소가 보유하고 있는 기상자료에 의해서도 그의 거짓말은 증명된다. 기록을 보면 181210은 평년보다 따뜻하여 키예프는 영상 10.6, 바르샤바는 10.2, 레바르는 6.6였다. 중요한 것은 11월도 평년보다 훨씬 따뜻하여 나폴레옹이 혹독한 추위를 겪었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키예프에서 11월 한 달의 낮 평균 기온은 영상 1.8였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나폴레옹이 보고한 영하 16도나 영하 18는 전혀 근거가 없는 일이다.

학자들은 그가 단 12주일만 먼저 철수했더라도 몇 만 명이 얼어 죽는 그러한 사태는 초래하지 않았을 것이고 유럽의 역사는 바뀌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결국 러시아에서의 재앙은 겨울이 너무 빨리 닥쳤기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나폴레옹이 모스크바 철군을 너무 늦게 결정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제안한 화평 제의를 러시아가 결국 받아들일 것으로 믿었으나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너무 시기가 늦었다는 뜻이다.

 

나폴레옹의 러시아참패(그로 그림)

더욱 프랑스군의 피해가 컸던 것은 나폴레옹모스크바의 퇴각에 대해 전혀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사에 의하면 그의 퇴각에 즈음하여 준비한 식량은 고작 20일분이었고 말먹이는 1주일 분도 안 되었다. 이것은 러시아군의 작전에도 기인한다. 나폴레옹군이 러시아를 침공하자 퇴각하는 러시아군은 전쟁에 유용할 물건들은 모두 태워버렸다. 러시아군이 가장 잘 애용한 청야작전초토화 퇴각 전법은 공격군으로서는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대부분의 전쟁은 승리자가 패배자의 물자들을 획득함으로써 본국으로부터의 보급품을 최대한으로 줄일 수 있었지만 러시아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프랑스군이 러시아 영토로 들어올수록 전선이 길어졌지만 프랑스군은 현지에서 어떤 물품도 조달받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결국 나폴레옹러시아의 작전에 말려들어 패배를 자초한 것이다.

프랑스군은 참전한 병사 중에서 겨우 40,000명만 살아서 귀환했고 그 가운데 다시 전투에 나설 수 있을 만큼 온전한 병사는 고작 1,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와의 전황조차 직접 챙기면서 전투 내역을 수시로 바꾸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의 말대로만 진행되지 않았다. 전쟁의 패배에 따른 책임이 결국 그의 거짓말과 판단 착오였음이 알려졌고 그 결과 황제에서 퇴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고문헌 :

Les mensonges de Bonaparte et de Napoleon, Philippe Valode, Actualite de Histoire, No 86, Juillet 2006

러시아 원정, 위키백과

세계를 속인 거짓말, 이종호, 뜨인돌, 2002

엽기세계사, 이성주, 추수밭,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