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속인 거짓말/에이브러햄 링컨

노예제 찬성자가 아닌 노예해방자 링컨(7)

Que sais 2020. 12. 3.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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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할렉(Henry Halleck) 장군도 초창기 북군을 혼란스럽게 만든 장본인이다.

그는 노예들이 드나들며 적에게 군사정보를 보내고 있다고 믿으며 186111월 전선에서 모든 탈주 노예(contraband)부대 입대를 금지시키고 추방했다. 그의 조처에도 불구하고 링컨은 어떤 조처도 내리지 않았으므로 북부군붙잡힌 노예들이나 연방세력으로 돌아선 탈주 노예들이 자유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수용소에 갇혀 많은 숫자가 죽었다.

그런데 18625, 데이비드 헌터 장군조지아, 플로리다 및 사우스캐롤라이나모든 노예자유라고 선언하는 명령을 발했을 때 링컨은 즉각 무효화시켰다. 링컨은 이에 대해 노예해방에 대한 성급한 시도경계주의 상실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데이비드 헌터는 군사적 능력을 포함한 여러 방면에서 프레먼트보다 유능했고, 경험도 많았다. 헌터 장군이 의도한 것은 흑인 병사들의 자유 참전이었다. 그러나 헌터의 의도와는 달리 탈주 노예들 중 자신의 자유의지로 참전하는 용병들은 극소수였으므로 그의 부하들이 아무 설명도 없이 일하고 있는 노예들을 납치하여 입대시키기 일수였다.

그러므로 링컨헌터 장군의 조처취소시켰는데 1주일 뒤 흑인 병사들을 모집하는 것 자체는 당연히 찬성한다고 말했다. 단지 강압적으로 참전을 강요하거나, 전쟁에 적합하지 않은 흑인들까지 강제 동원시키는 것을 반대한다고 말했지만 흑인에 대한 처우가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링컨두 장군의 명령취소한 것은 노예해방보다 더욱 급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전쟁에서 승리해야한다는 것인데 초창기 북군의 전황이 좋지 않았다. 한마디로 전투에 영향을 주는 빌미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북군의 상황은 계속 나빴다. 18611021일 버지니아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18624월 테네시 주의 실로(Shiloh)에서 2일 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에서도 북부군은 13,000, 남부군은 11,000명의 인명손실을 보아 북부군에 더 큰 타격을 주었다. 이후 6월에는 로버트 리 장군리치먼드함락시켰다.

 

노예 해방령 초안 발표하는 링컨

결국 전투에서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자 링컨18627 비로소 노예 해방령선포한다. 그 내용은 186311을 기해서 반란군 지역에 있는 모든 노예는 영원히 자유의 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뉴올리언즈와 같이 북군미리 점령하고 있던 지역노예남북 경계주의 노예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또 반란을 일으킨 주라도 90일 안에 다시 연방으로 돌아오면 노예제의 존속은 그대로 인정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것은 재무장관 새먼 P. 체이스(Salmon P. Chase)에 보낸 서한으로도 알 수 있다.

 

원래의 선언은 (중략) 군사적 수단이 아니라면 법적인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소.’

 

당시 링컨과 함께 미합중국의 한 축이라고 볼 수 있는 국무장관 윌리엄 시워드(William Seward)노예해방령의 진정한 목적을 보다 명료하게 말했다.

 

링컨의 노예해방령

 

우리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는 노예들은 해방하고 우리가 해방할 수 있는 노예들을 묶어둠으로써 우리가 노예제에 공감한다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 선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논평이 나올 정도였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이 원칙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합중국에 충성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이 원칙으로 되었다.’

 

이 당시 링컨의 입장은 자기에게 부여된 전쟁권한으로는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의 영토 안에 있는 노예들만을 해방시키고, 나머지는 국회 또는 각 주 당국이 보편적 노예해방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링컨의 보수적인 태도에 대해 의회의 공화당 급진파흑인들이 불만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하튼 전쟁기간 동안 노예해방령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자유의 몸이 된 노예20만 명이 채 못 되었지만 해방령이 준 여파는 매우 컸다. 노예해방은 링컨 정부가 연방의 회복 외에도 자유를 명분으로 내세운 대의가 국내외적으로 인정받아 영국과 유럽 대륙의 자유주의 언론으로부터 확고한 지지를 얻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프랑스와 영국이 줄타기 외교를 끝내고 마침내 남부연합불승인한다고 결론내었기 때문이다. 남부연합을 두 국가가 승인한다면 영국과 프랑스로는 상당한 모순점을 안게 된다. 그들은 이미 노예제를 폐지했으므로 남부연합에 대한 지지 자체가 노예제를 인정하는 결과가 되는데 이런 모순점링컨이 해결해 준 것이다.

 

<흑인부대>

여하튼 남북전쟁공식적으로 발발하자 북부와 남부는 모두 동원체제로 전환되어 소득세를 부과하고 강제 징집을 실시했다. 북부에서는 1863년에 국가 징집법을 공표했으나 징집 거부 사태가 속출했다. 당시 법이 다소 해괴하기 때문이다.

그 법에 의하면 본인 대신 군에 갈 사람을 고용하거나 300달러국가에 헌납하면 징집을 면제해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은 모두 군에 가지 않고 힘없는 사람들만 전쟁에 끌려가는 셈이 되자 7월에 뉴욕에서 징집거부 폭동이 일어나 4일간 100명 이상이 사망했다. 결국 연방군이 동원되어 진압했는데 이 폭동으로 유탄맞은 사람은 흑인들이었다. 그건 사람들이 전쟁의 원인흑인이라면서 엉뚱하게 그들에게 보복했기 때문이다.

남부 역시 1862년에 징집법을 통과시켜 18세부터 35세까지의 모든 백인 남성에게 3년간의 의무복무를 부과했다. 그러나 남부도 북부와 마찬가지로 대신 군에 갈 사람을 구하거나 대규모 노예를 소유한 농장의 경우 노예 20명당 1명의 백인에게 군 복무를 면제해주었다. 이 역시 가난한 백인들만 군대에 가는 셈이므로 징집 기피자들이 속출했다.

결국 남부와 북부 모두에게 남북전쟁기득권 세력의 이해를 위해 하층계급의 희생을 강요하는 모양이 되었다.

여기에서 궁극적으로 전쟁을 발발시킨 링컨의 처신도 다소 모호했다.

전쟁 자체노예제도의 폐지큰 명분을 걸었으므로 전쟁이 나자 흑인들은 링컨이 곧바로 노예해방 선언을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노예해방을 위해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미합중국의 기본 원리인 연방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노예해방 선언미루었다. 당시 반란주들 즉 북부로 보아 남부연맹 주들이 연방으로 복귀할 명분을 박탈하면 결국 미합중국이 분리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전쟁 초기에 남부 흑인들은 주인 편을 들어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186311을 기해 노예해방 선언을 했다. 그런데 그 선언의 내용이 수상쩍다. 선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현재 미국에 대하여 반란상태에 있는 주 또는 주의 일부의 노예들은 186311일 이후부터 영원히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육해군 당국을 포함하여 미국의 행정부는 그들의 자유를 인정하고 지켜줄 것이며, 그들이 진정한 자유를 얻고자 노력하는 데 어떠한 제약도 가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 정확하게 해석한다면 이 선언의 효력반란상태에 있는 주남부연합 주에만 적용된다. 노예소유 주이면서 합중국에 가담하고 있는 주들은 노예제도를 폐지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남부연맹에 가담한 주들은 연방에서 독립한 독립체제이므로 링컨의 선언이 적용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노예제도 폐지 선언으로 실제 해방된 노예단 한 명도 없다는 점이다.

다만 이 선언으로 그동안 망설이거나 남부에 협력했던 많은 흑인들이 북부로 탈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탈출한 노예들이 30만 명 가까이 되었는데 이는 당시 미국 전체에 있던 흑인 400만 명 정도의 거의 8%나 되는 인원이다.

흑인들 모두 탈출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탈출은 남부에 치명상을 주었다. 남부는 원래 농업 위주이므로 많은 농부들이 필요한데 그들의 탈출로 인해 남부의 농업은 거의 마비되었고 결국 전쟁수행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그때 도망친 노예들은 북부의 공장에서 일하거나 북부군에 가담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는데 전쟁이 끝날 무렵에 약 18만 명의 흑인북군에 입대하고 있었다고 알려진다.

 

흑인부대(영광의깃발 한 장면)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상당수 흑인들은 참전하는 것을 원했다. 전쟁에 기여함으로써 노예제도 폐지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전후 흑인의 지위를 향상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링컨흑인들의 참전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남북전쟁노예해방전쟁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합중국의 탄생부터 이어진 전통이다.

흑인들은 독립전쟁에서 영국군과 식민지군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독립한 이후 미국흑인들의 군 입대를 막았다. 군에는 오로지 백인 남자들만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 이유를 벤자민 콸스미국흑인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흑인 군인에 대한 반대는 그들이 전투원으로서 자질이 부족하고, 그들을 무장시키는 것은 백인군인이 업무수행에 충분히 용감하지 않았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들의 수중에 총을 주는 것노예반란을 야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있었다.’

 

즉 당시 미국을 탄생시킨 사람들은 똘똘 뭉친 백인들로 흑인에게 군복무를 허용하면 미국 생활에서 흑인의 지위에 변화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인종적인 편견으로 인해 흑인들은 초기에 전쟁에서 배제되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