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황이 전황인 만큼 1862년에 마침내 흑인 징병이 허용되었으며 흑인들로만 구성된 매사추세츠 54보병연대가 결성되었다. 열렬한 노예폐지론자로 25세인 로버트 굴드 쇼(Robert Gould Shaw)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그의 지휘 아래 600여 명의 병사들은 1863년 7월에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와그너 요새 탈환 작전에서 투입되었다. 열렬한 노예폐지론자인 로버트 굴드 쇼(매튜 브로데릭)는 남북전쟁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고 돌아온다
이 전투로 쇼 대령을 비롯한 많은 병사들이 전사했는데 비록 그들이 요새를 탈환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불굴의 용기를 보여줌으로써 흑인 부대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깨는데 크게 기여했다. 흑인들은 참전이 허용된 이후 수많은 전투 임무를 수행했으며 37,000여 명이 전사했다.
1989년에 에드워드 즈윅 감독에 의해 출시된 「영광의 깃발 Glory」은 바로 쇼 대령이 지휘한 흑인병사 위주의 와그너 요새 전투를 그렸다. 이 영화는 매사추세츠 54보병연대의 창설 배경과 오합지졸의 흑인들이 군인으로서 변해 가는 과정 및 전쟁에 헌신하려는 그들의 용기, 쇼 대령이 애송이 군인에서 용감한 지휘관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묘사한다.
쇼는 당시 대위 계급이었는데 54연대 연대장으로 임명되면서 대위에서 일약 대령으로 진급한다. 그는 흑인 부대에 대해 처음에는 회의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었지만 시간이 가면서 그들이 처한 열악한 상황을 이해하고 그들의 용기와 열정을 다독거려가면서 마침내 혼연일체의 부대를 만든다.
흑인 군인들은 흑인으로서 지닌 사회적 멸시와 편견, 또한 자신들의 내부에 도사린 열등감과 싸워야 한다. 상부에서 그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흑인들이 전투병으로 적과 용감하게 싸우는 것이 아니라 백인 군인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이다.
영화도 처음 흑인 병사들에게 큰 임무를 주지않았다. 상부의 지휘관들 자체가 흑인들의 참전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군인으로서의 그들의 능력을 믿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쇼는 흑인 부대에 대한 상부의 이런 편견과 무시와 조롱 그리고 흑인들의 냉소와 불만에 대항해 싸운다.
마침내 와그너 요새 전투에서 그 부대는 쇼의 지휘 아래 모든 부대의 선두에 서서 적진을 향해 용감하게 돌진하며 600여 명의 부대원 중 256명을 잃어 연대 전체 약 40% 쯤이었었고 상당수가 부상을 입거나 실종된다.
이 영화의 주제는 독립전쟁의 회오리를 잘 보여준다.
독립전쟁의 기본이 흑인노예제의 폐지이므로 엄밀하게 말하여 흑인이 주 대상인데도 불구하고 그동안의 독립전쟁사에서 막상 흑인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바로 그 점을 흑인 병사의 이야기로 흑인들의 자유를 향한 갈망과 인간다운 삶에 대한 소망을 보여준다는 평이다. 그런 열망이 그들로 하여금 죽음도 기꺼이 받아들이게 한다는 메시지도 전해준다.
「영광의 깃발」는 반전영화가 아닌 영화에서 흑인의 인권 문제를 다룬 영화라는 점에서 상당히 실화에 근거해서 제작했다. 그러나 영화의 속성상 실제와 다른 점이 많이 가미되었음은 물론이다.
우선 여기에 동원된 흑인 병사들 대부분이 남부의 탈출 노예임을 암시하지만 실제로는 북부 출신의 자유 신분 흑인이 대다수였다는 점이다. 또한 영화에서는 54연대가 유일한 흑인 연대로 나오지만 실상은 55연대도 함께 구성되었다.
영화에서 모건 프리먼이 연기한 흑인 상사는 윌리엄 카니 상사를 기초한 인물이다. 실제로 국기를 든 일병이 쓰러졌을 때는 프리먼이 연기한 윌리엄 H. 카니가 국기를 들고 앞으로 돌격했다. 그리고 적의 영역에서 버티고 있다가 54연대가 퇴각할 때 네 군데에 총상을 입었지만 살아남았다. 카니는 미국 의회 명예 표창(Medal of Hornor)을 받은 첫 흑인이 됐다.
쇼 대령은 그 당시 결혼한 지 몇 주도 되지 않았을 때이며 그가 전사 장면에서 보여준 말도 사실이다. 그가 죽기 전에 남긴 마지막 말은 영화 대사 그대로 "54연대. 앞으로(Forward Fifty-Fourth)"였다.
남북전쟁의 전쟁 대응 방법도 남과 북이 달랐다.
남부는 전쟁초반부터 자신의 땅을 지키고 북부가 남부의 전략 요충지들을 점령하는 것을 막는데 주력한 반면에 북부의 목표는 남부를 점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북부는 해상을 봉쇄해, 유럽에서 무기를 들여오는 것을 막으며, 미시시피 강의 지배권을 장악해, 남부 물자 이동을 막고, 테네시 주로 진격해 내부분열을 일으키려고 했다. 또한 남부에서 초토화 작전을 벌여 남부의 모든 생산 기반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남부에게 가능한 한 참혹하고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하려고 했다.
한마디로 남부 연합군의 진영에서 전쟁물자와 철도를 빼앗고 마을과 농장을 불태워 남부인들에게 공포심을 조장하고 전의를 상실하게 했다. 특히 북부군의 셔먼 장군은 병사들이 남부를 약탈하도록 격려해서 남부인들의 증오심을 불러 일으켰다.
<게티스버그 전투 개요>
북부의 차원 다른 전쟁 수행에도 불구하고 전황은 북부군에게 매우 불리했는데 1863년 7월 1일에 벌어진 게티스버그(Gettysburg) 전투에서 북군이 승리한 이후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게티스버그 전투는 북군 9만 명, 남부군 8만 명이 싸워 북군이 2만 명, 남군이 2만 3천명의 사상자를 낸 대규모 전투였다. 이 전투를 계기로 후일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그랜트 장군은 군사 요충지인 미시시피 강의 중요 항구인 빅스버그를 점령한다. 결국 1865년 4월 남부 연합의 수도인 리치먼드가 함락됨으로서 치열한 남북전쟁은 끝났다.
게티스버그 전투는 1863년 7월 1일부터 1863년 7월 3일까지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 인근에서 게티즈버그 전역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전투이자 남북 전쟁에서 가장 참혹한 전투로 흔히 남북 전쟁에서 전환점으로 평가되는데다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과 연계되므로 보다 설명한다.
이 전투에서 북부의 조지 미드 장군이 이끄는 포토맥군은 남부의 로버트 리 장군이 이끄는 북버지니아군의 공격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렸다. 이로써 리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북부 침입은 실패로 끝났고, 워싱턴을 공격하여 남부 독립을 승인받고 전쟁을 끝내고자 했던 남부 전략도 실패로 끝났다.
이 전투의 배경은 남부의 리 장군은 1863년 5월 벌어진 챈슬러즈빌 전투에서 승리한 후 북부로 진격을 계획했다. 이 진격은 북군의 여름철 전쟁 계획을 견제하면서 빅스버그에서 포위된 남군 수비대를 구원하는데 있었다.
특히 당초에 롱스트리트의 2개 사단만 빅스버그로 보내 빅스버그를 구원하는 안이 검토되었으나 리 장군은 롱트리트의 병력을 포함하여 동원할 수 있는 가용 병력 모두 동원하여 필라델피아나 워싱턴 D.C.를 점령하자는 계획으로 바꾸었다.
리 장군은 이 작전으로 북군에 치명타를 가해 링컨이 남부의 독립을 인정하는 평화조약을 체결하게 하고자 했다. 남부의 전쟁 자원이 가진 한계 때문에 계속 전쟁을 끌면 남부에 유리할 것이 없다는 점을 리 장군도 알고 있었다.
한편 조지프 후커(Joseph Hooker) 소장이 지휘하는 북군의 포토맥군은 약 9만 명 이상의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링컨 대통령은 후커를 곧 조지 미드 장군과 교체하였다. 후커가 전투에서 자신감을 상실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인데 사실 사령관으로 임명된 미드 장군조차 자신이 사령관이 될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게티즈버그 전역의 첫 번째 대규모 교전은 6월 9일 버지니아의 쿨피퍼에서 가까운 브랜디 기차역에서 기병대 간에 벌어진 전투였다. 젭 스튜어트 휘하의 남군 기병대가 북군 기병대에게 기습당했으나 최종적으로 남군이 승리하였다. 그렇지만 남북 전쟁 중 최대 규모의 기병전이었던 이 전투에서 북군 기병대의 실력이 남군 기병대와 대등해졌다는 것이 입증되었다는 점이다. 그 이전에만 해도 북군 기병대는 남군 기병대에 일방적으로 밀리기 일쑤였는데 이 전투로 자신감을 얻은 것이다.
6월 중순부터 리의 북버지니아군은 포토맥 강을 건너 메릴랜드로 진격할 채비를 갖췄다. 반면에 북군은 남군보다 다소 늦은 6월 25일부터 6월 27일 사이에 포토맥 강을 건넜다.
6월 29일, 남군은 챔버스버그로부터 반원형으로 서스퀘하나 강과 해리스버그와 라이츠빌에 가까운 게티즈버그의 북서쪽 45킬로미터, 게티즈버그의 북쪽으로 48km 지점에 길게 뻗어 산개되어 있었다.
한편 리 장군은 6월 29일 새로 북군 사령관이 된 조지 고든 미드(George Gordon Meade) 장군의 포토맥군이 포토맥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알고 예하 전 부대에 캐시타운으로 집결하라고 명령했다. 캐쉬타운은 게티즈버그의 서쪽 13킬로미터 지점에 있었다. 이 명령에는 적과 접전은 피하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리 장군은 물론 미드 장군도 게티즈버그에서 전투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게티즈버그에서 양군이 격돌하게 된 것은 순전히 북군 기병사단장 존 뷰퍼드 때문이었다.
양군을 통틀어 제일 먼저 게티즈버그에 도착한 뷰퍼드는 곧바로 게티즈버그와 주변 지형을 감안하면 고지를 먼저 장악한 쪽에 유리하다는 것을 간파했다. 뷰퍼드는 즉각 전투 준비에 돌입했고 후원군의 충원을 요청했다. 이 역시 6월 29일의 일인데 이때 남군은 북군의 이러한 사정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남군은 북군의 기병대가 마을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들은 북군 정규군이 아니라 펜실베이니아 민병대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7월 1일 오전 5시경 북군의 규모와 전력을 파악한다는 이유로 상당한 규모의 정찰 병력이 게티즈버그로 진격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들 남북 정규군이 조우하고 전투에 들어갔다. 바로 게티스버그 전투가 발발한 것으로 7월 1일 전투에 북군 18,000명에 대해 남군은 25,000명의 병력을 투입했고, 이는 전쟁 기간 중 23번째로 큰 전투였다. 이후 7월 3일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결국 전세는 북군에 유리하게 돌아갔고 양측 군대가 피에 젖은 들판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던 7월 4일, 남군의 빅스버그가 북군의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하였다.
그러나 게티스버그 전투 자체로만 보면 남군의 리 장군이 완패한 것이 아니므로 리 장군은 미드 장군의 추격에 대비하여 방어 태세로 부대를 재배치하였다. 반면에 기선을 잡았다고 생각한 미드 장군은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리 장군의 잔존 부대를 추격하지 않았다. 훗날 이 결정 때문에 미드는 많은 비판을 받게 된다.
여하튼 7월 5일 게티즈버그 전투는 끝났고, 남부동맹은 버지니아로 후퇴했다. 더불어 당시에 내린 비로 인해 포토맥 강은 범람하여 북버지니아군은 더 이상 추격할 수도 없었다.
게티스버그 전투는 북군 9만 명, 남부군 8만 명이 싸워 북군이 20,000명, 남군이 23,000명의 사상자를 낸 대규모 전투였다. 이 점만 보면 남북의 승자가 누구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실제로 게티즈버그 전투 후 리 장군은 그의 부하들이 무적이라는 믿음을 계속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전세는 남군에게 불리해지며 후일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그랜트 장군은 군사 요충지인 미시시피 강의 중요 항구인 빅스버그를 점령한다. 결국 1865년 4월 남부 연합의 수도인 리치먼드가 함락됨으로서 치열한 남북전쟁은 끝났고 리 장군이 그랜트 장군 앞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한다.
남북전쟁이 종료된 후 게티스버그 전투 현장은 11월 19일 국립 군인묘지로 헌정되고 링컨이 단 3분간에 걸친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을 한다.
오늘날, 게티즈버그 국립 묘지와 게티즈버그 전장은 미국 국립공원 중 하나로 지정되어 유지되고 있다. 게티즈버그 군사공원이 그것으로, 북군과 남군의 가장 경외 받는 역사 유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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