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속인 거짓말/에이브러햄 링컨

노예제 찬성자가 아닌 노예해방자 링컨(9)

Que sais 2020. 12. 3. 15:30

 

youtu.be/TXXOVxe8BXo

<게티스버그 연설>

게티스버그 연설중인 링컨의 유일한 사진(중앙 상부 수염과 모자쓴사람)

18631119, 게티즈버그 전투의 격전지였던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에서 열린 국립묘지 봉헌식에서 링컨272 단어3분여의 짧은 연설을 했다. 워낙 짧은 연설이라 사진사들이 사진을 찍을 순간도 없어 단 한 장의 사진이 남아있을 정도인데 링컨의 연설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설이자 가장 많이 인용된 연설문이 되었다.

 

87년 전 우리의 선조들은 이 대륙에 자유의 정신으로 잉태되고 만인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신념이 바쳐진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지금 우리는 바로 그 나라가, 아니 이러한 정신과 신념으로 잉태되고 헌신하는 어느 나라이든지, 과연 오래도록 굳건할 수 있는가 하는 시험대인 거대한 내전에 휩싸여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전쟁의 거대한 싸움터인 이 곳에 모여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바로 그 싸움터의 일부를, 이 곳에서 자신의 삶을 바쳐 바로 그 나라를 살리고자 한 영령들의 마지막 안식처로 봉헌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이 헌정은 지극히 마땅하고 옳습니다.

그러나 더 큰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는 이 땅을 헌정할 수도, 축성할 수도, 신성화 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싸웠던 용맹한 전사자와 생존 용사들이 이미 이 곳을 신성한 땅으로 축성하였기에, 보잘 것 없는 우리의 힘으로 더 보태고 뺄 것 따위는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은 오늘 우리가 여기 모여 하는 말들을 별로 주목하지도 오래 기억하지도 않을 것이나, 그 분들이 이 곳에서 이루어낸 것은 결단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 자리에서 우리 살아있는 자들이, 여기서 싸웠던 그 분들이 그토록 고결하게 전진시킨 미완의 과업을 수행하는 데 우리 스스로를 봉헌하여야 합니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있는 그 위대한 사명, 고귀한 순국선열들이 마지막 신명을 다 바쳐 헌신했던 그 대의를 위하여 더욱 크게 헌신하여야 하고, 이 분들의 죽음을 무위로 돌리지 않으리라 이 자리에서 굳게 결단하여야 하며, 이 나라가 하나님 아래에서 자유의 새로운 탄생을 누려야 할 뿐 아니라,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가 지상에서 소멸하지 않아야 한다는 그 위대한 사명에 우리 스스로를 바쳐야 합니다.‘

 

연설이 나오게 된 배경은 남북전쟁을 북부에서도 모두 찬성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전쟁이 벌어지자 북부에선 '대체 왜 우리가 흑인 때문에 싸워야 하나'라고 반발하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게티즈버그 전투 전까지 북부의 전황은 고전 일색이었으므로 북부인들은 승리할 기미도 없는 전쟁이라 더더욱 불만이 많았다. 이런 상태에서 링컨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북부가 크게 승리한 것을 계기로 노예해방선언과 함께 게티즈버그 연설을 한 것이다.

 

게티스버그 전투 사망자

이 연설에서 가장 유명한 문구는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가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게(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라는 말로 이것만큼 민주주의를 간단하게 요약한 말도 없다라고 평가된다.

그런데 people을 앞에서는 국민이라고 적었는데 인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데 의아심을 표명하는 한국인들이 있을 것이다. 이 부분에 관한한 <나무위키>명쾌하게 설명한다.

원래 한자문화권과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번역은 인민이라는 것이다. 광복이후 1947<경향신문>에서도 인민으로 번역했다. 그런데 반공주의, 매카시즘의 여파인민이란 단어가 터부시되면서 1960년을 전후로 '국민'으로 대체되었는데 2000년대 이후반공 컴플렉스가 사라지면서 다시 인민으로 번역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유도 명쾌하다. 근대민주주의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한 사회계약론에 따르면, 국가는 사람들의 사회계약에 의해 성립한 것이다. , 인민이 먼저고 국가가 나중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국민이라는 개념은 국가가 수립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만 쓸 수 있는 것이므로 이 경우에는 국가가 먼저고 국민이 나중이 된다. 따라서 국민에 의한 국가라는 것은 논리적인 모순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people인민으로 번역하는 것이 완벽한 것이 아니라는 지적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people공통의 관심사, 종교, 언어, 문화 등을 전제한 모임으로도 쓰이므로 인민과는 그 뜻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무위키>는 어느 표현이 맞는가는 취향차에 가깝다고 적었다.

여하튼 고등학교 법과 정치 교과서에서는 시민’, 세계사에서는 인민으로 번역했다. <위키백과><네이버지식백과>에서는 국민으로 번역한다.

 

<흑인들을 아프리카로 보내겠다>

전쟁이 끝나자 링컨남부를 관대하게 처리했다.

그는 남부군에 대한 어떠한 전범 재판응하지 않았다. 사실 남북전쟁이 끝나고 처형된 사람은 남부군의 포로수용소장 한 명 뿐이었다. 그가 이렇게 관대하게 남부군을 대우한 것은 전쟁의 궁극적인 목적연방의 단결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남북전쟁이 거의 끝날 무렵 많은 남부인들이 남부의 독립을 얻기 위해 노예제도의 철폐주장했다는 사실이다. 전쟁 종료 한 달 전, 제퍼슨 데이비스는 한 외교관을 시켜 영국과 프랑스두 나라가 남부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준다면 남부 연방이 자발적으로 노예를 해방시키겠다라고 제안했다.

로버트 리 장군도 남부 연방 의회에서 남군이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흑인들의 도움이 필수적이므로 그에게 30만 명의 흑인들에 대한 징병권을 인준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의 남부의 한 신문 사설도 이를 증명해준다.

 

남부의 독립을 쟁취하는 데 노예제도가 방해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성취하는 데 노예제도가 극복할 수 없는 방해물이 된다면 노예제도를 당장 폐지해 버리자.’

 

그러나 이런 발언들은 너무 때가 늦은 것으로 과정이야 어쨌든 흑인 노예들은 링컨에 의해 해방된 것은 사실이다. 비록 전세를 호전시키기 위해 노예 해방을 전격적으로 선언했다는 지적이 있지만 링컨에 의해 노예가 해방된 것은 틀림없기 때문이다.

학자들의 엄밀한 검증에 의할 경우 링컨은 결코 노예 해방 지지자가 아니었다.

막상 여러 가지 정황을 감안하여 노예해방령을 내렸지만 링컨노예해방이 궁극적으로 미합중국에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이에 대한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링컨은 노예를 해방시킨 뒤에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그들의 고향인 아프리카 라이베리아로 보내겠습니다.’

 

사실 대통령에 재임하면서 링컨흑인 지도자들에게 백악관에서 흑인들의 아프리카 이주 운동을 이끌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미합중국에 있는 모든 흑인들을 아프리카, 아이티, 중앙아메리카미국을 제외한 어느 곳으로든 이주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다.

링컨아프리카의 후손들을 아프리카로 돌려보내는 일도덕적 타당성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 링컨흑인들이 종교, 문명, , 자유라는 풍요한 결실을 지니고 고향 땅에 돌아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링컨은 전투가 한창인 1862121일 의회에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다.

 

나는 어느 때보다도 더 강력히 이주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의 제안은 구체적으로 진행되어 1862년에 의회는 컬럼비아 특별구에서 노예제를 폐지하는 것과 동시에 자유 흑인들을 아프리카에 보내기 위한 초기 예산으로 60만 달러를 책정하기도 했다. 물론 링컨이 옹호했던 이주 계획은 이주계획을 실무적으로 책임지고 있던 버나드 코크모리배로 판명되어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역사학자들은 인류사상 최대의 강제이주로 기록되고 있는 아프리카 노예매매1650년에서 1850년 사이에 1,200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미 대륙으로 옮겨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18세기에만 노예로 팔려간 아프리카인영국 253만 명, 포르투갈 180만 명, 프랑스 118만 명, 네덜란드 35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링컨의 행동을 합리화하는데 다소 유리하게 변용된다.

 

흑인의 목화 따기

링컨이 진행한 이주의 근본적인 근거는 숭고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주 계획도 숭고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계획한 흑인들의 이주가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는 점링컨에게 유리한 점으로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이런 링컨의 생각은 어떻게 보면 그의 정적 더글라스보다 더한 인종차별 주의자라고 지적한다. 노예제를 폐지하고 흑인 노예를 아프리카로 되돌려 보내자는 자체가 미국이 백인의, 백인에 의한, 백인을 위한 국가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 부분에 관한 한 링컨의 이런 주장을 인종차별로 보기 보다는 당시 현실을 고려한 결과라고 본다. 흑인 노예들이 해방되고 난 뒤에도 미국 사회의 편견과 차별사상 때문에 제대로 진입을 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한 결과라는 뜻이다. 특히 당시 흑인, 백인 서로 구역을 나눠살면 서로 싸울 일도 없고 좋다고 생각한 미국인들이 상당히 많았다는 것도 이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링컨의 통치 기간 동안에 벌어진 인디언에 대한 무자비한 정책링컨의 노예해방에 대한 진정성을 믿을 수 없는 증거로 제시한다. 1851년 미네소타의 샌티 수족 인디언2,400만 에이커의 땅을 141만 달러를 받고 연방 정부에 팔았으나 정부의 부패 때문에 돈을 받지 못했다.

 

미국 기병대에 쫓기는 인디언

그런데 18628 연방 정부채무 이행을 거절하고 또 다른 조약마저 파기하자 수족은 봉기를 일으켰다. 이 봉기는 10월에 진압되었고 303명의 인디언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사형 선고자는 39으로 줄어들었지만 링컨186212월 크리스마스가 지나자마자 처형에 서명했다.

물론 인디언에 대한 사냥남북전쟁끝난 후에도 계속되었다. 남군의 리 장군이 항복한 지 불과 석 달 만에 인디언을 상대로 한 전쟁이 개시되었다. 이 정책 역시 링컨의 유산이라는 설명도 있음은 물론이다.

링컨이 욕을 먹는 비난에 나름대로 두둔하는 논리도 만만치 않다.

남북전쟁이라는 특이한 기간에 링컨의회의 승인없이 기소나 고발없이 사람을 감옥에 보낼 수 있는 인신보호영장제도를 정지시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학자들은 이런 비난은 당시 전쟁이라는 상황미국 법을 모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제일 먼저 미국 헌법에는 반란 혹은 침략 등으로 인해 공공의 안전이 심각하게 위험에 처했을 때 예외적으로 인신 보호 영장을 정지시킬 수 있다는 조항이 있다. 또한 당시 워싱턴 D.C가 있던 메릴랜드에서 친 남부연맹 폭동 및 소요사태가 일어나 당시 휴정상태였던 의회에 국회의원들이 참석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또한 링컨은 대통령으로 의회의 선언없이 이미 '전쟁(반란)이 일어난 상태'임으로 대통령의 헌법 권한으로써 전쟁에 필요에 따라 인신 보호 영장을 정지시킬수 있었으며 정작 미국의회는 직간접적으로 링컨을 옹호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