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행성이나 혜성 같은 천체에 적용하면서 매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방정식에 따르면 우주는 시간에 따라 부풀수도 있고 줄어들 수도 있었다. 이 말은 우주가 시간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뉴턴은 우주에 별이 많은데 왜 서로 끌어당겨 부딪치지 않는지 의문을 보냈다. 사실 만유인력에 의하면 별들 사이가 끌어당긴다는 이야기가 되므로 우주의 모든 별이 하나로 모이는 것이 정상이다. 뉴턴은 우주의 별들이 바둑판에 놓인 것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우주에 무한히 퍼져 있기 때문에 인력이 상쇄되어 우주가 쪼그라들지 않고 균형을 유지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은 매우 타당하게 보인다. 어제도 태양이 떴고 내일도 태양이 뜰 것이 분명하다. 24시간을 기준으로 밤이 지나면 어김없이 낮이 온다. 우주가 어떤 방법으로든 전혀 변하지 않는 균형이 잡힌 공간으로 보이는 이유다.
아인슈타인이 우주에 대해 연구할 당시는 20세기가 막 시작하였을 때이므로 우주에 대한 지식이 수준 이하였다. 당시 지구의 나이가 46억 년이나 되었으며 우주의 나이가 137억 년이나 된다는 것을 몰랐고 우주에 우리 은하가 아닌 다른 은하가 수없이 많다는 것도 몰랐다. 당시 지구인들이 생각하는 우주는 10만 광년 크기의 우리 은하뿐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상대성이론을 도입하여 도출되는 우주가 줄어든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즉 그의 이론대로 한다면 우주는 이미 현재와 다른 비극으로 끝나야 했다. 그는 이런 모순점을 해결하기 위해 날카로운 아이디어를 도출했다. 한마디로 자신의 방정식에 ‘우주상수(Λ)’라 부르는 항을 추가한 것이다.
우주상수(Λ)가 중력과 반대 방향으로 작용해 밀어내는 반중력으로 작용하면 우주가 중력 때문에 줄어드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지 않는다. 즉 우주상수를 달면 우주는 부풀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완벽한 우주를 표현하는 방정식이 된다. 즉 우주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 공모양의 폐쇄된 공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주에 대한 정보가 과학기술의 발달로 축적되자 우주가 안정된 공간이 아니라 팽창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우주에 관한 인간의 지식을 상대성이론이 완전히 변모시켰지만 아인슈타인의 ‘우주상수(Λ)’는 우주에 대한 학자들의 생각을 양분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한마디로 우주가 팽창하는지 아닌지이며 이후 천문학계에서 노벨상이 수상되는 계기가 된다. 사실 노벨상에 관한 한 당대 천문학계는 변방이었다. 천문학을 물리학이 속한 분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하튼 아인슈타인이 제기한 문제에 제일 먼저 손을 댄 과학자가 빌렘 드 지터((Willem de Sitter, 1872 〜 1934)다.
네덜란드 천문학자로 아인슈타인의 친구이자 추종자인 드 지터는 일반상대성이론을 이용해 아인슈타인의 제안처럼 절대 변하지 않고 언제나 그대로인 정적인 우주 모형을 만들었다. 문제는 그의 우주 모형에 거대한 우주 공간에 물질이 전혀 없다는 가정이 붙어 있었다. 그는 정적인 우주가 존재하려면 아무것도 없는 우주 즉 어떤 형태의 에너지도 없는 우주는 물론 별도 없어야 했다. 별이 없다면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따를 경우 중력장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데 만약 별 주변의 공간이 중력 때문에 휘지 않는다면 행성이 대체 어떤 경로로 이동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태양계의 행성은 태양의 중력 때문에 태양 주변을 돈다. 즉 태양의 중력 때문에 태양 주변에 공간의 굴곡이 생기며 그 굴곡을 따라 행성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상대성이론을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것이 그물로 쳐진 트램펄린 놀이다.
어른이 올라가면 크게 늘어나고 아이가 올라가면 조금 늘어나는 그물을 중력의 힘으로 표현한다. 즉 그물이 중력 때문에 휜 공간을 나타낸다는 것으로 볼링 골을 그물 위로 던졌을 때 그물이 쳐지는 것을 연상하면 된다.
이때 혜성과 같이 등장한 선수가 러시아의 수학자 알렉산드르 프리드만(Alexandr Alexandrovich Friedmann, 1888 〜 1925)이다. 당시 러시아는 서구와 고립되어 있으므로 아인슈타인과 드 지터가 우주의 상태를 두고 갑론을박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당대의 주류와 떨어져 있다는 뜻인데 이것이 오히려 그에게 천혜의 기회였다. 즉 프리드만 혼자 독창적인 우주 모형을 만들 수 있었는데 그는 아인슈타인이나 드 지터처럼 변하지 않는 안전한 우주에 집착하지 않았다.
프리드만이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왜 아인슈타인이 우주상수를 굳이 만들었느냐이다. 그는 우주상수를 ‘0’으로 놓고 우주를 생각하자, 우주는 어떤 형태로든 변할 수 있다는데 착안했다. 그러자 우주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이 중요해졌다. 정적인 우주에서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중요하지 않다. 과거에도 현재의 모습이고 미래에도 현재의 모습을 유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변화하는 우주라면 곧바로 질문이 생긴다. 현재의 우주 이전 즉 과거의 우주는 어떠했으며 미래의 우주는 어떤 모습이 되느냐이다.
프리드만은 다소 놀라운 과거를 제시했는데 현재의 우주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과거부터 우주가 팽창하는 과정을 겪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를 뭔지는 모르지만 무언가가 우주의 별들을 온 사방으로 내던졌다고 생각했다. 즉 과거 언젠가 서로 모이려는 중력을 이기는 강력한 팽창이 있었으며 이 팽창 운동량이 아직도 우주 전체에 남아있으므로 현재 먼 옛날에 있던 팽창운동량과 별들 사이의 만유인력이 적당히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우주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설명이다.
아인슈타인과 프리드만의 생각은 전적으로 다르다. 아인슈타인은 우주 상수를 삽입하여 정적인 우주를 생각했지만 프리드만은 별들의 내던져짐을 창안하여 미래가 3가지 중 하나로 귀착된다고 주장했다.
① 우주에 별이 많다면 중력이 크므로 팽창 속도가 점점 줄어
결국 팽창이 멈추며 우주는 다시 쪼그라들어 한 점으로 모인다.
② 별의 수가 적다면 팽창하려는 우주에 대항할 중력이 부족해 우주가 영원히 팽창하며
결국 우주는 텅 빈 공간이 된다.
③ 별의 숫자가 적절하다면 우주의 팽창속도는 차츰 줄다가
어느 순간 균형을 잡아 영원히 그대로 갈 수 있다.
우주의 미래에 대해 가장 잘 알려진 3가지 경우 중 3번째가 아인슈타인이 절대적으로 견지하려는 정적 우주다. 그런데 이 아이디어를 도출한 프리드먼은 애초에 우주에 있는 별들을 무엇이 내던졌는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프리드먼을 천문학사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주가 가만히 있지 않고 시간에 따라 변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즉 프리드만은 붙박이처럼 보이는 별들이 붙박이가 아니라고 주장했는데 물리학계에서 무명인 프리드만의 역동적인 우주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마찬가지로 혁신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당대의 학계에서는 그의 주장에 냉담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는 프리드만이 1922년에 논문을 발표했는데 본래 수학자이므로 자신의 논문을 이론적으로 전개한 것이지 자신의 이론을 증명할 관측 자료 등 천문학 관측에 관한 어떤 자료도 제시하지 못했다. 사실 그에게 천문학 관측 자료를 제출하라는 것이 무리한 일이지만 여하튼 천문관측에 문외한인 그에게 점수를 주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논쟁을 야기한 장본인인 아인슈타인의 반응인데 그는 자신의 우주상수를 반박하는 프리드만을 이해할 수 없다며 프리드만에게 그의 계산이 틀렸다는 내용을 적어 학회에 보냈다. 당대의 슈퍼스타로 1921년에 노벨상을 받은 아인슈타인이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세계가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문제는 프리드만의 계산이 틀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추후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실수했다며 프리드만의 계산이 옳다고 했지만 한번 떨어진 프리드만의 신뢰도는 치명상을 받아 복구 불능이었다. 물론 외부의 시선과는 달리 프리드만은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켰는데 문제는 그에게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가 1925년 대기 연구를 위해 커다란 기구를 타고 7,400미터 상공까지 올라갔다가 열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했다. 그의 나이 37살로 논문을 발표한 지 3년 만의 일이다.
당대의 우주는 세 사람에 의해 지배되었는데 첫째는 우주상수가 포함된 아인슈타인의 정적인 우주로 시간이 지남에도 우주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는 드 지터의 가설로 그는 우주가 정적이라는데 아인슈타인과 동조하면서 우주 모형을 제시했는데 추후 그의 가설은 팽창하는 우주라는 것이 밝혀졌다. 물론 드 지터는 자신의 설명이 팽창하는 우주를 뜻하는 지 몰랐다. 러시아 수학자 프리드만은 연필로만 우주가 팽창할 수도 있고 줄어들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그후 천문학계를 온통 휘두르는 변화하는 우주다. 그러나 그는 논문을 발표한지 단 3년 후에 사망하여 그의 가설을 설명할 기회조차 없었다.
<우주팽창의 가능성>
아인슈타인, 드 지터, 프리드만이 연필로 우주의 모형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와중에 천문학계는 연필이 아니라 지구 밖을 관측하고 있었다. 여기에 신부인 조르주 르메트르(George Lemaître, 1894 ~ 1966)가 등장한다. 그는 1894년 벨기에 샤를루아에서 태어났는데 수학에 남다른 재주가 있어 어떤 종류의 식이나 계산이든 꼼꼼히 따지고 분석해 오류를 발견하는 것이 그의 특기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유럽의 많은 젊은이처럼 군에 입대했는데 수학 실력이 탁월하여 포병대에 배치되어 탄도 계산을 했다. 그러던 중 군지침서에 나온 탄도 계산에 오류가 있다고 상관에게 지적했다가 미운털이 박혀 참전 기간 내내 고생만하고 제대 후에도 전혀 포상을 받지 못했다.
1920년 전쟁이 끝나자 벨기에 루벵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여 최우등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성롬바우츠신학교에 들어갔다. 이곳은 자유로운 체제를 갖고 있어 신학과 화학, 수학 공부를 얼마든지 병행할 수 있었는데 그곳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거의 혼자 힘으로 공부했다. 1922년에는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이란 논문을 발표하여 벨기에 정부로부터 장학생으로 뽑혀 1923년 영국 유학을 갔다. 이때는 프리드만이 논문을 발표한 이후다.
영국에 도착한 르메트르를 받아준 사람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증명한 아서 해딩턴 교수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증명하려면 아인슈타인이 제시한 일식을 관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당시 아인슈타인은 독일인이었으므로 영국에서 적국의 과학자가 제시한 아이디어를 영국인이 수행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그의 일식 관측 프로젝트를 반대했다. 그러나 에딩턴의 이야기는 영국 과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독일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일식을 관측해야 한다.’
결국 에딩턴은 영국 학자들을 데리고 일식을 관찰하여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참’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2008년에 개봉된 「아인슈타인과 에딩턴」은 이 당시의 일화를 심도있게 다루었다.
르메트르는 에딩턴을 스승으로 삼고 착착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을 기본으로 수학과 관측을 통한 우주론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가 아인슈타인, 드 지터, 프리드만과 다른 점은 이들이 오로지 연필만으로 우주 모형을 연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르메트르의 자질을 인식한 에딩턴은 르메트르로 하여금 대서양 건너에 있는 또 다른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그의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추천장을 써 주었다. 이는 미국에 유럽 어디에도 없는 대형 망원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르메트르는 미국 동부에 있는 케임브리지의 하버드 대학의 천문학자 할로 세플리 박사의 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르메트르가 세플리 박사 밑으로 들어갈 때의 정황은 천문학계가 요동칠 때다. 그 요동의 주인공은 추후 천문학계의 슈퍼천재가 되는 에드윈 허블(Edwin Powell Hubble, 1889 〜 1953) 때문이다. 사실 천문학자인 허블의 이름을 딴 ‘허블의 법칙’, ‘허블 상수’는 물론 ‘허블망원경’ 등은 현대인이 아인슈타인에 버금갈 정도로 죽는 날까지 기억해야 할 고유명사다.
그는 1919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캘리포니아에 있는 윌슨산천문대 연구원으로 들어갔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위대한 발견을 한 허블은 꽤나 괴짜 인생을 산 과학자다. 좋은 말로 표현하자면 그야말로 소신 있게 인생을 산 과학자라고 할 수 있는데 시카고 대학에서 천문학을 전공했지만 그는 공부보다 스포츠에 남다른 자질이 있었다. 육상에 대단한 재능을 갖고 있었으며 특히 복싱에 자질을 보여 시카고 대표로 출전할 정도이다. 또 얼굴도 잘생겨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도 대단했는데 잠시 권투와 천문학에 대한 꿈을 접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강압 아닌 강압으로 영국 옥스퍼드 대학으로 건너가 법을 공부한 후 변호사가 된다. 변호사로도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육군 소령으로 복무했는데 사람의 일은 오묘하여 그가 전공으로 하던 천문학에 대한 꿈을 버릴 수가 없었다. 결국 변호사를 팽개치고 천문학자의 길을 다시 선택하여 윌슨산천문대의 연구원이 된 것이다. 허블이 윌슨산천문대를 선택한 것은 당대 세계에서 가장 큰 2.5미터의 망원경이 있기 때문이다.
허블이 천문대에 도착할 당시 천문학계에서 ‘안드로메다 성운’이 우리 은하에 있는 성운인지 우리 은하 밖에 있는 독립된 성운인지를 놓고 대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현재는 ‘안드로메다 은하’라고 바꾸어 부르지만 당대의 슈퍼스타인 할로 새플리는 안드로메다 성운이 우리 은하의 일부이며 우주는 우리 은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사실 그의 의견은 당대의 거의 모든 천문학자들이 믿는 전통적인 우주관이다. 반면에 히버 커티스 박사는 안드로메다 성운이 우리은하 바깥에 있는 성운이라고 주장했다. 누군가 한 명의 의견이 틀린 것이다.
문제는 윌슨산천문대의 신입 연구원인 허블이 커티스 박사의 주장 즉 성운은 우리 은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외부 성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상관인 새플리 교수에 반하는 것으로 같은 천문대에서 일한다는 것이 간단한 일이 아니다.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두 사람의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여기에는 개인적 문제도 개입했는데 새플리는 참전 반대자로 유명했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에 소령으로 참전한 허블은 평소에도 군용 코트를 입고 다녔다. 더구나 그는 영국에서 공부한 덕에 다소 부자연스러운 영국식 억양이 섞인 영어를 사용했다. 또한 스포츠맨으로도 날렸던 허블이므로 다른 사람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했다. 새플리로서는 고약스러운 부하였다.
그런데 허블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1921년 새플리가 하버드대학교 천문대 대장으로 승진하여 윌슨산을 떠난 것이다. 허블에게는 절호의 기회인데 1923년 10월 허블은 추후 그를 가장 유명하게 만들어줄, 단초가 되는 사진 두 장을 찍었다.
그는 안드로메다 성운 사진을 세밀하게 관찰한 후 성운 바깥 부분에서 변광성으로 보이는 점을 발견했다. 티끌이나 실수가 아닌 틀림없는 별이었다. 이 별은 31.4151일 주기로 진해졌다 흐려지기를 반복하는 ‘세페이드 변광성’이었다.
안드로메다 성운에서 발견된 세페이드변광성은 태양보다 7,000배나 밝았다. 결론은 그 별이 엄청나게 멀리 있다는 것이다. 허블은 이 변광성이 태양에서 90만 광년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우리 은하의 크기가 10만 광년이므로 안드로메다 성운은 우리 은하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은하 바깥에 있는 외부은하임이 분명했다.
허블이 윌슨산천문대에서의 관측 결과를 토대로 커티스 박사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자 결국 새플리 교수도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주는 우리 은하만으로 채워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했다. 지구인들은 갑자기 우주의 크기가 10배나 늘어나자 현기증을 일으켰는데 바로 이 시기에 신부복을 입은 르메트르가 미국 동부 케임브리지의 하버드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의 상관이 공교롭게도 새플리 교수였다.
참고문헌 :
「20세기 대우주탐험가 에드윈 허블」, 김지현 외, 과학동아, 2000년 12월
「허블 망원경과 허블」, 김형근, 사이언스타임스, 2008.08.25
『처음 읽는 우주의 역사』, 이지유, 휴커니스트, 2012
'물리 노벨상이 만든 세상 > 우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태초 3분간(2) (0) | 2020.09.16 |
---|---|
태초 3분간(1) (0) | 2020.09.16 |
우주 모형 (0) | 2020.09.16 |
우리 우주는 세 가지 중 하나(2) (0) | 2020.09.16 |
태초 이전 우주 (0) | 2020.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