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mausoleum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레움(1)

Que sais 2021. 1. 24.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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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7대 불가사의로 거론되는 마우솔레움이란 페르시아 제국 카리아의 태수 마우솔로스(기원전 377353 재위) 을 위하여 그리스의 보드룸할리카르나소스에 건조된 무덤을 뜻한다.

가로, 세로의 길이는 32x38미터, 총 높이는 거의 50미터로서 당시까지 세워진 무덤으로서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제외하고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마우솔로스의 누나이자 왕비인 아르테미시아가 그의 무덤을 축조했는데 그녀 역시 2년 만인 기원전 351년에 사망하여 그들의 아들이 완성했다.

학자들은 그의 무덤이 350년 경에 완성된 것을 볼 때 영묘 건설은 마우솔로스 왕의 생전에 착공된 것으로 추정한다. 마우솔레움처럼 수십 개의 조각상을 가진 방대하고 정교한 구조물을 완성하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우솔레움이 건립된 이유는 매우 잘 알려져있다. 마우솔로스 왕의 누이동생이자 부인인 아르테미시아 여왕이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슬퍼하면서 포도주에 마우솔로스 왕을 화장한 재를 넣어 마신 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겠다고 맹세했다.

아르테미시아가 자신의 약속대로 당대 세계에서 최고의 무덤을 건설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사건 중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한마디로 이 전설은 그 후 중세시대에 부부간의 사랑의 표본이자 미덕으로 여겨졌고 수많은 자수에 새겨진다.

 

<나는 존경받을 만하다>

기원전 4세기 경, 소아시아 서부의 '카리아' 지방은 혼동의 지역인데 '헤카톰누스' 왕이 주위의 몇몇 도시와 구역들을 관할하고 있었다.

헤카톰노스 왕은 매우 사납고 용맹한 야만인으로 잘 알려져 있었는데 그는 차츰 자신의 영지를 확장시키면서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세력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으며 페르시아에 대항하는 세력에 합류했다.

그런데 그의 페르시아에 대한 견제는 성공하지 못하고 기원전 377년 사망하면서 그를 그의 아들 마우솔로스와 딸 아르테미시아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마우솔로스도 아버지에 용맹한 전사로 그의 영토를 아나톨리아 지방의 남서부 해안까지 확장하였다. 학자들은 이 과정에서 그는 '리키아' 지방에 건설된 거대한 무덤들을 보았는데 이것이 그의 영묘 건설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와는 달리 매우 놀라운 결정을 내린다.

강력한 페르시아에 대항하다가 왕국이 해체되는 비운을 맛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페르시아로부터 자치권을 얻는 조건으로 태수직을 부여받는다. 페르시아라는 거대 제국이 있는데 작은 지역의 왕인 그가 닭머리가 되겠다고 아우성치다 멸망하는 것보다 소 꼬리가 되어 자국민을 통치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뜻이다. 그의 생각은 적중하여 시오스, 코스, 로도스 섬을 지휘하는 권한을 페르시아로부터 획득하여 실리를 얻으면서 아버지의 동지였던 이오니아 세력과 결별한다.

그의 이러한 정치적 곡예는 일단 성공했지만 그렇다고 미래가 확실히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국제적 정세에 따라 이오니아 세력들이 침략해 오는 것은 물론 페르시아도 공격해 올 우려도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비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 할리카르나소스를 철벽의 요새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영토를 모두 돌아본 후 할리카르나소스가 항구와 면하고 있는데다가 남쪽은 방어에 유리한 절벽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한다. 마우솔로스는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4개의 문이 있는 성벽을 할리카르나소스에 건설한 후 근처의 마을과 도시에 거주하고 있던 주민들을 이주토록 했다.

두 개의 커다란 축에 따라 도시가 건설되었으며 두 개의 크기가 서로 다른 항구도 건설했다. 작은 항구는 이곳 지리를 잘 모르는 적들이 무조건 접근하다가 혼란에 빠지도록 만든 전투용 항구였다. 부근에 요새로 된 무기고와 식량을 보관하는 창고를 건설하여 즉각적으로 침입자들을 응징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화려한 왕궁은 큰 항구 쪽에 건설했다. 왕궁이 건립된 지 3세기가 지나서 로마의 건축가이자 기술자인 비트뤼브가 이곳을 방문했는데 그는 건축가답게 할리카르나소스의 위용을 칭찬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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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강한 마우솔로스 왕의 궁전은 프로코네스 지역으로부터 온 대리석으로 대부분이 장식되었으나 벽체는 벽돌로 만들어 졌다. 이 벽체는 현재도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이 벽들을 얼마나 잘 닦고 관리를 철저히 했는지 유리의 표면과 같았다. 왕은 궁전을 건설할 때 소요되는 경비를 전혀 걱정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가 카리아 전 지역을 통치하는데다가 세금이 잘 걷혔기 때문이다.’

 

비트뤼비는 계속하여 마우솔로스 능력과 재주를 적었다.

 

마우솔로스 왕의 능력은 건축의 방법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밀라사에서 태어난 그는 할리카르나소스의 위치가 천연적으로 외적에 대비하여 방어에 유리하고 상업의 중심지로서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항구와 방파제를 만들고 많은 주민들이 주거하는 시설을 건설했으며 극장과 같이 부채꼴로 휘어진 항구의 부근에 시장을 형성했다. 매우 넓은 폭의 도로가 다소 경사진 언덕까지 연결되어 있다. 그가 죽은 뒤에 건설된 마우솔레움은 도로의 중앙에 위치하는데 그것은 세계의 불가사의라고 불릴 만하다.’

 

마우솔레움에 대한 명성이 얼마나 높았는지는 로마의 수사학자 루시앙이 적은 글에서도 알 수 있다. 마우솔로스가 사망한 후 지하 세계에서 전혀 위축되지 않고 도도한 태도를 보이자, 시니크의 디오젠느가 그에게 물었다.

 

디오젠느 : 당신은 무엇 때문에 우리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시오.

마우솔로스 : 첫 번째 나는 왕이었소. 두 번째는 내가 잘 생겼고 키가 크며 전쟁에서는 항상 힘이 있었소. 특히 나는 엄청난 기념물을 할리카르나소스에 건설했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어떤 사람이 만든 것보다 거대하고 웅장한 것이요. 그곳에는 수많은 영웅과 말들이 그야말로 역동적인 모습으로 대리석에 조각되어 있소.

 

마우솔레움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제외하고는 그 당시까지 건설된 어떤 기념물보다도 큰 규모였기 때문에 오뤼겔, 위세브, 플리니우스, 마시알, 포사니아스, 뷔트뤼브, 루시엥, 비잔틴 제국의 그레고리, 콘스탄틴 등 많은 학자들이 앞 다투어 기록했기 때문에 다른 불가사의보다는 비교적 많은 자료가 남아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마우솔레움 건설>

마우솔로스는 페르시아의 통치하에 자신의 영역을 확실히 지키면서 페르시아와는 달리 그리스풍의 도시들을 해안에 건설하였다. 특히 그리스의 민주적인 정치제도를 자신이 관장하는 도시들에 도입하려 하였지만 그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353년에 사망한다.

그러자 공동통치자였던 그의 누이동생이자 부인인 아르테미시아가 홀로 왕국을 경영한다.

그녀는 마우솔로스와의 약속대로 거대한 무덤을 건설하기 시작하는데 그녀는 곧바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기를 알아차린다. 막강한 마우솔로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로도스 섬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로도스도 세계7대 불가사의인 로도스 동상을 건설한 곳일 정도로 강단이 있는 곳인데 그들은 할리카르나소스를 공략하기 위해 해군을 파견했다.

로도스의 공격 소식을 듣자 아르테미시아는 큰 항구 안쪽에 있던 비밀 항구에 자신의 배를 숨긴 후 로도스 군이 상륙을 시작하자 로도스 해군의 측면을 기습하여 격파했다.

그런데 이때 아르테미시아의 기지가 발휘된다.

그녀는 자신의 부하들을 적선 즉 로도스 함선에 실은 후 로도스 섬 공략에 나섰다. 로도스 섬 사람들은 자신들의 해군이 승리하고 돌아왔다고 착각하면서 그들을 환영했는데 이것이 독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로도스섬은 함락되었고 반란은 진압되었다.

아르테미시아가 마우솔로스와 마찬가지로 당대의 여걸임을 알려주지만 그녀는 아쉽게도 마우솔로스가 사망한 후 2년 후에 죽었다.

그들의 유해는 화장되어, 아직 건설이 완료되지 않은 마우솔레움 무덤 내부에 안치되었다. 결론적으로 마우솔레움은 아르테미시아를 이은 아들에 의해 준공된다.

학자들은 마우솔레움이란 거대한 무덤이 기원전 353년에서 350년 사이에 건설되었다고 하지만 한마디로 2년이라는 짧은 시기에 거대한 영묘를 짓고 장식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라고 설명한다. 영묘는 마우솔로스가 살아있었을 때부터 건설되기 시작됐을 것이라는 추정으로 이는 당대의 관습으로도 틀리지 않는다. 당대의 지배자들은 집권하자마자 곧바로 자신의 무덤을 건설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무덤은 마을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지어졌다.

작업장의 중앙에 무덤 본체가 되는 석축이 놓여져 있었고, 사자의 석조상을 옆에 배치한 계단이 석축을 향해 세워졌다. 그리고 이 외벽을 따라 신과 여신상이 놓여져 있었으며, 모퉁이마다 말을 탄 전사의 조각상이 무덤을 지키는 형식으로 배치했다. 중앙에는 거대한 사각형 모양의 무덤이 영묘의 3분의 1 높이로 솟아 있었다.

무덤의 상단에는 36개의 가느다란 석조 기둥들이 세워졌다. 한 면에 10개의 기둥들이 세워졌고, 이 중 맨 끝 2개의 기둥은 서로 다른 면들이 공유했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석조 조각상들이 1개씩 놓여졌다. 기둥으로 둘러싸인 안쪽에는 거대한 지붕을 지탱하기 위한 벽돌이 쌓였다.

지붕의 맨 위에는 4마리 마차의 조각상이 놓였다. 이 마차에는 마우솔로스와 아르테미시아의 조각상이 타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아무것도 타고 있지 않았다는 설이 유력하다. 근거로는 그리스 세계에서 주인 없는 마차주인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마우솔레움은 당대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지만 그리스 본토에서는 이와 같이 거대한 무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스의 지배자들이 거대한 무덤에 무덤덤했기 때문으로 마우솔레움이 건설될 당시의 그리스 반도의 패자는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필립 2. 그런데 그는 거대한 무덤 건설을 반대했다. 알렉산더 대왕도 처음에는 아버지의 예에 따랐다. 즉 자신이 가장 아끼고 총애하는 장병들이 사망했을 경우에도 그리스의 전통에 따라 소박하고 간소한 무덤을 건설하도록 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동방을 원정하고 돌아오면서 마우솔레움에 대한 애착을 보였다.

그의 친구인 에페스티온이 인도 원정에서 돌아오다가 사망하자 건축가 디노크라테스에게 명령하여 마케도니아 인을 위해 건설된 무덤 중에서는 가장 큰 무덤을 마우솔레움을 본 따서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이와 같은 명령을 내리게 된 것은 마우솔레움이 있는 할리카르나소스를 공격할 때 받은 인상 때문이다. 알렉산더는 강력한 군대를 바탕으로 수많은 적군들을 패배시켰지만 할리카르나소스는 철벽의 요새를 근거지로 알렉산더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그런데 마우솔레움은 어느 곳에서도 잘 보이는 곳에 있었다.

당시 동방의 많은 도시가 거대한 무덤을 도시의 중앙에 건설하여 먼 거리 어느 곳에서도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니네베의 니노스 즉 세미라미스 여왕의 남편의 무덤도 그와 같은 예인데 마우솔레움은 그 중에서도 특별했다.

그러므로 알렉산더는 자신을 곤경에 몰아 넣고 있는 성안의 중앙에 우뚝 솟은 기념비적인 무덤을 매일 보면서 장병들을 독려했다. 할리카르나소스를 점령해야 마케토니아의 영광이 선다는 것이다.

여하튼 알렉산더는 할리카르나소스를 기원전 334년에 점령한다. 무덤이 완성된 지 20년도 채 안되어서다.

알렉산더가 할카르나소스를 점령한 후 자신을 애태우게 했던 마우솔레움을 보고 경탄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 후 알렉산더가 점령한 각지에서 마우솔레움을 본 딴 건물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세워진다. 이러한 영향으로 이들 건물의 표본이 되는 마우솔레움이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에서 빠진 적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건물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