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mausoleum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레움(3)

Que sais 2021. 1. 24.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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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솔레움의 발굴

마우솔로스 왕의 무덤에 대해 유럽인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에 들어서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대 유적지에 보물이 묻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보물찾기에 도전했다. 당연히 세계 7대 불가사의가 발굴 대상지로 제일 먼저 떠올랐다.

이 행운을 잡은 사람은 전직 대영박물관의 직원이자 로도스 섬의 영국 공사 찰스 뉴턴 경이다. 그는 185611월에 자신의 경력을 십분 발휘하여 마우솔레움을 발굴할 허가를 얻어낸다.

뉴턴은 로도스의 공사로 있을 때부터 마우솔레움의 발굴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영국의 귀족 중 귀족이므로 발굴에 필요한 충분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마우솔로스 왕의 유물을 발굴할 경우, 대영박물관에서 구매해 달라고 요청했다. 대영박물관에서는 그의 제안을 즉시 받아드리는 것은 물론 발굴 전문가들과 150명의 인원을 지원해 주었다.

그의 발굴에 대한 기본 자료는 대부분 로마의 작가인 플리니우스(기원후 237)가 마우솔레움에 대해 적은 것을 참고했다. 플리니우스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스코파스는 동시대에 세 명의 라이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브리악시스, 티모테오스, 레오카레스. 이들 모두 마우솔레움의 건설에 참여했다. 이 무덤은 카리아의 왕인 마우솔로스와 그의 누이동생이자 부인인 아르테미시아에 의해 건축되었다. 마우솔로스는 107차 올림픽의 두 번째 해(기원전 351)에 사망했다. 남과 북의 길이는 약 19미터이며 전면과 후면은 약간 작으며 둘레는 모두 합하여 약 134미터에 달한다. 높이는 12미터이고 36개의 기둥들이 둘러져 있다. 사람들은 빙 둘러져 있는 이 열주를 가리켜 프테론(날개를 뜻하는 그리스어)이라고 불렀다.

스코파스는 동쪽, 브리악시스는 북쪽, 티모테오스는 남쪽, 레오카레스는 서쪽을 담당했다. 그들이 작업을 마치기 전에 아르테미시아 왕비가 사망하였지만 그들은 작업을 중단하려고 하지 않았다. 비록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에 이미 이 건물이 불가사의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들 4명의 예술가에 경쟁심을 느낀 다섯 번 째의 예술가인 피테오스가 합류했는데 그는 프테론 위쪽으로 높이가 아래부분과 맞먹는 24개의 계단을 거치면서 꼭대기로 갈수록 점차 가늘어지는 피라미드를 건축했다. 그 옥상에 대리석으로 된 마차를 설치했는데 4두마차는 피테오스가 조각한 것이다. 이 장식들을 포함하여 건축물의 총 높이는 약 43미터에 달한다.’

 

뉴턴은 플리니우스의 이 기록에 따라 유적을 찾는데 열중했지만 발굴 자체로 보면 아마추어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턴은 발굴 사상 가장 획기적인 첨단 장비를 동원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것은 뉴턴이 처음으로 발굴 현장을 사진으로 찍었기 때문이다.

1839년 프랑스의 다게르가 실용적인 사진기를 처음 발명한 것을 생각하면 1856년에 벌써 사진기를 동원했다는 것은 대단한 안목이라 할 수 있다. 그가 발굴 현장 모습을 기록에 남기기 위해 사진기를 동원했다는 것은 유물 발굴사에서 혁명적인 일로 그 후 유물 발굴 현장에서 사진기는 기본이 되었다.

뉴턴은 1857년에 폐허에 쌓여있던 봉분으로 보이는 잔해들을 집중적으로 제거하기 시작했고 일주일도 안 되어 아름다운 모자이크 파편들을 발견했다. 이것은 뉴턴이 정확한 지점을 발굴하고 있다는 좋은 증거였고 계속하여 조각이 있는 파편, 그리스 식의 건축 잔해 등을 발견했다. 특히 프리즈에 조각되어 있던 유명한 라피테스족반인반마인 켄타우로스의 결투, 그리스인들과 아마존 여전사들과의 전투 장면들도 발견되었다. 이들은 현재 대영박물관아마존 전사들의 전투라는 이름으로 전시되고 있다.

그러나 마우솔레움은 너무나도 철저하게 해체되었기 때문에 뉴턴이 실제로 수집한 유물은 많지 않았다. 여기에서 뉴턴은 아마추어적인 발굴을 서슴치 않았다. 그는 자신이 발굴하는 지점에서 그가 원하는 것이 발견되지 않자 곧바로 다른 장소들을 파헤쳤고 만족할 만한 유물이 아닌 잔해들은 모두 파괴했다.

현대의 발굴학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행동이야말로 유적을 파괴하는 야만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의 발굴은 과학적이지 않았고 고고학자라는 직업조차도 존재하지 않았다. 유럽인들의 발굴 목적은 고고학적인 발견이 아니라 유물을 개인적인 목적으로 수집하는 것이거나 대형 박물관에 파는 것이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발굴에 소요되는 엄청난 비용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발굴 당사자가 모두 부담해야 했으므로 값나가는 유물을 찾는데 혈안이 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18574월이 되자 그는 마우솔레움의 장례방으로 연결되는 계단의 일부분을 발견하였다. 여기에서 뉴턴은 수많은 희생 동물의 뼈를 발견하였다. 1970년에도 덴마크 인들이 장례방으로 통하는 계단을 발견했으며 그 당시의 장례 의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이 재현한 장례 풍습은 다음과 같다.

 

왕의 시신을 안치한 후 장례방을 완전히 폐쇄한다. 그 후 양 한 마리, 5마리, 염소 8마리와 24마리의 닭을 희생물로 죽여서 계단에 놓는다. 그 다음에 달걀을 매우 정성스럽게 쌓았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전투에 나가기 전이나 중요한 사람들을 임명할 때, 신전을 짓거나 도시를 건설할 때 항상 희생물을 바쳤다. 마우솔레움에서도 이와 같은 의식이 치러 진 것이 확인된 것이다.

학자들은 현재의 정육점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동물들이 매우 규칙적으로 해체되었다는 것도 발견했다. 동물들이 너무나 말끔하게 절단되었기 때문에 도살자들이 특별한 장소에서 특별한 의식을 벌리면서 작업을 했다고 추측한다.

뉴턴은 완전한 형태의 작은 조상과 몇 개의 알바트르로 된 항아리를 발견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가 있었다. 놀랍게도 그곳에 쓰여진 이름은 페르시아 크세르크스 왕의 이름이었다. 할리카르나소스가 국제적인 도시임이 증명된 것이다.

그에게는 행운이 계속 따랐다. 마우솔로스 왕의 관이 있는 현실을 발견한 것이다. 그때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발견하려고 한 바로 그 방이었다. 여러 가지 정황을 감안할 때 도굴이 되지 않았다고 확신하고 마지막으로 관을 열었으나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 안에 있었을 부장품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뉴턴에게 불만은 발굴 자체만 볼 때 그가 발견한 유물들의 절대 숫자가 너무나 적다는 점이다. 더 이상 유물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자 대영박물관은 물론 그의 발굴을 적극 지원하던 외무성도 실망하고 철수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에게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발굴 장소 북쪽에서 대리석 판이 덮여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 때 발견된 것이 유명한 피테오스가 조각한 무덤 정상의 4두마차 파편으로, 바로 플리니우스가 적은 그 조각상이었다. 이 조각상은 현재 대영박물관의 전시품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일러스트레이드 런던 뉴스는 다음과 같이 이 조각상들이 영국에 도착했을 때의 상황을 적었다.

 

매우 귀하고 예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고대의 대리석들이 대영박물관에 도착했다. 대영박물관에 마우솔레움의 유물들이 도착했다는 것은 영국의 문화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계기를 거울삼아 국가적인 차원에서 더욱 이러한 발굴 작업을 지원해야 할 것이다.’

 

뉴턴이 발견한 대부분의 작품들은 대영박물관으로 옮겨졌는데 그 당시의 작업 과정이 바로 인디아나 죤스의 영화 레이더스의 모델이 된다. 뉴턴은 이 공적으로 특별히 창설된 대영박물관의 유물전시관의 책임자가 되었고 고대 그리스를 연구하는데 평생을 바쳤다.

발굴은 1900년대에 들어와서도 계속되었는데 1966년에서 1977년까지 덴마크 아루스 대학의 크리스티앙 제페슨 박사가 마우솔레움을 발굴했을 때 기샤르가 언급한 것으로 보이는 장식된 옷의 파편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얇은 금판으로 된 장식. 채색된 유리, 금으로 된 진주와 40여 개의 금판으로 된 장미꽃 모양들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고대 중동에서의 왕이나 왕족들의 옷을 장식했던 것들이다. 기샤르가 언급한 수도사들이 도굴한 후 떨어트린 부스러기조차 현대인들을 놀라게 하는 것을 감안할 때 무덤 속에 있었던 보물을 생각하면 아쉽기 그지없다는 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