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mausoleum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레움(4)

Que sais 2021. 1. 24.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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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마우솔레움의 전설

현대의 학자들은 마우솔레움을 대표하는 궁극적인 예술가는 피테오스로 생각한다. 그는 밀레에서 멀지 않은 프리엔느 마을에 이오니아식의 신전을 건축했고 자신의 작품에 대해 직접 책을 쓰기도 했다. 그 책은 물론 사라졌지만 비트뤼브가 그가 한 말의 일부를 전해준다.

 

건축가라면 자신의 능력과 정력만으로, 후대인들로부터 추앙받고 알려질 수 있는 어떤 특별한 분야를 갖고 있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지적은 건축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에 관련된다. 플리니우스에 의하면 피테오스가 프리엔느에 있는 아테나 신전도 건축했는데 많은 부분에서 마우솔레움은 아테나 신전을 따랐다고 적었다. 아름다운 이오니아식의 주두를 갖고 있는 두 개의 기념물은 서로 유사하며 여러 면에서 거의 같은 배율을 갖고 있다고 했다. 특히 프리엔느의 아테나 신전에 있는 초상 중에 하나는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남자의 상과 유사하다. 여러 가지 예를 보아서 마우솔레움과 아테나 신전은 건축적으로 매우 유사하므로 마우솔레움을 피테오스의 작품으로 간주해도 무리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 정설이다.

파피루스와 그밖에 몇몇 남아있는 자료에 의하면 피데오스라는 이름은 고대에 광범위하게 알려졌고 신전을 건설하는 건축가와 신을 조각하는 조각가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또한 그는 유명한 알렉산더의 초상을 그린 아펠의 아버지로도 알려졌으며 당대에 이미 예술 분야에서 진정한 혁명을 일으킨 예술가로 인정받았다. 이런 면을 감안할 때 피데오스헬레네 시대의 진정한 건축가라고 인식된다. 말하자면 마우솔레움이 피테오스의 작품이라는 자체만으로도 세계의 불가사의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뉴턴 경19세기에 마우솔레움을 발굴했지만 발굴은 계속되어 마우솔레움의 1층 평면이 알려졌다. 맨 밑바닥의 토대석인 포디움을 형성한 기둥은 36개로 3미터의 간격에 이오니아식으로 되어 있었다.

평면이 알려지고 마우솔레움의 규모가 확인되자 어떻게 거대한 조각상과 돌들을 올렸을까하는 의문점이 제기되었다. 포디움을 장식한 조각상들은 기중기를 사용했을 것은 틀림없지만 유명한 4두마차를 어떻게 올렸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학자들이 그 방법을 찾는 중이다.

근래의 연구로는 셍 피에르 요새의 천장이나 벽 속에 마우솔레움을 장식했던 조각된 돌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특히 수많은 돌에 당시 성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의 이름과 문장이 새겨져 있는데 그것은 모두 마우솔레움으로부터 온 것이다. 요새 안에는 그리스 식과 로마(라틴)식의 교회가 하나 씩 있는데 마우솔로스 시대의 돌임을 보여주는 정교하게 절단된 커다란 석회석 돌들이 요소요소에서 보인다. 아직도 많은 학자들은 마우솔레움의 놀라운 작품들이 교회의 지하 부분에 매장되어 있거나 두터운 벽 속에 보관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소아시아의 카리아 지역에서 당시로서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거대한 조각상들과 건축적인 요소를 조합하여 마우솔레움을 건설하게 된 요인으로는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마우솔로스는 아버지와는 달리 그리스인들과 결별하고 페르시아 측에 섰지만 카리아 지역에는 수많은 그리스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리스인들과 비그리스인들 특히 이집트인들간의 단결을 위해 각 지역에서 잘 알려져 있는 문화를 도입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에 가장 선진적인 문화를 갖고 있는 그리스 지역으로부터 건축과 조각 방법을 차용하고 이집트로부터 피라미드 형태를 도입하여 각 인종간에 화합을 꾀하였다는 뜻이다.

물론 마우솔레움은 마우솔로스 왕을 위한 영원한 안식처가 주목적이다. 이 무덤의 영향으로 헬레닉과 로마 시대를 거쳐 현재도 거대한 장례 건축물을 마우솔레움(Mausoleum)'이라고 부른다.

 

미켈란젤로 스승 마우솔레움

마우솔레움의 가장 큰 영향은 소아시아의 각종 기념물에서 곧바로 나타난다. 단적인 예가 페르가모의 제우스의 제단이다. 제단이 마우솔레움의 형태를 갖지는 않았지만 이 제단을 설계한 예술가는 조각상과 제단을 절묘하게 혼합하여 그것을 바라보는 참배객으로 하여금 새로운 감정을 느끼게 했다. 수많은 조각상과 기둥들에 조각된 부조가 제단을 향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외경심을 느끼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마우솔레움의 영향은 제단뿐만이 아니다. 무덤에 조각상들을 배치한 기법은 곧바로 다른 석관, 무덤들의 규범이 되었고 특히 조각상들을 기둥 사이에 배열하는 것은 후대의 건축가들이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이 되었다. 마우솔레움은 그리스 건축에 있어 새로운 규범을 제시한 것으로 큰 의의가 있다.

마우솔레움이 장례 기념물의 기본이 되자 도시를 세울 때 중심부에 무덤의 역할도 수행하는 신전들을 건설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특히 마우솔레움은 로마의 건축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많은 황제들이 자신의 무덤으로 마우솔레움의 형태를 선호했다.

당시 무덤의 개념이라면 피라미드 형태의 지붕을 한 죽은 사람의 집으로 인정돼 제물을 바치는 장소로 간주되었었다. 그러나 마우솔레움은 이러한 과거의 형태에서 한발자국 더 나아가 복잡한 건축과 조각들을 조화시킨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이다.

그것은 르네상스 시대에 새로운 개념을 불러 일으켰고 마우솔레움 유적에서 발견된 파편은 동시대의 예술가들에게 수많은 상상력을 북돋아줬다. 마우솔레움의 영향은 미켈란젤로가 그린 교황청에 있는 식스틴 성당의 기념적인 프레스코에 잘 나타난다. 물론 그의 작품 중에 나타나는 마우솔레움의 영향은 고대 무덤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니라 그 개념을 차용한 것이다.

 

마우솔레움의 비밀

학자들은 정말로 깐깐하다. 마우솔레움이 세계 7대 불가사의가 될 정도로 고대인들을 찬탄하게 만든 진정한 이유는 무엇이냐이다. 당대에 마우솔레움에 비견할 정도의 건축물은 수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가장 일반적으로 얘기되는 이유는 마우솔레움이 무덤으로서 당시에 피라미드를 제외하고 가장 큰 규모인데다 사자의 영원함을 보장하기 위해 인간이 보일 수 있는 과장된 용기를 유감없이 보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선 무덤의 규모가 당시 소아시아에서 건설되었던 어떤 것보다 매우 거대했다. 특히 그리스에서 거대하다라는 말의 콜로살(colossal)은 바로 이 건물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 정설이다.

마우솔레움이 지역적으로 좋은 위치에 있었던 것도 한 요인이다.

마우솔레움이 있는 할리카르나소스는 당시에 사용된 고대 선박을 이용하더라도 로도스의 거상과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불과 이틀밖에 걸리지 않았다. 고대인들이 방문하기 쉬운 위치에 있었다는 것도 큰 장점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마우솔레움이 당대에 있어서조차 무덤이라는 특성을 제외하면 가장 큰 건물도, 가장 잘 건축된 것은 아니면서도 불가사의에서 제외된 적이 없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바로 36개의 기둥 안에 설치되어 있던 놀라운 조각들 때문이다. 1521세사리아노는 당시의 조각가들이 자신의 재주를 마음껏 발휘한 보석이라고 적었다. 이 무덤을 그렇게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무덤을 장식하기 위해 외부에 설치되어 있던 조각상들이었다.

조각들은 알바트르 돌로 만들어졌는데 뉴턴 경이 발견한 남녀 한 쌍의 조각상이 현재 남아있다. 남자 상은 건장하고 수염이 있으며 머리는 매우 섬세하게 조각되어 영국 대영박물관의 최대의 수장품 중에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그가 입은 옷도 매우 정교하며 눈부실 정도로 조각 기술이 탁월하다.

이들 조각상이 중요하게 평가되는 이유는 조각상의 주인공이 신이나 영웅도 아니라 바로 그 당시에 살고 있던 사람의 초상이기 때문이다. 여자 상은 남자 상에 비해 많은 부분에서 손상을 입었는데 남자와 같이 매우 우아한 옷을 입고 있으며 역동적이다. 가슴과 허리 등 미인의 조건을 갖고 있는 섹시한 몸매는 동양의 아름다운 미를 보여주는 극치로 평가된다. 영묘를 장식하고 있던 다른 100여 개의 조각상들도 이 정도로 우수했다면 마우솔레움 자체가 걸작품의 전시장이었을 것이다.

이들 조각상이 철저한 파괴에도 불구하고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지진이 일어났을 때 떨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후 이들은 퇴적된 토사에 묻혀 있던 덕분에 석회로에서 녹는 운명을 면할 수 있었다. 또한 그리스 병사와 아마존족 사이에 벌어진 신화상의 전투 장면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 프리즈는 지역 주민들이 대리석판을 배수구 도랑 덮개로 사용했기 때문에 보존될 수 있었다.

뉴턴 경은 이 조각이 마우솔레움 꼭대기에 올려졌던 4두 마차 안에서 발견된 것을 근거로 마우솔로스 왕과 그의 왕비인 아르테미시아의 상이라고 주장했지만, 근대의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그리스인들이 기념물의 최옥상에 사람들의 형상을 조각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두 조각상은 기둥 사이에 있었거나 최옥상이 아닌 다른 위치에 있었던 조각상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여하튼 마우솔레움에서 발견된 조각상들은 실물보다 약간 더 큰 정도의 크기다. 20개의 사자 조각상들이 발견되었고, 그 외에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 조각상들이 다수 발굴되었다. 또 다른 중요한 발굴은 기반암의 두께였는데, 33m에서 39m에 달하는 엄청난 기반암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지진이 많은 터키 지역으로서는 그야말로 안전한 위치에 건설된 것이다. 고무적인 일은 현재에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으므로 추후 세계를 놀라게 할 유물들이 발견될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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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마우솔로스 영묘, 나무위키

마우솔로스의 영묘, 위키위키

세계 불가사의 여행, 이종호, 북카라반, 2008

세계7대불가사의, 이종호, 뜨인돌, 2001

세계의 불가사의 대탐험, YBM si-sa,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