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mausoleum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레움(2)

Que sais 2021. 1. 24.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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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솔레움의 수난사

마우솔레움은 다른 불가사의 즉 피라미드는 제외하고 중세시대까지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고 알려진다. 12세기에 들어서 테살로니키의 위스타티아스 주교불가사의가 서 있고, 그것이 아직도 존재한다니 너무나 경의롭다'라고 적었다.

프란시스코 코로나 신부는 이 유적을 야간에 본 후 수많은 판화를 제작했고 다음과 같이 그 흥분을 적었다.

 

이러한 걸작품을 보면 왕은 가장 능력 있는 기술자들을 동원했음이 틀림없다. 매우 정교하게 조각된 주두(여러 형태의 기둥들의 맨 윗부분에 얹히는 부재(部材))들의 파편들을 볼 때 그 건물의 온전한 모습을 생각하면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무엇이 인간들로 하여금 이렇게 거대한 돌들을 먼 곳에서 많은 돈을 들여 모으게 했을까. 이렇게 거대한 돌들을 어떤 방법으로 현장까지 끌고 왔을까를 생각하니 그 때 동원된 사람들의 작업 광경이 보이는 것 같다. 돌들을 접합하기 위해서는 어떤 모르타르를 사용했을까. 누가 피라미드에 비견되는 거대한 마우솔레움을 건설하려고 생각했을까.’

 

그러나 프란시스코 코로나 신부의 글이 쓰여진 지 채 20년도 되지 않아 이 위대한 건물 마우솔레움의 수난은 시작된다. 그것은 할리카르나소스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간 지역에 위치하며 십자군이 근거지로 삼았기 때문이다.

십자군들은 할리카르나소스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마우솔로스 궁전의 폐허 위에 커다란 성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십자군은 성을 건설하기 위한 재료의 공급처로 도시의 중심부에 우뚝 솟은 마우솔레움에 눈독을 들였다.

그런데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당연히 커다란 돌과 모르타르가 필요했는데 바로 마우솔레움이 적격이었다. 모르타르의 용도로 진흙, 점토, 역청 등을 사용했는데 로마인들의 새로운 모르타르는 그야말로 성능이 좋았다. 이 방법은 사용이 편리하고 견고하기 때문에 현재도 많은 건축 현장에서 사용되므로 우리들에게도 매우 익숙하다. 커다랗고 잘 절단돼 상태가 양호한 돌은 건축용 자재로 재사용 될 수 있으며 물론 손상이 심한 것은 모르타르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이 고대의 유적들을 바라보는 기준은 매우 단순했다. 기독교의 교리에 의할 경우, 이교도들이 사용하던 기념물들은 정신적으로 위험한 것이므로 필요한 경우 새로운 건물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무방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중요한 유적이라도 그들에게는 악마가 머물던 장소이므로 철저하게 파괴하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때의 정황을 후라 사바 디 카스티그리오느는 그의 군주인 이사벨 데스트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셍 피에르 요새의 대장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지 56일이 지난 후에 마우솔레움의 지하에서 매우 정교하게 조각된 대리석 조각상 1개를 발견했습니다. 나는 신의 도움으로 그것을 즉시 보러 가려고 생각했지만 한 가지 우려가 생겼습니다. 요새의 대장은 이교도들이 사용했던 고대 유물에 대해 많은 적개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조각상조차 석회로 만들라고 명령을 내렸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입니다.’

 

15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마우솔레움은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동로마 기독교도들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했던 콘스탄티노플이 회교도들에게 함락되는 사건은 바로 마우솔레움의 비극을 예견했다. 오토만 투르크가 언제 기독교인들의 근거지를 공격할 지 모른다는 점이다.

이 때 두 가지 극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첫 번째는 투르크의 포병대가 요새의 벽을 파괴할 수 있는 대포를 개발했다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인들에 공포감을 심어주어 수많은 전선에서 철수하게끔 했다.

두 번째는 술탄의 동생인 젬의 배반이다. 그는 1482년 로도스 섬에 있는 기독교인들의 캠프로 투항했다. 이 사건으로 양 진영에서 적대감이 고조되었고 투항한 술탄의 동생 젬은 교황과 새로운 십자군을 파견하는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교황청으로 달려갔다.

젬의 배반은 기독교인들에게 희망이었다.

젬이 십자군을 동원하는데 성공한다면 할리카르나소스에 주둔하고 있던 기독교인들은 구제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새로운 십자군이 도착할 때까지 진지를 고수하기만 하면 되었다.

이 사태가 마우솔레움을 완전한 파멸로 몰아갔다. 십자군들이 건설한 요새인 보드룸에 주둔한 기사들은 요새를 보강하기 위해 새로운 돌들을 찾았다. 그들은 선배 기사들이 사용한 방법을 답습했다. 요새를 보강하기 위해 가까운 곳에 있는 마우솔레움을 구성하던 대부분의 돌들을 사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때 대부분의 커다란 돌이나 잘 다듬어진 대리석들은 기사들의 국가나 소속을 알려주는 문장을 만들거나 간판으로 사용되었다. 1522년에 드디어 마우솔레움의 잔해는 완전히 사라지고 대지가 평평하게 되었다.

거의 50년 후에 이 현장을 방문한 프랑스 리용의 클로드 기샤르는 마우솔레움의 유적에 대한 당시의 상황을 잘 전해주고 있다.

 

‘1522년 슐리만 술탄이 로도스 섬을 공격했을 때 어떤 요새라도 간단하게 공격하여 점령할 수 있다는 것을 알자 보드룸 요새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요새를 더욱 견고하게 보강할 것을 지시했다. 요새는 곧바로 보강되기 시작했으며 대부분의 돌들은 마우솔레움으로부터 갖고 왔다. 기사들의 이러한 노력으로 마우솔레움이 서 있던 커다란 공간은 마치 동굴의 천장이 열려진 것과 같았다.

초를 들고 그 열려진 공간으로 들어가자 그 속에 커다란 4각형의 방이 있었는데 기둥들은 모두 조각되었고 벽들이 온통 장식되어 있었다. 기둥 사이는 여러 가지 색깔의 대리석 칸막이와 판이 있었는데 한 벽에는 전투 장면이 돋을새김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모두들 조각의 아름다움에 놀랐지만 그 조각의 운명 역시 똑같았다. 모두 요새로 옮겨져서 석회로 만들어지거나 요새를 보강하기 위한 석재로 사용되었다.’

 

마우솔레움의 지상에 있는 유적은 완전히 소멸되었지만 지하부분은 1570년경까지에도 거의 온전한 상태에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기샤르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이야기를 적었다.

 

여러 방을 연결하는 복도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흰색 대리석으로 장식된 무덤을 발견했다. 그 아름다움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시간이 없어서 다음날 무덤의 뚜껑을 열기로 하고 철수했다. 그러나 다음날 다시 와서 보니 무덤은 열려져 있었고 장식된 옷들의 조각들이 땅에 떨어져 있었다. 우리들이 철수한 후에 약탈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누군가가 밤에 와서 관을 열고 매장품을 도굴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무덤 속에는 엄청난 보물들이 있었을 것이다.’

 

기샤르는 지하를 발굴한 후 날이 너무 늦어 다음 날 다시 왔는데 그 사이에 도굴이 되었다고 생각했고 시신도 도둑맞았다고 생각했다.

이 기록은 마우솔레움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세계의 불가사의 중에서 비교적 후대까지 존속하였던 마우솔레움요새를 보강하기 위해 순식간에 파괴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마우솔레움의 보물은 그동안 터키인들이 약탈했다는 것이 정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마우솔레움의 보물들은 약삭빠른 기독교인들에게 약탈당한 것이다. 약탈은 그 성에 있었던 수도사들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기샤르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범인이 누구인지를 적을 수 없다고까지 실토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그들이 그토록 겁을 먹은 투르크의 공격은 할리카르나소스가 아닌 로도스 섬에서 일어났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소아시아 지역에 있어 최후의 거점이었던 보드룸을 곧바로 포기하고 대응에 나섰지만 그 역시 효과를 보지 못했다.

터키가 이들 지역을 무혈 입성하였는데 그때는 이미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위용은 회생불가능하게 파괴되고 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