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이집트 피라미드

피라미드(38) : 이집트의 영광(19)

Que sais 2021. 3. 5.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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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저의 방화>

도서관은 로마인이 점령했을 때에도 계속 그 영광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한 때 장서는 무려 70만 권이나 되었다고 알려진다. 그러나 시저가 기원전 47년 이집트에 상륙했을 때 도서관은 또 다시 철저하게 파괴된다. 그가 알렉산드리아를 공격할 때 부하들이 도서관에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안토니우스는 시저에 의해 불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보고 클레오파트라가 매우 애통해하자, 그녀를 위로하고자 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쌍벽을 이루던 페르가몬 도서관에서 20여만 권에 달하는 두루마리를 가져와 클레오파트라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 이야기가 역사적 근거가 없는 낭만적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당대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불타자 페르가몬 도서관을 보다 확충하려고 한 페르가몬에서 20여 만 권에 이르는 장서를 주었다는 것은 비상식적이기 때문이다.

근래 시저가 도서관을 태웠다는 누명은 벗겨질 전망이다.

유명한 키케로가 기원전 45년에서 44년까지 시저를 방문했을 때 그에게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가져온 몇 권의 책을 주었다. 그런데 만약에 당시에 도서관이 파괴되었다면 그 사실을 키케로가 자신의 글에 적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그것은 키케로가 클레오파트라를 매우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글에서 도서관의 파괴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을 볼 때 당시에 시저가 도서관을 태우지 않은 것은 물론 도서관이 건재했을 것임을 유추케 만들어준다.

그 후 273년에 로마의 황제인 아우렐리아누스와 제노비아 여왕 즉 로마의 식민지였던 팔미라의 여왕과의 전쟁이 발발했는데 전투가 알렉산드리아의 궁정 부근에서 일어나 도서관은 또 한 번 철저하게 파괴된다.

그러나 도서관의 가장 큰 파괴 원인은 역시 로마시대에 도입된 기독교 때문이었다. 그들은 수많은 신들을 믿는 그리스인들의 사고 자체를 이단시하여 그리스 시대의 지식을 전파하는 것조차 금지했다. 특히 기독교가 국교로 되자 우선 도서관의 예산을 줄이고 학자들과 학생들을 축출했다. 도서관의 예산은 줄어들었지만 고집스러운 학자들에 의해 명목만은 유지되었는데 640년 아랍이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면서 주인이 바뀌고 만다.

이때 피라미드 안에 보관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지도와 보물을 찾기 위해 피라미드 속을 뚫었던 칼리프 알 마문(812833 재위)은 누구보다 책에 대해 애착을 갖고 있어 도서관에 보관된 엄청난 자료들을 보자마자 곧바로 학자들과 함께 바그다드로 보냈다. 이 당시에 도서관의 자료들이 바그다드로 이송되었기 때문에 수많은 장서들이 사라지는 것을 막아 주었다. 유명한 고대 그리스 학자들의 작품이 현재까지도 알려 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덕택이다. 알 마문에 대해서는 피라미드 발굴과 관련되므로 뒤에서 다시 설명한다.

아직도 학자들은 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위치가 현재의 어디쯤 되는지 명확하게 단정 짓지 못한다. 그냥 막연하게 알렉산드리아에서 폼페이 기둥이 있었던 곳이 도서관 자리가 아닐까 추정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은 21세기에 다시 살아났다. 200210알렉산드리아 도서관(Bibliotheca Alexandrina)’을 개관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가 세계 각국의 지원을 받아 1987년부터 추진해온 일이 드디어 성과를 맺은 것이다.

 

파피루스

새로 건축된 이 도서관은 10층짜리 건물로 높이 32미터에 달하는데, 고대의 도서관과 같이 지중해를 마주보도록 지어졌다. 설계자는 노르웨이 건축가 스노헤타(Smohetta AS)이며, 그는 1987년 국제 현상 공모 628명의 응모자 중에서 당선되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아스완 지역에서 채취한 화강암으로 지었는데, 그 벽면을 고대 이집트 문자들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언어들로 치장했는데 그중에는 한글도 있다. 도서관 신축 공사에는 세계의 많은 나라가 자금과 기술, 장비를 지원했는데 이집트 정부5헥타르 부지를 제공하고 아랍 산유국들이 6,500만 달러를 기부. , 일본은 시청각시설, 노르웨이는 열람실 집기, 독일은 자료 자동 운송기기, 짐바브웨는 대리석, 남아공화국은 케이블, 이탈리아는 복구기술을 각각 제공했고, 프랑스는 도서관 직원 정보처리 교육을 맡았다.

신축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는 각국에서 보낸 도서, 마이크로필름, 원고 등 수십 만 점이 보관되어 있다. 이중에는 과거 알렉산드리아에 흩어져있던 지역도서관에서 수집된 고서들과 5,000여 권에 이르는 10세기~18세기의 중요 과학도서들이 포함돼 있다. 유네스코가 주관하는 이 도서관은 전설로 전해오는 고대 도서관을 되살리는 것뿐만 아니라 인류 공동의 이상적인 도서관을 목표로 삼고 있는데 입구에 한글도 보인다.

 

<파피루스>

파피루스(Papyrus)는 이집트의 나일강 삼각주의 늪지대에서 자라는 갈대의 일종으로 벼목 사초과의 여러 해 살이 풀이다. 본래는 남부 유럽, 서남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서식했으며 지금은 남수단의 늪지에 대량으로 서식한다. 키는 35미터까지 자랄 정도로 매우 크며 줄기는 삼각형이나 각이 둥근편이다. 잎이 퇴화되어 거의 없으며 본줄기 끝에 410개 정도 남아 붙어 있을 정도다. 마치 꽃받침을 연상케 한다.

꽃차례는 다발형으로서 1030 cm 길이의 가는 줄거리가 약 40100 개 뭉치거나 방사선으로 뻗으며 그 끝에 이삭이 열린다.

예로부터 멍석이나 바구니, 샌들, 돛 등을 만드는 데 이용되었다. 하지만 파피루스의 독특성은 바로 그 줄기를 이용하여 종이를 만들었다는 데 있으며 오늘날 종이를 뜻하는 영어 페이퍼(paper)’의 어원이다.

파피루스 종이를 만드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단면이 삼각형으로 된 파피루스 식물의 줄기를 길이 30센티미터 정도로 얇게 잘라서 여러 개를 서로 이어붙인다. 그 다음 그 위에 다시 한 번 90도 각도로 엇갈리게 한 겹을 더하여 압축시키면 줄기에서 나오는 즙이 나와 접착제 역할을 하여 자연적으로 접착되고 이것을 건조시키면 누런 빛깔의 종이가 된다. 삼베같은 느낌의 무늬가 생기는 이유다.

보통 20여 장의 사각형 파피루스를 하나로 이어 사용하는데 10미터 길이의 두루마리 파피루스 용지도 만들 수 있었다. 점토판이나 양피지에 비해서 내구성이 약했으나 양피지에 비하면 재료를 구하기 쉽고 가격이 싼데다 점토판에 비하면 무게가 가벼워서 문서를 대량으로 기록하는데 적합하여 애용되었다. 내구성이 약하다하지만 3000년이 넘는 파피루스들이 현재도 발견되며 화학물질에도 비교적 강하여 수많은 고대 이집트 문헌들이 현재도 전해지고 있다.

파피루스에 자신의 역사, 문화, 생활상 등을 모두 기록하게 된 이집트인들은 문화적인 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여타 민족을 압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집트를 정복하였던 침략자들을 이집트의 문명에 동화시킨 요인이기도 했다.

당시 다른 고대 국가에서는 돌이나 점토판에 기록을 남겨야 했으므로 가볍고 편리한 파피루스의 인기는 대단했다. 파피루스는 고대 사회에서 이집트의 주력 수출품으로 이집트의 부를 축적하는 가장 큰 원천이기도 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갈릴레오 갈릴레이처럼 유명인의 저작물 원본도 파피루스에 기록한 것이 있다.

중국에서 제지법이 전해지기 전까지 유럽에서도 양피지와 함께 문서 기록 용도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751 고구려 출신 당나라 장수 고선지 장군이 지휘하는 당나라군 이슬람세계와 벌린 탈라스 전투(Battle of Talas)에서 패배하여 포로가 된 당나라 제지업자 출신 병사들에 의해 제지법이슬람 세계로 넘어오고, 제지법이 확산된 12세기부터는 생산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파피루스는 문자 기록 용도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다. 섬유질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의외로 단맛이 있으므로 구워먹거나 생으로 먹었다. 딱딱한 겉껍질이 아니라 내부 섬유질을 먹었다는 뜻으로 그야말로 버릴 것이 없는 식물로 평가된다. 갈대배를 만들때도 파피루스를 엮어 사용했는데 에티오피아에서는 요즘도 파피루스로 카누를 만든다.

파피루스는 현재 이집트에서도 군락을 볼 수 없을 정도로 퇴조했는데 고대이집트에서는 파피루스가 거의 숲을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많은 고분벽화를 보아도 그렇다.

신화 속에서도 이시스 여신이 아들 호루스를 파피루스 숲에 숨겨주는 장면이 나온다.

나일강변의 풍경을 지배했던 파피루스하 이집트의 나라꽃이 되었으며 기둥 장식 역시 파피루스를 본 떠서 만들었다. 이를 파피루스 기둥이라고 한다. 파피루스는 하토르 여신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하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에 하토르 신당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는데 하토르 여신이 암소의 형상을 하고 파피루스 숲에서 나타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